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을이 된 갑들 (3)
“이준철이?”
“아니, 그 쌍놈 새끼가 이 사건 당당자라고?”
빅5 사장들이 모인 회의실에선 신음이 흘러나왔다.
해당 사건을 공정위가 맡아 줬다는 기쁨도 잠시.
담당자가 바로 자신들을 풍비박산 냈던 이준철이란 걸 들었을 땐 환호가 절망으로 바뀌었다.
“이건 안 돼! 해 보나 마나야.”
특히나 대웅조선 조 사장의 반응이 격렬했다.
그놈 하나 때문에 물갈이된 임원이 몇 명인가. 특허 도용을 책임을 지고 사장급부터 본부장까지 옷을 벗었다.
대성중공업은 작업 중지 명령으로 주가가 거의 반 토막 나 버렸고, 그때 주저앉은 주가가 아직도 회복을 못 하고 있었다.
이건 공정위의 저의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국내 중공업체에 적대적인 사람을 담당자로 배정한 건 곧 ATT의 편을 들겠다는 게 아닐까?
“이럴 거면 차라리 철회하는 게 낫지.”
“공정위가 ATT 편을 들어 주면 놈들의 횡포가 더 심해질 거라고!”
다들 그렇게 불안에 떨 때, 한 사내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고발을 철회하는 건 좀 더 두고 보자고.”
“유 사장, 그게 무슨 말이야? 담당자가 이준철이라니까. 그놈 악명을 몰라?”
“사정은 잘 아는데, 그렇다고 어떻게 고발을 철회해. 우리가 이 기회를 어떻게 얻었는데.”
“이건 기회가 아니라 위기야! 그 자식은 국내 중공업계에 무조건 적대적이라고.”
“그건 해 봐야 아는 거 아닌가. 사실 그때 공정위한테 제재를 받은 건 사유가 충분했잖아. 반대로 이번엔 우리 사유가 더 충분해.”
절박함 끝에 겨우 얻은 기회다.
ATT는 노른자 특허를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국내 조선 업계는 더 이상 횡포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고, 피해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다수의 증거도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가 재빠르게 굴러가다 대웅조선 조 사장에게 모였다.
“조 사장…… 어떡하면 좋겠어?”
그의 얼굴은 시시각각 꿈틀거렸다.
이준철이가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공정위가 이 사건을 겨우 맡아 줬는데 쉽게 철회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자.”
“……괜찮겠어? 그놈은 우리한테 적대적인 놈인데.”
“유 사장 말대로 그건 까 봐야 알아. 그리고 이 사건은 누가 봐도 우리가 피해자야. 공정위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으니 사건 접수시켜 준 거라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준철, 얼마나 예리한 칼인지 잘 알고 있지 않나. 젊은 놈답지 않게 일 처리 확실하고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적으로 만나면 질색할 상대지만, 편으로 만나면 이만큼
믿음직한 놈이 없다.
대성중공업의 최 사장도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나도 조 사장 생각과 같아. 솔직히 이번 사건은 우리 피해가 명확하잖아? 어쩌면 그자가 맡는 게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네.”
오히려 좋다.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 놈이 우리 편이라면.
“좋아, 그럼 이제 그 얘길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얘기가 정리되자 바로 주제가 넘어갔다.
“만약 공정위가 ATT를 제재한다 해도 놈들은 절대 안 들어 먹을 거야. 국적도 프랑스라 강도 높은 규제를 때릴 수도 없어.”
“그럼…… 우리 진짜 그 얘기 꺼내 보는 건가?”
“그래. 저장 탱크 안정선 기준 낮춰 달라 하자.”
“가스공사가 너무 높은 기준치를 요구하고 있어. 이거 규제만 좀 완화해도 우리 ATT한테 이렇게 휘둘릴 필요 없다고.”
그것이 이들의 플랜 B였다.
공정위가 ATT를 제재하지 않으면 국내 안정성 기준을 낮춰 버리는 것.
