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뻔뻔한 놈, 뻣뻣한 놈 (2)
“너무 늦게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다름 아니라 이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오해가 쌓이다 보니 이젠 기업들끼리 감정싸움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산업부 에너지산업 실장은 뜬금없이 찾아온 마르숑이 마땅치 않았다.
갖은 겸손을 다 떨어 대지만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거만함이 가득하다.
“사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ATT와 한국 조선 업계는 서로의 강점을 결합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경쟁 업체도 아니고 공생 업체인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걸 자초한 건 네놈들 아니냐?
산업부는 두 업계를 중재하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ATT는 그 중재안을 번번이 걷어차 댔다. 아니, 아예 대화 테이블에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앉아 있는 놈은 그 지시를 최종적으로 내린 놈일 텐데, 이게 뭐 하는 꼴인지 싶었다.
“마르숑 사장님. 영어는 참 잘하시는군요.”
“예?”
“저희가 수차례 ATT의 실무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 했는데, 언어적 문제 때문에 거절당했거든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계신 줄 알았다면 진작 만나 뵀을 텐데 말입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도 그룹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상의할 일이 많았습니다.”
슬쩍 한번 긁어 봤는데, 공손한 대답이 돌아온다.
이상하다. 함부로 참는 놈들이 아닌데…… 정말로 원만한 합의를 하기 위해 온 걸까?
“먼저 이 서류를 읽어 봐 주십쇼.”
하지만 그런 기대는 그들이 내민 서류에서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이게…… 뭡니까?”
“중재를 해 주십쇼. 현재 한국 공정위가 저희에게 소명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국내 조선 업계랑 중재하겠다는 게 아니라 공정위랑 하겠다는 거요?”
“네.”
이 육시럴 놈들이!
“그런 건 중재가 아니라 수사 무마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하겠소? 각계 입장 고려해서 중재안 만들었는데, 대화 테이블에도 안 나왔던 건 ATT 아니오.”
“그때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생각이 갑자기 뒤바뀌셨습니까?”
“네. 심판을 매수해 버리니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더군요.”
“뭐, 뭐요? 심판을 매수해? 지금 한국 공정위가 조선 업계에 매수당했다 말하는 거요?”
“정황을 보면 그리 생각되는데, 표현이 격했다면 사과드리죠. 하지만 실장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이 문제가 불·한 통상마찰로 비화되는 걸 산업부도 원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통상마찰이란 말에 방금 당한 모욕이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산업통상부가 가장 무서워하는 단어 아닌가.
“아시다시피 유럽은 에너지산업에 민감합니다. 2차대전의 숙적이었던 독일과 러시아를 단숨에 화해시켰으니, 안보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누가 파이프라인을 건드렸소? 천연가스 저장 탱크 팔 때 시공 서비스 함께 팔지 마시오. 국내 업체들 요구는 이게 전붑니다.”
“로열티가 곧 파이프라인입니다. 우리 로열티 안에는 저장 탱크랑 엔지니어링 서비스가 함께 붙어 있어요.”
기가 차는 대답이었다.
“한국에선 그런 무모한 주장을 특허 갑질, 거래상 지위 남용이라 부릅니다.”
“한국에선 어떨지 몰라도 경제재정부(프랑스 산업통상부)에선 저희 편을 들어 주겠죠.”
“자꾸 통상 얘기 꺼내지 마시오. 이건 그 문제가 아닙니다.”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의 로열티를 건드는 건 곧 에너지산업에 대한 도전입니다. 프랑스는 단순한 프랑스가 아니라 EU 회원국임을 잊지 마십쇼.”
끼워 팔기 안 했습니다, 가 아니라 했는데 어쩌라고다.
무례한 태도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문제가 통상마찰로 번질 수도 있다는 말…… 그건 절반 정도 사실이었다.
사실 사례가 있었다. 국내 조선 업계 1위와 6위가 약 3년 동안 합병을 논의하여 최종적으로 합병에 들어간 적 있었다.
하지만 다국적기업은 각국에서 기업결합 심사(합병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미국과 중국도 찬성한 합병 심사를 유럽에서 거부해 버렸다.
EU가 한국의 LNG 시장 독점을 우려하며 거부했던 탓이다.
이는 국내에서 이미 기정사실화됐던 합병이 무산된 최초의 사례로, 천연가스에 대한 유럽의 강박증을 보여 줬다.
“…….”
그랬기에 통상마찰이란 단어가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다.
실장이 주춤한 기색을 보이자 마르숑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한국과 프랑스가 적성국도 아니고, 또 우리랑 한국 조선 업계가 경쟁 기업인 것도 아닙니다.”
“…….”
“한쪽의 욕심 때문에 지금도 일이 너무 틀어지고 있습니다. 기업 간의 싸움이 어떻게 국가 간의 통상마찰로 이어질 수 있는지 원…… 대신 저희 쪽에서도 섭섭지 않을 만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르숑 사장은 팽팽한 긴장감을 지우려는 듯 웃으며 한 자료를 건넸다.
“저희가 기술 이전을 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술 이전?”
“저장 탱크 ST200 기술을 모두 한국 기업에 전수하겠습니다. 조건 없이.”
“이보세요…… ST200이면 2세대 저장 탱크 아니요. 지금 3세대 저장 탱크가 상용화된 지 언젠데.”
“한국에선 아직 그 2세대 기술도 못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국산화 모델 KC탱크는 가스공사와 산업자원부가 혈세 400억을 투입해 5년 동안 진행한 초특급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상용화는커녕 기술 격차가 얼마나 큰지 재확인한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기술 이전 대가로 이 사안을 매듭짓는 게.”
