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꽤 공정한 놈 (1)
“생각보다 꽤 참을성 있는 놈이구먼. 그 소리를 다 참아 줬어?”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성질에 어떻게 참았대. 다른 건 몰라도 국내 업계랑 붙어먹었냐 소리는 책상 엎을 만한데.”
“그냥 웃음만 나왔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야말로 그런 의혹에서 가장 떳떳하지 않습니까.”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 국내 조선 업계를 초상집으로 만들었던 게 누군데.
ATT사야 과징금과 시정명령이 큰 처벌처럼 느껴지겠지만, 국내 업체 두 곳은 놈에게 생산 중지랑 작업 중지까지 당했다.
“국내 업체들도 웃겼을 겁니다. 자기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는데, 이놈들은 고작 회초리 한 대 맞았다고 앓는 소리를 해 대니.”
김태석 국장은 피식 웃었다.
지금 보니 오 과장이 업무 배당을 참 잘한 것 같다.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의 싸움이라 특혜 시비에 민감하다. 그런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놈은 공정위에서 이놈밖에
없겠지.
웃음 뒤엔 한숨도 나왔다.
행정명령 불복이야 익히 예상했다만 면전에 대고 이런 소리까지 해댈 줄이야. 무례한 소리를 서슴없이 지껄이는 걸 보니 아직 한국 공정위가 봉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기업 간의 합의도 불발됐겠다, 우리 행정명령도 불복했겠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네?”
“네. 소송전으로 갈 것 같습니다.”
“법원 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뭐 소명 기회를 여러 차례나 줬는데, 걷어찬 건 그놈들 아닙니까. 저희 쪽이 훨씬 우세하다 봅니다. 다만…….”
“국적이 걸린다.”
오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그 얘기를 꺼냈다.
“국장님. 이젠 저희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것 같습니다.”
“통상마찰?”
“네. 이놈들이 계속 기고만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어요. 또다시 프랑스 재정부 동원해서 저희를 압박할 모양입니다.”
그것 말곤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걸 꺾을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 않다.
과연 프랑스 재정부가 이 문제에 또 나설까. 관례적으로 한 번 공문을 보낸 정도로 끝낼 것 같긴 한데, 이건 또 모른다.
자국에서 안보 다음으로 중요시 생각하는 에너지산업 아닌가.
만약 ATT가 또다시 빽을 데려와 훼방을 놓으면 문제는 골치 아파진다. 통상마찰까진 몰라도 통상기싸움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혹시 우리가 과했던 부분은 없나?”
“과징금 말씀이십니까?”
“우리도 놈들에게 빌미를 줘선 안 돼. 혹시 ATT랑 협상하려고 일부러 과도하게 부과한 부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말해.”
“그것도 조선 업계가 입은 피해에 비하면 상당히 과소하게 매긴 겁니다. 이 돈은 10원 한 장 허투루 매기지 않았습니다.”
김태석 국장은 혀를 끌끌 찼다.
“상황 참 고약하게 됐구먼. 난 프랑스까지 보내고 싶지 않은데.”
“그건 프랑스 당국도 똑같은 심정일 겁니다. 다만 천연가스 관련 사업이라 안 나설 수도 없었겠죠.”
“그럼 그냥 우리 식대로 하는 건 어때. 소송 진행.”
“그것도 정석적인 방법이긴 합니다만…… 찝찝한 문제는 해결하고 가는 게 낫죠. 놈들은 법원 가서도 국적 방패로 숨을 겁니다. 저희 선에서 이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뒷말이 나올 겁니다.”
후환이 크다.
이건 법원의 결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다. 만약 법원이 외교적 사안을 고려해 다른 판결을 내린다면 공정위에겐 치명타다.
“만약 보내 주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일단 프랑스 재정부 설득해야죠. 이건 국익이 아니라 회사 간 특허 다툼일 뿐이란 걸 어필하겠습니다.”
“그쪽도 이미 알 얘긴 알 거야. 자존심 때문에 참전했지.”
“그럼 이 팀장 말대로 그 얘기 거론해야죠. EU경쟁당국에서 대웅조선 합병 거부했을 때, 저희는 아무런 이의 제기하지 않고 판단 존중했습니다. 그럼 그쪽도 저희 판단에 존중해
줘야죠.”
얼마간 고민하던 김 국장은 용단을 내렸다.
“좋아. 한번 해 보자. 나도 법원에서 우리 결정 뒤집는 건 못 보겠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면 더욱더.”
“네.”
“자리 만들어 주고 통역만 붙여 주면 되지?”
“네. 뭐 이 팀장은 끝판왕인 칸 위원장도 만나 봤는데, 알아서 우리 입장 잘 설명해 줄 겁니다. 저도 당연히 함께할 거고요.”
김 국장은 서류를 덮으며 오 과장에게 건넸다.
“산업통상부랑 얘기해서 날짜 곧 잡지.”
***
산업통상부에 얘기를 전하자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좋게 끝내려 했으나 결국엔 커지고 말았으니.
심 실장은 여러 이유를 들어 기업 간의 해결을 요청했으나, ATT의 무례한 언행에 대해 들었을 땐 마음을 완전히 단념했다.
담당자 면전에 대고 유착 관계 의심을 해 대다니…… 자국 공정위였더라도 놈들이 그렇게 했을까.
준철의 이력은 그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국내 조선 업계에 누구보다 잔인했던 담당자다. 그에게 사심이 없단 걸 확인한 산업부는 프랑스 재정부와 EU경쟁당국에 공문을 보내 면담
날짜를 잡아 주었다.
