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5
15화
한경모비스 (1)
“신석준이가 완전 넋이 나갔다?”
“예. 취조실 한번 들어갔다 오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나왔습니다.”
“대체 뭔 소리를 했기에 그래?”
“모르겠습니다. 녹화 테이프 전부 끄고 이준철 팀장 혼자 들어갔습니다.”
“검사랑 같이 들어간 게 아니라 이 팀장이 독대를 했어?”
오 과장은 김기남 반장의 보고가 믿기지 않았다.
풋내기 사무관이 산전수전 다 겪은 대기업 임원을 혼쭐내는 게 가능한가?
“김 반장.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과장이 아니라 이것도 축소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솔직히 요즘엔 저희도 이 팀장이 낯설어요. 노동부 가서 작업 중지 받아 내고, 대성중공업은 다급해지니까 우리 행정처벌에 완전히
승복해 버리고… 대체 이런 구상을 누가 생각해 냈겠습니까.”
김 반장이 느낀 준철은 풋내기 사무관이 아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기업 임원을 손바닥 안에 두고 있는 놈이다.
“그리고 신석준이 계속 자수 안 하니까, 최 회장 직접 소환하자고 제안한 것도 이 팀장입니다.”
“검사가 아니라 이 팀장이라고?”
“예. 검사님께 직접 들은 얘기예요. 덕분에 쉬웠죠. 최 회장을 바로 소환해 버리니까 신석준이도 완전히 백기 들었습니다.”
“허, 참.”
“이런 말 뭣하지만, 이준철 팀장, 큰 사고 당한 이후 정말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오 과장은 기가 차서 웃음이 났다.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는 김 반장의 말이 전혀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당장에 내린 행정처벌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부당 행위, 과징금 150억.]
[상습적인 산업재해 은폐 – 하청사 관리 감독 태만, 공공기관 입찰 제한 1년.]
두 가지 모두 최고 수위의 징계이며, 기업들은 보통 이럴 때 행정소송을 건다.
하지만 그룹 오너가 직전 승복 선언을 하지 않았나? 젊은 놈에게서 이런 노련함은 어디서 보이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딴사람이라…… 하하.”
오 과장은 종합 보고서로 올라온 모든 서류에 사인을 넣었다.
“덕분에 난 손 안 대고 코 풀었네. 사인만 하면 끝이니까.”
“별말씀을요. 과장님이 수사 재개 허락해 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 말해 준다면 고맙고. 지금 이 팀장 어디 있어?”
“검찰에 있습니다. 하청 근로자 중에 다른 피해자도 많아 이를 종합하려면 시일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오 과장은 서류를 돌려주며 경고도 잊지 않았다.
“돕는 건 좋은데 어디까지나 공정위 역할은 갑질 적발이야. 피해자 구제는 검찰과 그쪽 변호사 일이지.”
“물론입니다. 이 팀장도 오늘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나머진 전문 기관에 위임한다 말했어요.”
“좋아. 이런 말 늦었지만 1팀 전원 다 고생했어. 운영지원과에 카드 맡겨 놨다. N차까지 마음대로 긁어.”
오 과장이 호기롭게 말했지만 김기남 반장이 난처한 얼굴이 됐다.
“과장님. 회식은 다음에 적당한 날 잡아서 하겠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팀장이 내켜 하지 않더군요.”
“아니, 사건이 끝났는데 기분이 안 좋을 건 또 뭐야?”
“잘 모르겠는데, 뭔가 찝찝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밤샘은 기본에 주말까지 반납하며 수사를 끝냈는데, 젊은 팀장 기분이 좋지 않다? 초임 때는 수사를 무사히 끝낸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는 시기다.
그 연유가 궁금했지만 오 과장은 더 묻지 않았다.
“그래. 뭐 일하다 보면 인간적으로 찝찝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겠지.”
“예. 사고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도 힘들 겁니다.”
“그럼 밀린 잠이라도 보충해 둬. 두어 달간 매일 출근하느라 힘들었지? 다음 주 수요일까지 휴가 처리할 테니까 좀 쉬어.”