비록 ATT의 안정성은 못 따라가도, 비슷한 안정성에 가성비 좋은 저장 탱크는 시장에 널리고 널렸다. 그 가성비 저장 탱크 중 하나는 국내에서 개발한 KC탱크도 있었다.
“우리 국내 업체가 개발한 KC탱크. 이거 규제만 완화하면 쓸 수 있어.”
“근데 다들 그거 진짜 쓸 거야? 이거 그때 시연 했는데, 외벽에 결빙이 생겼잖아.”
“기술은 계속 보완해 가면서 쓰면 돼. 그리고 누가 이걸 바로 쓰자 했나. 우리한테 이런 카드가 있다는 걸 보여 주면 ATT도 로얄티 낮추든 뭐든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야.”
실패한 국산화 모델, 당장 상용화할 순 없지만 저력은 보여 줄 수 있다.
이런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 주면 놈들의 갑질 수위도 좀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일단 한번 진행해 보자.”
“오케이.”
“다들 이준철 만날 때 말조심해. 과거의 감정이 나와선 안 된다.”
“당연하지. 절대 그놈 심기 거스르지 말자.”
***
“오랜만입니다, 팀장님. 안 본 새 풍채가 좋아지신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예, 뭐. 덕분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팀장님께서 작년에 공정인 상까지 타셨다고요. 예전에도 느꼈지만 팀장님은 참 강직하신 분 같습니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불철주야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데 소문이 안 날 도리가 있나요. 팀장님 같은 분이야말로 애국자라 생각합니다.”
잔뜩 긴장하며 성사된 첫 만남.
굉장히 민망한 자리가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조금 다른 쪽으로 민망하다. 자리에 모인 이들은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 내며 정신을 쏙 빼놓았다.
온갖 안테나를 다 동원했는지, 준철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아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저희 같은 산업 역군과 팀장님 같은 애국자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모쪼록 묵은 감정은 털어 내고 국익 하나만 생각해 주십쇼.”
국익이라…… 원천 기술 하나 없어서 온갖 바가지를 다 뒤집어쓰고 있는 놈들이 또 이럴 땐 국익을 찾는다.
국내 조선 업계 편들어 달란 빤한 소리다.
“대웅조선 조명수 사장님이십니까?”
준철은 눈을 돌렸다.
“예. 제가 이 사건 고발을 담당한 조 사장입니다.”
“제가 알던 분이 아니시네요.”
“그때 그 사건 이후 저희 전직 임원들은 전부 싹 다 물갈이됐고, 부족한 제가 사장 자리를 맡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덕분에 저는 초고속으로 사장까지 진급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말 뭣하지만 팀장님과 제가 인연이 좀 있나 봅니다.”
이들의 과한 아부가 안쓰럽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했다.
하청 사장한테 접대를 받을 때도 이렇게 민망하진 않았었는데.
하지만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놈들의 편을 들어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냉정하게 사건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먼저 보강 자료 좀 보고 싶은데, 준비됐나요?”
“예. 저희 대웅조선 자료는 모두 준비했습니다.”
“대성도요.”
“현진도 자료 가져왔습니다.”
기업 자료를 이렇게 쉽게 받았던 적이 얼마나 되겠나. 경찰 부르고, 압수수색영장 발급받고, 밑에서 육탄전까지 강행하다가 받는 게 이 기업 자료다.
그걸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가져온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게 분명하다.
준철은 서류를 살피더니 말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ATT가 라이선스만 넘기면 되는데 그걸 시공까지 하겠다 했다고요.”
“네. 아주 악질인 놈들입니다. 냉장고 하나 사는데 자꾸 설치까지 받으래요.”
“솔직히 이게 말이나 될 소립니까?”
“이건 명백한 끼워 팔기죠. 그 정도 기술자들은 있습니다. 그냥 라이선스만 줘도 돼요.”
준철이 서류를 넘겼다.
