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오히려 좋아 (1)
한참 만에 입을 뗀 김 국장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였다.
“유럽이 아무리 에너지산업에 미쳤다지만, 우리한테 공문을 보내는 건 무례한 거 아닌가.”
산업부의 입장을 납득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공정위 또한 이 문제가 통상마찰로 비화되길 원하지 않는다.
“오 과장. 지금 어디까지 진행됐나?”
“ATT에 소명 요구를 보내 봤는데…… 망신살 톡톡히 뻗쳤습니다. 저장 탱크랑 시공 서비스가 왜 꼭 한 세트냐 물으니, 자신들은 프랑스 기업이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돌아가는 상항을 들었을 땐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뭉개졌다.
로마에서 로마법 따라 달라는 게 무리한 요구인가? 누가 보면 치외법권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엉뚱한 대답을 지껄이는 거 보니, 혐의 자체는 부정 못 하나 봐?”
“변명할 거리가 없겠죠. 저희도 각계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 봤는데, 끼워 팔기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죄는 명확해졌지만 이젠 현실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때다.
“ATT에서 기술이전 해 주겠다고 했지? 국내 업체들이 여기에 합의해 줄까?”
“2세대 저장 탱크 기술은 국내 업체도 많이 따라온 줄로 압니다만…… 최대한 설득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국내 업체에 대한 설득, 이건 사실상 합의 종용이다. 수년 동안 돈 뺏기고 괴롭힘당한 학생한테 사탕 하나 받고 화해하란 셈이다. 무능도 이런 무능이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 공정위의 영향력은 국내 업체에 한해서만 저승사자다. 그나마 놈들에게 기술이전이라도 받아 낸 게 면을 살릴 수 있는 기회다.
“그냥 더 큰 논란을 방지하기 위한 일보 후퇴라 생각하자. 국내 업체들한테 적당히 잘 설명해 봐.”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정리될 때.
“국장님…… 이러면 오히려 좋은데요.”
준철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뭐?”
“안 그래도 우리만 나서서 심판이 매수됐네, 편파 조사네 말이 많았는데 프랑스 당국에서 나서 주면 고맙죠.”
“그게 어떻게 고마운 문제야.”
“자기들 입으로 프랑스 기업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럼 프랑스 당국에서 ATT한테 소명 듣고 저희한테 전달해 주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논리에 자신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이거 대기업들이 하청 쥐어짤 때 단골로 나오는 말입니다. 저희도 이 변명에 숨어 잘못한 놈 처벌 못 하면, 똑같은 놈입니다.”
명백히 한쪽이 잘못한 일이다. 공정위는 이런 문제 단속하라 있는 곳이고.
만약 지금 공정위가 원칙을 포기하고, 힘의 논리에 굴복하면 앞으로 대기업들 상대할 때 위신도 서지 않을 것이다.
“맞공문 보내시죠. 사실 유럽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해 절대 개입해선 안 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EU에서 국내 조선 업계의 합병 심사를 거절한 사례가 있더군요. 1년 전 대웅조선과 우중중공업 합병요. 그때 합병 무산시킨 명분이 바로 한국의 LNG 시장 독점 우려였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지금은 저장 탱크 시장을 독점한 ATT가 조선사에 갑질을 하지 않습니까? 이걸 변호한다면 자기모순입니다.”
독점을 우려해 합병을 거부한 놈들이, 독점의 횡포에 대해선 묵인한다? 이건 문자 그대로 자기모순이다. 원칙을 칼같이 지키는 EU도 잘못된 것이란 걸 알 거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에너지산업은 요물이다. 이념, 종교, 사상이 완전히 다른 미국과 사우디를 우방으로 만들기도 하며 2차대전의 숙적을 화해시키기도 한다.
어느 나라든 에너지산업에서 자국에 이익이 되는 문제라면, 원칙을 어기고 예외를 따른다.