“아이고…… 3일씩이나.”
“언론에 떠들썩하게 나온 사건 다뤘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기남 반장이 들뜬 목소리를 남기며 나가자 오 과장이 웃었다.
‘젊은 놈이 꽤 강단 있구먼. 그렇다고 별로 자만하지도 않고.’
수사를 끝낸 후련함보다 인간적으로 느끼는 찝찝함.
이건 초임 사무관들만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다. 오 과장은 준철의 업무적 능력보다 이런 인간적 감정에 더 큰 기특함을 느꼈다.
물론 당사자가 어떤 부분에서 찝찝함을 느끼는지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지만.
***
신석준의 자백과 함께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준철은 찝찝한 감정을 다 떨쳐 낼 수 없었다.
‘당신이 뭐가 억울해? 당한 피해자들보다 억울해?’
무아지경 쏟아 냈던 말들.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놈에게 한 소리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한 소리에 가까웠다.
한명건설에 있을 때도 사고가 다반사였다.
트럭이 사람을 치어 인부가 사고가 난 적도 있었고.
시멘트 차 오작동으로 인부들이 시멘트를 뒤집어쓴 적도 있었다.
위에서 철근이 떨어져 인부 다섯이 큰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재수 없게쓰리. 이거 현장 관리하던 하청들 일감 끊어. 그따위 거 하나 제대로 감독 못 해서.
그때의 김성균은 신석준과 다를 바 없었다.
현장에서 사고가 터지면 하청이 못한 일이고, 재수가 없어 걸릴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겠다.
현장에 안전 관리 요원이 있었더라면, 차체 결함을 미리 파악했더라면, 안전 장비를 보강했더라면 인명 피해도 없었을 것이다.
“나나 신석준이나…….”
그땐 마냥 재수가 없어 걸릴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보니 정말 운이 좋았던 일이다.
사고로 사람이 안 죽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때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심 사장의 극단적인 선택도 막을 수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던 준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이제 남은 건 미래의 사고뿐이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억울한 사건 하나 끝냈으니.”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간 하늘을 뜻도 알게 될 것이다.
준철은 지금 느낀 이 미안한 감정을 평생 잊지 않기로 했다.
***
준철이 복잡한 고민들을 떨쳐 내고 있을 때, 오 과장은 밀린 업무에 쉴 틈이 없었다.
종합감시국은 공정위의 토탈업무팀으로 불리는 곳이다.
카르텔조사국, 소비자조사국, 기업정책국 등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모든 서류를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국민신문고와 공정위 공익제보함에 올라온 투서까지 검토해야 했다.
“뭐야, 이건.”
오 과장은 태산처럼 쌓여 있던 서류 중 하나에 눈이 갔다.
“심사관에서 올렸어?”
심사관은 공정위의 검찰 역할을 하는 곳으로, 보통 여기는 기업과 재판을 앞두고 있을 때 도움을 요청한다. 근데 재판을 앞두고 있는 부처가 별것 아닌 일을 올렸겠는가?
이쪽과 엮이면 무조건 머리 골치 썩는다.
“이걸 왜 우리한테 넘겨. 그냥 검찰에 넘겨 버리지.”
오 과장은 제발 종합감시국이 도와줄 수 없는 일이기를 바라며 서류를 들었다.
하지만 간절하게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서 방해하는 법.
해당 내용은 절대 맡기 싫지만, 종합감시국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었다.
한동안 볼펜만 굴리던 오 과장은 인터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했다.
“김 실장. 심사관에서 요청한 이 서류 뭐야?”
-아, 한경모비스 사건이요? 대리점 갑질입니다. 본사에서 점주들에게 자사 제품 강매시켰다고…
“아니, 내 말은 이거 한경 쪽이랑 좋게 합의되지 않았어?”
-그게…… 그쪽에서 동의의결안(시정안)을 가져왔는데, 심사관 측에서 거부했습니다.
“아니, 왜?”