꽤나 촉박한 시간이었기에 준철과 오 과장은 보고서 번역 작업에 날밤을 지새웠다. 누워도 잠에 들 수 없었다. 국장님이 총력을 다해 마련해 준 기회인 만큼 부담감이 몸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스르륵 눈이 감겼는데, 다시 떠 보니 바로 파리에 도착해 있었다.
“이 팀장. 잠 많이 못 잤냐.”
“……예?”
“코 고는 소리가 비행기 엔진 소리보다 더 크더라. 혹시 나 들으라고 더 큰 게 곤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농담한 거 가지고 죄송은 무슨. 덕분에 기내식 두 그릇 먹어 봤다. 가자.”
헤밍웨이가 했던 말인가. 파리는 언제나 축제라고…….
무더위가 한풀 꺾이며 한산한 가을 날씨였지만 드골공항은 발 디딜 없이 붐볐다.
인파에 치이며 겨우 공항에서 벗어난 세 사람은 바로 호텔로 향했다.
“과장님, 면담이 언제입니까.”
“내일 5시. 프랑스 재정부 국장이랑, EU경쟁국장이랑 함께 만나기로 했다.”
오 과장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따로 뭐 준비할 건 없고?”
“네. 번역 자료만 있으면 됩니다. 저희가 했던 조사는 정말 자신 있습니다.”
“꼭 조사가 완벽했다고 뜻이 다 전달되는 건 아니다. 놈들도 우리가 나쁜 짓 하는 놈들이라 생각 안 해.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엉뚱한 억지가 나올 수도 있다.”
“걱정 마십쇼. 그 어떠한 억지를 부려도 설득할 자신 있습니다.”
준철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팽팽했다.
하긴. 업계 끝판왕인 연방거래위원장까지 설득해 본 놈인데 저 정도 자신감은 있겠지.
“그럼 내일 컨디션만 좋으면 되겠군. 오늘은 일찍 자자.”
“네.”
개선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텔에선 에펠탑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자정을 기점으로 관광객들을 위한 점등 행사가 펼쳐졌지만 구경도 못 해 보고 잠에 드는 준철이었다.
***
“안녕하세요. 프랑스 재정부국장 앙리요.”
“EU경쟁국장 파비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국 공정위 오 과장이라고 합니다.”
경제재정부에 도착하니 중년인 사내들이 이들을 맞았다.
악수를 나누는 그들의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팽팽한 긴장감이 확 느껴졌다.
“어제 에펠탑에서 점등 행사가 있었는데 보셨는지요.”
“아, 그랬습니까.”
“한국에서 특별한 손님들이 오신다기에 조촐한 환영 인사를 드렸지요.”
“이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었는데.”
“마침 그 점등 행사가 오늘까지라 하니 둘러보시지요. 사실 그 에펠탑 점등 행사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호적인 불·한 관계의 상징적인 면 아닐까 싶네요.”
회의는 덕담으로 시작되었지만 일 얘기가 시작되자 금세 얼굴이 무거워졌다.
“저희는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게 저희들이 처벌한 내용입니다.”
앙리 국장은 한국 측의 서류를 받고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사실 에너지와 관련한 문제라 우리 당국도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낸 공문이 한국에 실례가 되었다면 이해해 주세요.”
“네. 이해합니다.”
“다만 이 문제는 좀 들어 봤음 하는데……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린 연유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앙리 국장이 그리 묻자 오 과장이 시선을 돌렸다. 당사자가 직접 대답하란 뜻이다.
준철은 두 사람을 응시하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명백한 끼워팔기였습니다.”
“끼워팔기요?”
“ATT사는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자꾸 로열티 안의 권리라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가 없습니다. 일례로 세상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도 이렇게 로열티를 팔진 않죠.”
“흠…….”
“그건 프랑스 정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상품과 시공 서비스는 합쳐질 수가 없는 관계죠. 우리는 ATT에게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는데, 계속해서 답변을 미뤄 왔습니다.”
준철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놈들에게 당한 모욕적인 언사도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런 추태까지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게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기업 질서를 존중하는 게 어떨지.”
역시나.
순순히 협조하진 않는구나. 하긴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자국 기업의 이익이 달린 문제니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천연가스 관련 사업이니 더더욱 냉정한 판단을
기대하기 힘들다.
“경쟁당국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EU경쟁당국과 저희가 국경은 달라도 동종 업계 사람이잖아요. 저희의 처벌이 과하다 생각하십니까?”
도발적인 물음에 당황하기도 잠시.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시다시피 한국 조선 업계가 합병 신청을 한 적이 있었죠.”
“…….”
“하지만 당시 EU는 국내 조선 업계의 독과점이 우려되어 합병 심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설마 지금 그 사사로운 감정을 대입하는 겁니까.”
“아니요. 그건 주권 국가의 정당한 권리 행사였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결정도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국익과 전혀 관련 없는 문제예요. 오로지 회사의 이익만
있습니다.”
그들이 합병을 거부했을 때, 한국 공정위도 거들지 않았다. 철저히 사익이다. 분명 치우침 없이 판결했을 것이다.
같은 요구 조건이었으니 반발할 수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준철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침묵이 흘렀다.
앙리 국장이 이윽고 말을 뗐다.
“이거 참 민망하게 됐군요. 솔직히 천연가스 관련 문제라 어쩔 수 없이 참여하긴 했다만 우리도 내키지 않았어요.”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ATT에서 어찌나 공문을 보내 달라 하던지 원. 하지만 이 문제가 국익과 관련 없다는 것쯤은 우리도 압니다.”
“하면…….”
“한국 공정위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시정해야죠. 다만 어렵게 개발한 로열티는 존중해 주셨음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끼워팔기 하나만 없애면 됩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EU경쟁당국장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U경쟁당국 또한 한국 공정위 결정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호적인 양국 관계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선 더더욱 안 되죠. 한국의 결정을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