“그게 말처럼 쉽진 않을 거다. 산업부가 우리한테 이렇게까지 요청한 건, 유럽 사정이 어떤지 빤히 알기 때문이야.”
프랑스 당국에서 건너온 공문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원칙보단 예외를 따르겠다는 노골적인 의사다.
“그래서 최대한 존중해 줬잖습니까. EU가 합병 거부했을 때, 한국에선 한마디도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쪽도 우리 당국을 존중해 줘야 합니다.”
딱히 존중이랄 것도 없다. 나쁜 거 바로잡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김태석 국장은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 과장…… 어떻게 생각해?”
넌지시 묻는 김 국장 목소리는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단 걸 보여 주었다.
“같은 생각입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여기서 발 빼면 공정위 위신이 너무 추락합니다.”
“…….”
“국장님. 명백한 특허갑질도 처벌 못 하면서 어떻게 다른 대기업들을 처벌하겠습니까.”
“…….”
“원칙만 생각해 주십쇼. 만약 같은 갑질이 국내 기업 간에 벌어졌다면 우린 아작 냈을 겁니다.”
김태석 국장은 서류를 쓱 들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는구만. 그만해라, 정신없다.”
그리 쏘아붙이더니 준철에게 서류를 건넸다.
“하자. 산업부한테는 내가 말해서 정식 공문을…… 아니다. 어차피 반대할 게 빤한데 직접 보내는 게 낫겠지. 재수 없으면 프랑스까지 건너가서 우리 사정 설명해야 할 수도 있다.”
“네. 통역만 붙여 주시면 제가 직접 가서 EU도 설득하겠습니다.”
웃기는 자신감이다. 일개 팀장, 부임 2년 차가 이렇게 쉽게 자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하지만 이놈은 인앱 결제 사태 때 미국 연방거래위원장까지 설득했던 놈이다.
“길게 끌어 좋을 것도 없는 문제 빨리 매듭짓자.”
“네.”
“이번 주 안으로 과징금 계산하고, 시정명령 가져와.”
***
계산기 뚜드려야 하는 문제는 꽤 오래 걸렸다.
ATT가 그간 끼워 팔기로 얻은 부당 이익금은 500억이지만, 이 중 얼마를 과징금으로 매길지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했다. 500억 전부를 과징금으로 매기면 되레 놈들에게 빌미를
주게 될 테니.
반대로 명확하게 보이는 갑질도 있었다.
ATT는 특허권의 유효성을 다툴 경우 일방적으로 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달아 놨는데, 이는 즉 명백한 갑질 조항이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이건 삭제시켜야겠네.’
빅5 조선사들이 왜 철천지원수인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렸는지 알 수 있었다.
‘불만 드러내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계약 철회해 버릴 수도 있다.’ 계약서에 이런 내용을 버젓이 박아 놓을 정도면 얼마나 갑질을 당해 왔다는 건가.
공정위는 먼저 시정명령을 내려 갑질 조항에 대해 삭제시키라고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의외로 ATT사는 침착한 분위기였다.
“미스터 팍. 이거 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네. 요식행위입니다. 공정위도 보는 눈이 많은데, 무턱대고 이 사건 덮을 수는 없죠.”
“겨우 체면 때문에?”
“우리한텐 체면치레처럼 보이지만, 공정위에겐 그게 위신입니다.”
“법조인으로서 이건 어떻게 생각하오? 난 사실 이 조항도 삭제하기 싫은데.”
“양보할 건 하는 게 좋습니다. 이 조항은 사실 법원에서 다퉈도 갑질로 판단될 겁니다.”
사실 굳이 계약서로 박아 놓을 이유가 없었다.
이게 있으나 없으나 조선사가 반발하면 저장 탱크 납품을 끊어 버릴 테니 말이다. 그냥 누가 갑이고, 을인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명문화한 조항이었다.
“근데 공정위가 정말 여기에서 그칠까?”