-관련자 징계도 없고, 내놓은 시정안 자체도 시답잖아서요. 아무래도 이거 법원까지 갈 것 같습니다.
동의의결.
법 위반 혐의가 있지만 위법성을 따지지 않는 대신 기업 스스로 시정안을 제시하는 제도다. 달리 말해 기업이 동의의결안을 가져왔다는 건 잘못을 인정했다는 거다.
하지만 심사관에서 이를 거부해 버렸다.
대체 얼마나 시답지 않은 시정안을 가져왔기에.
-안 그래도 황 과장님께서 조속한 협조 부탁했습니다. 미팅 날짜 잡아 볼까요?
“됐어. 내가 직접 연락하지.”
그리 말하며 오 과장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 과장도 한경모비스 사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공정위에서 벌써 5년 넘게 수사하고 있었으니, 모르면 간첩이었다.
전형적인 대리점 갑질이다.
국내 1위 자동차 정비 업체 한경이 각 대리점에게 자사 부품을 강매한 것이다.
불필요한 부품을 끼워 팔고, 경쟁 업체의 부품을 받지 못하게끔 ‘밀어넣기’한 흔적도 잡았다. 근데 아직도 수사가 지지부진.
‘이게 뭔 영구 미제 사건이야?’
그가 머리를 짚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들어온 중년 남성은 텁텁한 웃음을 지으며 오 과장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오 과장.”
“똥줄 타는 거 다 아는데 넉살 부리긴.”
“그러게. 공사가 이리 다망해서야 원.”
“들을 얘긴 들었어. 거기서 동의의결안(시정안)까지 가져왔다며? 재판까지 가면 서로 피곤해. 심사관 측에서도 그냥 수용하는 게 낫지 않아?”
“그러지 말고 차라도 한 잔 줘. 그렇게 단편적으로 얘기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니까.”
앉아서 말해야 할 정도면 사정이 복잡하단 얘기다.
오 과장은 자리를 안내하고, 침통한 심정으로 커피를 탔다.
“오 과장. 깡패 새끼가 지 잘못은 인정하는데, 앞으로 안 그러겠다. 이러면 납득이 돼?”
“…….”
“약한 사람들 상대로 자릿세 뜯고, 장사 못 하게 방해했으면 당연히 그놈 처벌해야지?”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한경 놈들이 지금 그래. 대리점한테 자사 부품 끼워 팔고, 타사 제품 못 받게 밀어넣기 다 했는데, 처벌은 받기 싫대. 앞으로만 잘하겠대.”
오 과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정안 핵심 내용이 뭔데?”
“말했잖나.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가 ‘다’라고. 각 대리점들한테 말도 안 되는 매출 목표치 설정하고 물건 강매했는데, 앞으론 안 그러겠대. 관련자 징계? 지금까지 피해에 대한
보상안? 없어. 그냥 앞으론 안 그러겠다가 끝이야.”
오 과장은 눈치를 살피며 서류를 펴 보였다.
“피해 보상은 그래도 하지 않았어? 얼추 보니까 상생기금 300억 마련했다고 들었는데.”
“상생기금이 아니라 피해 보상을 해야지. 자네도 알지 않나. 그 상생기금 나중에 가 딴 데 써 버리면 그만인 거.”
“…….”
“제일 중요한 건 관련자 징계야. 근데 아무도 징계를 안 하더군.”
“……그렇게 확실하면 그냥 재판으로 가. 자네 얘기 들어 보면 재판도 충분할 것 같은데.”
그리 묻자 그가 처음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자니 걸리는 게 있어.”
“뭔데?”
“피해자들 중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아. 익명투표를 실시하면 한경에게 갑질을 당했다가 압도적이거든. 한데 기명투표하면 아무도 나서지 않아.”
“옌장할. 갑질은 친고죄야. 그럼 말짱 도루묵 아니야?”
“그러니 한경에서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의결안 가져온 거겠지.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도와줘. 우리 이거 5년을 끌었는데, 이따위 시정안 인정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