“사실 이 문제를 ATT사에도 물어봤습니다. 근데 그쪽은 시공 과정에서 특허 유출이 될 확률이 있어 안 된다 했더군요.”
“그건 핑곕니다! 막말로 그거 시공 못 하게 한다고 저희가 특허 못 봅니까? 완제품 분리해서 무슨 작업인지 다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냥 시공 작업까지 팔아먹어서 이득 취하려는 겁니다.”
준철은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자료 받았으니 저희가 검토해 보죠.”
“네.”
“오늘은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돌아설 때.
갑자기 한 사내가 쓱 손을 내밀었다.
“저 팀장님. 저희가 좀 다각적인 논의를 해 보고 싶은데…… 몇 말씀 더 드려도 될까요.”
“다각적인 논의요?”
“네. 사실 이 사태가 온 이유도 다 그놈의 독점 때문입니다. ATT사의 독점. 근데 이게 다 가스공사가 너무 높은 안정성을 요구해서 벌어진 참사란 말이죠.”
그들은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사실 저희도 이 저장 탱크를 상용화한 모델이 있습니다.”
“KC탱크 말씀이십니까?”
“네, 아시는군요.”
“가스공사가 400억이나 투자해서 개발에 들어갔는데, 결국 기술적 한계를 못 넘었다고 뉴스가 실컷 나갔더군요.”
“하하…… 기사가 좀 과장된 모양입니다. 탱크 외벽에 약간 결빙 현상이 있었던 것뿐인데.”
“사실 뭐 기술 개발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겠습니까. 2세대 국산 저장 탱크를 개발 중이고 지금도 기술 진전이 많이 이뤄졌습니다.”
준철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엉뚱한 소릴 계속 해 대는 걸 보니 역시 꿍꿍이가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국내 기준치가 너무 높아요. ATT의 안정성은 인정한다만 그 기준을 조금만 낮추면 충분히 좋은 기술도 많습니다.”
“설마 그 실패한 KC탱크를 상용화하겠다는 건 아니죠?”
“단거리 노선엔 충분히 쓸 만한 탱큽니다. 사실 저희도 ATT와 오래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독점적 지위를 갖는 건 결국 다 까다로운 국내 기준치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완화해 주시면 저희 기업끼리 상의해 합의점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팀장님께도 누를 덜 끼칠 겁니다.”
준철은 자료를 덮었다.
그럼 그렇지. 대기업들이 단순히 억울하다고 해서 고발을 해 대진 않는데.
현 상황 자체를 이용해 보려는 거다. 공정위에게 ATT 제재해 달라 하고, 뒤로는 국내 기준치를 낮춰서 그들의 특허 몸값을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다.
“재밌군요. 혈세 400억 투자해서 실패한 기술을 끝끝내 상용화하겠다고 하시니.”
“지금은 그때랑 많이 달라졌습니다. 충분히 쓸 만해요. 모쪼록 팀장님께서 잘 봐주시면…….”
“어림없다는 거 아시죠?”
“……예?”
“제가 LNG 선박에 대해 잘은 몰라도, 응축시켜 놓은 천연가스가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압니다. 가스공사가 뭐 국내 조선 업계 괴롭히려고 그렇게 높은 기준치를
만들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난 태평양 한가운데서 핵폭탄이 터지는 거 원하지 않아요. 국내 기준치 낮출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마쇼.”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저희는 공정위입니다. 해당 사건이 부당 계약인지 아닌지만 판단하지, 기술적 얘기 이런 건 관심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고.”
“…….”
“앞으로 제 앞에서 플랜 B 얘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만들 돌아가세요.”
준철의 말이 끝나자 사장들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거 괜한 얘기를 꺼내서…….”
“저희도 사정이 워낙 다급하여…….”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여간 틈을 줘선 안 되는 놈들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호구 잡힌 게 마음이 쓰였는데, 동정심이 싹 달아났다.
‘오히려 좋아.’
덕분에 더 냉정하게 사건을 판단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