“아무리 국산화 모델이 실패했다지만 2세대 모델과의 기술 격차는 그리 크지 않소. 이걸 국내 기업들이 환영하겠습니까.”
“그러니 실장님께 중재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2세대 모델을 시작으로 저희는 더욱 많은 기술을 한국 기업에 공유하겠습니다. 한국에는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죠.
모쪼록 이번 사태가 양국의 우호를 더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놈.
그게 기술 이전의 끝이지 시작이겠는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적당한 기술 하나 던져 주는 것이다.
“…….”
국내 조선 업계가 이 제안에 응할까?
공정위가 이걸 납득할 수 있을까?
국내 업계도 2세대까진 거의 다 따라잡았는데, 있으나 마나 한 기술 이전을 좋아할 리 없다. 놈들도 KC탱크를 보고 이 정도는 아는구나 싶어서 기술 풀어 버리는 거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통상마찰은 피해야 한다.
배를 만드는 선박 업체와 그 안에 있는 저장 탱크를 만드는 업체가 서로 거래를 끊으면 당연히 피해는 선박 업체가 더 본다.
“……일단 전달은 해 보겠소.”
***
“말했잖아. 이건 산업부에서 이미 여러 차례 합의를 시도했었다고. 보기 좋게 망신만 당했지?”
“송구스럽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화해시켜 보려 했는데.”
준철에게 굴욕적인 얘기를 들었을 때 오 과장은 자기 일처럼 기분 나빠 했다.
기고만장도 이런 기고만장이 없다.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왜 필수로 팔았느냐 물었는데, 자기들은 프랑스 기업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됐다. 잊자. 우리도 그 정도 노력해 봤으면 된 거야.”
안 될 걸 빤히 알지만 어쩌겠나.
이런 노력을 해 봤다는 게 중요하다. 과징금이나 시정명령을 내릴 때 근거로 쓸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
“그나저나 국내 조선 업계도 꿍꿍이가 있었다?”
“네. 제게 은근슬쩍 안전성 기준을 얘기하더군요. 국내 기준치가 너무 높아 국부(國富) 손실이 크다고.”
“흐허허. 국부라. 누가 보면 사회에 환원할 돈인 줄 알겠군.”
“네. 아주 뻔뻔스럽더라고요.”
“그래서 뭐라 그랬어?”
“기준치 낮출 생각 말고 기술력 올릴 생각을 하라 했습니다. 아마 다신 얘긴 안 꺼낼 겁니다.”
씨알도 안 먹혔겠지. 욕이나 안 먹었으면 다행일 거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쯧쯧. 한 놈은 너무 뻔뻔해서 문제고, 다른 놈은 너무 뻣뻣해서 문제네.”
“네. 그 나물에 그 밥들입니다.”
“그래도 우열은 가려야지? 둘 중에 누가 더 크게 잘못한 놈이야?”
준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ATT사의 끼워팔기가 문제입니다.”
“결론을 다 내렸나?”
“네. 계약서를 봤는데 불공정한 조항도 다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끼워팔기는 해명도 못 들어 봤습니다.”
“흠…….”
“시정명령과 과징금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이걸 당연히 불복할 거란 거다.
통상마찰로 이어질 수 있으니 함부로 결정하기도 어렵고.
오 과장의 염려스러운 얼굴에 준철이 덧붙였다.
“근데 저 과장님. 이게 통상마찰로 비화되지 않을 것 같은 근거가 하나 있는데…….”
그렇게 말할 때. 갑자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국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뭐?”
“저장 탱크와 관련한 문제라고…… 지금 손님이 찾아오셨답니다.”
“손님? ATT야, 조선 업계야?”
“둘 다 아닙니다. 산업통상부 에너지산업 실장님이 오셨다네요.”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은 눈만 꿈뻑거렸다.
그 사람이 왜 찾아왔지?
“이 팀장. 통상 얘긴 나중에 마저 듣자. 일단 가보자고.”
“네.”
***
“인사드리게. 산업부 에너지산업실 심연호 실장님이야.”
“아, 예.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여기가 이번 사건 실무진입니다.”
“반갑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데,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두운 그의 얼굴이 답답한 소식을 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은 가슴이 답답한 얘기가 아니라,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분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통상마찰로 삼아 버리겠다?”
“네. 그쪽은 이미 제스처를 다 취했나 보더군요. 놈들이 다녀간 바로 다음 날 경제재정부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공문 내용이 뭐였습니까?”
“원만히 합의되길 바란다 했지만 사실상 당국은 서로 손을 떼자는 말이었습니다.”
세 사람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청와대에서 이런 오더가 내려왔어도 기분이 나빴을 거다. 근데 상대국 산업통상부에서 이런 지시성 공문이 내려오다니.
“실장님. 근데 이건 꼭 그렇게 볼 만한 게 아니잖습니까. 무역 분쟁과는 별개로 저희는 이 문제를 갑질 신고로 접수해 있어요.”
“통상마찰이란 게 꼭 그런 직접적인 이유 때문에 벌어지지 않습니다. 특히나 유럽은 에너지 사업과 관련해선 병적일 정도로 집착이 심해요.”
“그럼 국내법에 맞춰 건전한 거래를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ATT는 시공 작업까지가 로열티라 주장하는군요. 원체 독보적인 기술이니 이건 싸워 봐야 승산 없을 것 같습니다.”
심 실장은 곤란한 얼굴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담한 말씀만 드려 죄송합니다.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모쪼록 잘 판단해 주십쇼.”
답답한 회의가 끝나고 나자 김태석 국장이 의자에 몸을 뉘었다.
좀체 표정 변화 없던 그가 떫은 감 씹은 얼굴로 변했다.
찌푸린 미간이 모든 걸 말해 준다. 아쉽지만 포기해야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