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뻔뻔한 놈, 뻣뻣한 놈 (1)
『내 인생에서 가장 지루한 한국 여행이 되겠군.』
입국 수속을 마친 마르숑 사장의 첫 마디였다.
박병수 변호사는 그의 캐리어를 건네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지루하진 않을 겁니다. 박진감이 너무 넘쳐서 문제겠지.』
『오호? 미스터 팍. 금세 불어 실력이 늘었군.』
『바이어가 프랑스인인데 영어만 쓸 수 있나요. 이젠 제법 대화도 되실 겁니다. 하하.』
“왜 ATT 한국 지사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는 거지. 그 치들한텐 내가 상산데 봉쥬르밖에 알아들을 줄을 몰라.”
“저야 원래 불어 전공이라서 쉽게 배운 감도 있죠.”
“아니, 이건 성의의 문제야. 그자들은 자기들에게 월급 주는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고.”
한국 직원들이 정말 불어를 못해서 화가 났겠나.
고작 이 문제도 해결 못 하고 사람 불러 대니 역정이 뻗친 것이다.
“이런, 내가 또 괜한 사람한테 분풀이를 했군.”
“괜찮습니다. 일단 타시죠.”
검은색 세단에 오른 두 사람은 인천항을 경유해 서울로 향했다.
드넓은 인천 바다에는 중공업 선박들이 가득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중 한 척이 마르숑 사장의 시선을 붙잡았다.
“미스터 팍. 저기 저 배가 보이시오?”
“네. 대웅조선 배로군요.”
“쟝 끌리에 수석이 직접 엔지니어링한 배야. 2세대 저장 탱크 기술을 첫 시공한 LNG선이기도 하지.”
“아, ATT랑 인연이 깊은 배였군요.”
마르숑 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조선 업계는 세계 시장에서 명함도 못 내밀던 기업이었다. 뭐 누가 알았겠나. 출발이 40년이나 늦은 한국이 세계 LNG 시장을 독식할 줄.
“지금 보니 인천 바다에는 ATT랑 인연 없는 배가 없구먼.”
“세계 어느 바다를 가든 비슷할 겁니다. ATT가 저장 탱크 시장의 95%를 독점하고 있으니.”
“나는 그 점이 더 안타깝소. 우리가 클 수 있었던 건 한국 조선업계의 힘이었고, 그들이 클 수 있었던 건 우리의 탱크 기술 덕분이었는데.”
프랑스인 특유의 감성적인 말투였지만, 얼굴은 딱히 감상에 젖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는 눈도 못 맞추던 놈들이, 이젠 체급 커졌다 이거냐?
마르숑은 혀를 끌끌 차더니 고개를 돌렸다.
“얘기는 어디까지 진행된 거요?”
“공정위에서 소명 요구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안을 깊게 조사할 모양입니다.”
“주동자가 누구지?”
“대웅조선이 앞장을 섰지만, 국내 빅5 중공 업체가 전부 다 고발을 진행했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군.”
본심은 곧 말에서 드러났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됐소?”
“내일까지 우리가 답변을 해야 합니다. 저장 탱크를 팔 때, 왜 엔지니어링 서비스가 꼭 필요했는지요.”
“미스터 팍. 법조인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될 것 같소? 정말 냉정하게.”
“해 볼 만합니다. 다만 본사에서도 다각적으로 검토를 고려해 주십쇼.”
어지간해서 항상 자신 있다 말하는 변호사다. 그가 말한 다각적인 검토는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빼는 방안도 고려해 보란 것이다.
불편한 얼굴로 본사에 도착하자 대역 죄인들이 회의실 안에서 기립해 있었다.
마르숑은 인사도 들은 체 만 체하며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마르숑 사장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지.”
“…….”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 주시오, 부디.”
대표로 보이는 사내가 주섬주섬 서류를 건네자 마르숑은 손등을 쳐 버렸다.
“비행기에서 내내 읽은 서류를 또 읽으라고?”
“아, 아닙니다.”
“알 건 다 아니 핵심적인 보고만 해 보시오.”
박병수 변호사를 제외한 모든 참석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풍기는 분위기를 봐선 해고 통지서를 날리러 온 사람 같았다.
“예. 일단 공정위에 1차 소명은 했습니다. 저장 탱크는 기술 특성상 판매와 엔지니어링을 분리할 수 없다고……. 하지만 한국 조선 업계가 직접 설계 능력을 선보이며 저희 측 주장이
억지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내 조선 업계의 요구는 하나였다.
냉장고는 살 테니, 제발 설치는 우리가 하게 해 달라.
하지만 그러면 이 알짜배기 특허를 파는 이유가 없다. 비싼 냉장고를 팔았으니, 당연히 이에 수반하는 시공 작업도 사야 한다.
“공정위는 당연히 그쪽 말을 더 믿나 보지? 그러니까 나까지 여기에 왔겠고.”
“아무래도 저희 측 요구가 과한 부분이 있으니…….”
“과해?”
“사실 탱크를 판매할 때 엔지니어링 서비스가 꼭 필수는 아니잖습니까. 한국 업계도 변리사와 국제 변호사까지 대동해 자신들의 논지를 보강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죽을 맛이었다.
사익을 위해 빈약한 논리를 계속 방어해야 하는데, 당연히 빈틈투성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부대사업 포기하는 게 어떻습니다. 엔지니어링 서비스 포기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한테 남는 장사입니다. 이들과 진정성 있는 협상을 해 보는 게…….”
탁!
마르숑 사장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탁자를 내리찍었다.
『ATT가 발전하려면 이 얼간이들부터 정리해야겠구만! 돈을 벌어오기는커녕, 벌 수 있는 방법도 포기하자고?』
“…….”