“정황상 그래 보입니다. 만약 공정위가 과징금까지 통보했더라면 처벌 의지가 있다 생각할 수 있으나, 이건 겨우 시정명령이죠.”
“그건 그렇지.”
“산업부에서도 아직 별말 없었습니다. 분명 저희 뜻 전달했을 테니, 얘기가 정리된 것 같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박병수 변호사도 찝찝함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시정명령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 이걸 토대로 과징금까지 매기기 시작한다면……?
“사장님. 프랑스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리 묻자 마르숑 사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호의적이진 않소. 사정사정해서 한국 산업부에 공문을 보내긴 했지만 원체 깊게 관여하고 싶은 눈치가 아니야.”
“쐐기를 한번 박아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무리일까요?”
“쐐기?”
“경쟁당국(EU공정위)에서도 이 문제에 나서 주면 한국 공정위의 전의가 더 크게 꺾일 겁니다.”
프랑스 재정부의 공문을 얻어 냈으니 이제는 EU다.
미 연방거래위원회 다음으로 파워가 쎈 EU 경쟁당국의 공문이라면 지금 있는 시정명령도 철회할 수 있으리라.
“이건 에너지자원 문제니 EU도 적극 발 벗고 나서 줄 겁니다.”
“그놈들은 안 돼. 원죄가 있어.”
“한국 조선사들의 합병 거부 말씀이십니까?”
“그래. 합병을 거부한 당사자들인데 어떻게 이 문제에 발 벗고 나서 주겠소. 자기들이 생각해도 웃기다 생각할 거야.”
“그래도 에너지자원 문제에 있어선 항상 예외가 있는 법인데…….”
“EU 경쟁당국이 한국 조선사 합병을 거부했다 해서 기업 편은 아니오.”
굳이 따지자면 EU 경쟁당국은 공정위와 가까운 놈들이지, 기업과 가까운 놈들이 아니다.
이번 사태에 한국 공정위의 편을 들어 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문제지.
마르숑은 한숨을 지었다.
“사실 이 문제 길게 가면 나도 장담 못 하오. 공문을 보내긴 했지만.”
프랑스 재정부도 바보는 아니다. 국익을 앞세웠지만 이게 사익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다만 에너지 관련한 문제는 안보적 의미라 몇 번 거들어 줬을 뿐. 이 문제를 가지고 진짜 통상마찰로 비화시키진 않을 거다.
“근데 그 얘기는 왜 자꾸 묻소. 미스터 팍은 안 된다고 하는 문제에 두 번 물을 사람이 아닌데.”
“사실…… 국내 업체들의 반발이 많이 크더군요. 저희가 약속한 기술이전을 다들 거부하고 있습니다.”
박병수는 법률 싸움만 하는 게 아니라 물밑에서 부지런히 합의를 시도하고 다녔다.
엔지니어링 서비스 가격 인하, 기술이전 등 여러 조건을 건네 봤지만 국내 조선 업계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다 거부하고 있다?”
“네. 사실 2세대 탱크 기술은 어느 정도 따라온 상태니까요.”
“근데 뭐가 걱정이오. 공정위의 반응 봐선 곧 끝낼 것 같다면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국 공정위가 조선 업계 등쌀에 휘말릴 수도 있는 상황요.”
마르숑은 뜸을 들였다.
“미스터 팍. 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만약 그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그냥 순순히 인정하는 게 어떨지.”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포기하란 말인가?”
“네. 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면 과징금을 맞고 고치느냐, 안 맞고 고치느냐가 될 겁니다.”
불편한 얘기였지만 마르숑은 슬쩍 웃음을 보였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하는 말이다.
“미스터 팍. 신중한 성격은 좋지만 우리 벌어지지도 않을 일을 가정해 우려를 키우지 맙시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그때 다급하게 노크 소리가 들리며 ATT 한국 대표가 들어왔다.
“사, 사장님. 공정위에서 과징금을 발표했습니다.”
“뭐?”
“130억…… 이게 공정위 최종 결정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