『그것보다 더한 일을 시켜도 해내야 하는 게 너희들 임무야. 그딴 소리 듣자고 내가 파리에서 온 줄 알아!』
불어가 튀어나오자 국내 경영진은 사색이 됐다. 이해는 못 해도 대강 알아들을 순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박병수 변호사가 나섰다.
『사장님. 고정하십쇼. 법리적으로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마르숑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방법?』
『진부하지만 가장 먹히는 방법이 있죠. 그럼 우리 특허 쓰지 말아라.』
『그게 되겠나?』
『법률적으로 우리가 강매를 해 왔던 건 아니니까요. ATT가 가진 특허 기술이 그만큼이나 독보적이란 걸 어필해 보겠습니다.』
독보적인 특허의 매력은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꼬우면 다른 특허 써. 그 어떠한 법률도 이 시장 논리를 이길 순 없다.
게다가 ATT는 외국계 기업. 한국 공정위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가장 훌륭한 방패를 가졌다.
마르숑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영어로 말했다.
“공정위의 2차 소명 요구가 내일까지인가?”
“아, 예. 그렇습니다.”
“우리 ATT사가 소명할 말은 한 가지요. ATT사는 프랑스 기업이지 한국 기업이 아니다.”
“……예?”
“한국 공정위에게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시오.”
***
“처음 뵙겠습니다. 공정위 이준철 팀장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ATT 법률 대리 박병수 변호사라 하오.”
약속 장소로 나가 보니 중년인 사내가 환히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이들은 공정위의 소명 요구에 ATT는 프랑스 기업이라 대답해 버렸고, 오늘처럼 중요한 자리엔 웬 법률 대리인을
내보내 버렸다.
“마르숑 사장님께서 나올 줄 알았습니다만,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언어적 문제 때문에 제가 대신 나오게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랑스 기업’이잖아요.”
인사만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검은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국적 방패로 숨으시겠다?
“프랑스든 미국이든 한국에 법인 냈으면 한국 기업이죠. 근데 ATT 한국 지사는 직원들도 다 불어밖에 못 합니까?”
“제가 법률 대리라 말씀 드렸습니다만?”
“법률 대리 필요 없으니 실무자 불러 주십쇼. 우린 왜 ATT의 저장 탱크를 쓰려면 반드시 엔지니어링 서비스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민감한 얘기를 직설적으로 꺼내자 놈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 나를 책임 있는 사람이라 생각 안 하신다면 유감입니다. 근데 공정위도 본분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본분요?”
“힘쎈 놈이 약한 친구 괴롭히면 당연히 선생이 나서야겠죠. 힘없는 하청이 원청한테 당한 일이었다면 공정위 조사 백번 이해합니다. 근데 이건 힘 쎈 두 놈이 서로 의견 안 맞아서
투닥거리는 문제요. 왜 이런 문제까지 선생이 관여하려 하시오?”
“잘못 알고 계시네요. 힘이 세든, 약하든 누구도 서로를 괴롭혀선 안 된다, 이게 우리 학교의 규칙입니다. 아무리 대기업을 상대로 한 갑질이었다 해도, 부당한 건 부당한 거요.”
예상치 못한 젊은 놈의 지적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저희야말로 이 문제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해서 두 업계가 잘 합의해 보라고 몇 번이나 중재를 해 드렸는데, 그건 왜 거부하셨습니까?”
“말이 되는 중재를 해야 응하지. 저장 탱크만 팔고, 엔지니어링은 국내 업체가 하게 해라. 이게 어떻게 중재요. 우리한텐 제재지.”
“그럼 납득이 될 만한 이유를 대 보세요. 왜 저장 탱크를 팔 때 꼭 시공 작업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박병수는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특허 유출의 우려, 국내 업체의 불완전한 시공…… 갖가지 이유를 대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함께 팔았지만, 사실 이는 핑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목소리는 더 커야 하는 법.
“그게 불만이면 ATT 탱크 이용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요. 국산화해서 단가 아끼면 되겠네.”
치사한 대답에 할 말을 잃는 준철이었다.
“우리가 뭐 국내 업체한테 이걸 강매라도 했소?”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뭐가 아니오. 근원적으로 따지면 국내 업체들엔 이 기술력이 없다는 게 문제요. 그럼 ATT라고 이게 하늘에서 뚝 떨어졌겠습니까? 시간과 노력, 그리고 투자. ATT는 다년간 이
분야만 연구했고, 이는 거기에 대한 로열티입니다.”
“…….”
“정당하게 얻은 특허를 국가에서 이렇게 규제하면 세상에 누가 기술을 개발하고, 투자에 돈을 씁니까?”
시장질서를 존중하라.
대기업들의 궁지에 몰리면 전가의 보도처럼 내뱉는 말이다. 놈의 말마따나 딱히 강매를 해 댄 것도 아니니,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저희도 최대한 특허를 존중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준철은 한발 물러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합의하시죠.”
“합의?”
“지금까지 엔지니어링 시공을 끼워 판 것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저장 탱크만 넘겨주세요.”
“그게 어딜 봐서 합의요? 우리한텐 제재지.”
“저희가 진짜 제재를 한다면 겨우 이 수준에서 안 끝날 겁니다.”
가시 돋친 말에 박병수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그럼 한번 해 보시구려.”
“…….”
“단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애들 싸움이 곧 부모 싸움 됩니다. 만약 한국 공정위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우릴 제재한다면, 자국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프랑스는 그냥 프랑스가
아니라 EU 회원국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할 말을 끝낸 박 변호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그가 떠나고 나서도 준철은 한참이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무시가 아니라 모욕이다. 외국계 기업이란 이점을 이렇게 확실하게 다 써먹을 줄이야.
공정위에서 무슨 제재가 떨어지든 끝까지 싸우겠단 의지를 확인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