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국감의 계절 (1)
국장실에서 나온 오 과장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행시 출신의 4년 차 사무관…… 솔직히 빠른 감이 없잖아 있다. 말이 좋아 4년 차지 사실상 최저 연수 채우자마자 바로 승진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아무리 고시 출신이라도 보통 6년 차에 진급하며, 그래도 초고속 승진, 엘리트 코스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준철의 승진은 이런 암묵적인 관례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뭐…… 무리도 아니지.’
그럼에도 이 결정이 전혀 파격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놈은 확실히 다른 놈들과 다르다.
초임 때 두각을 드러내는 신입 팀장은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 큰 사건 만진 놈들은 다음 조사에서 과잉 조사로 걸리거나, 무리한 과징금으로 패소당하며 스스로 밑천을
드러냈다.
처음 잡았던 행운을 자기 실력인 양 믿다 결국 무너지는 것이다. 공정위 조사권을 무소불위의 권력처럼 휘두르다가.
놈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었다.
특히나 이번 유럽 미팅에선 놈이 이미 팀장의 역할을 넘어섰다는 걸 톡톡히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승진시키기 싫었다. 국장님께선 1년만 있다 다시 부를 거라 했지만, 이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얘기다.
솔직히 현장에서 구르다 본청으로 가면 누가 다시 돌아오고 싶겠나?
같은 고생을 해도 지휘부 옆에서 하면 더욱 표가 나기 마련이다. 고과도 더 챙겨 받고, 일도 훨씬 수월하다. 고위직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자리에 대한 욕심도 생길 텐데, 이걸 박차고
나올 바보는 없다.
“고생했다. 국장님께서 입이 닳도록 칭찬하시더라. ATT 쪽에서 완벽히 승복한 거 맞지?”
“네. 대신 저희도 과징금 반으로 줄였습니다. 모두 과장님 덕분입니다.”
준철이 헤실헤실 웃자, 오 과장이 퉁명스레 말했다.
“녹음기냐? 무슨 칭찬 한마디 할 때마다 똑같은 소리야.”
“정말입니다. 과장님께서 국장님 설득해 주시지 않았으면 EU경쟁당국과의 미팅도 없었을 겁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만약 자리를 주선해 주지 않았더라면 법정 싸움까지 갔을 문제다.
“자리만 주선했지 가서 설득은 혼자 다 했잖아.”
“저야 실무진이니까 할 말이 많을 수밖에…….”
“단순히 실무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네가 국내 조선 업계 박살 낸 전력이 있으니까 할 말 다 할 수 있었던 거야.”
“그것도 그렇네요. 근데 저 대웅조선 특허 분쟁 때도 자리 만들어 주신 게 과장님 아니십니까.”
“뭐?”
“그때 위원장님의 지시가 없었다면 배 한 척 다 못 까봤을 겁니다. 생각해 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과장님께서 다 자리를 만들어 주셨네요.”
생각보다 이 녀석과의 추억거리가 많다.
오 과장은 희미하게 웃다 슬쩍 얘기를 꺼냈다.
“이 팀장. 그럼 앞으로 그 자리도 혼자 마련해 볼래?”
“예?”
“팀장급은 너무 업무 권한이 없잖아. 과장만 돼도 다르다. 주요 결정 권한은 물론, 필요하면 상급 부서에 직접 보고도 올릴 수 있다.”
“무슨 말씀인지…….”
“국장님이 너 과장으로 올릴 계획이신가 보더라. 슬쩍 한번 의견 물어보라던데, 어때?”
준철의 반응은 좀 의외였다.
보통 진급 대상자라는 걸 알려 주면 좋은 티 감추려고 얼굴이 씰룩거리지 않나. 하지만 이놈은 전혀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고, 되레 걱정스런 눈빛으로 변했다.
“진급…… 대상자요?”
“표정이 왜 그래. 징계가 아니라 진급 대상자다. 잘못 알아들었어?”
“아닙니다. 너무 갑자기 들은 터라…… 근데 이건 확정된 얘깁니까?”
“국장님이 직접 대상자로 추리신 걸 보면 무리 없이 이뤄질 거다. 빠르면 내년 초에 인사 발령 날 거야.”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와야 될 타이밍에 또다시 놈이 주춤거렸다.
“이 팀장, 아무리 고시 출신이라도 네 연차에 과장이면 1계급 특진이나 다름없어. 설마 내가 승진턱 내라고 할까 봐 표정 관리하는 거냐.”
“아닙니다. 사실 그래서 좀 당황스럽습니다. 내년이라 해 봤자 제가 겨우 3년 차 벗어나는 수준인데, 진급이 너무 빠른 건 아닌지…….”
“빠르다마다. 네 나이 생각하면 국장까진 무리 없이 갈걸. 넌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버선발로 뛰어가서 국장님께 큰절 올려야 돼.”
준철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각별히 신경 써 주셨는데, 제가 너무 점잔 떨었습니다.”
“이거 봐. 좋으면서 아닌 척할 줄 알았다. 흐흐.”
“근데 과장님. 저 그럼 바로 종합국 과장이 되는 겁니까.”
“그건 좀 어렵고. 본청에서 1-2년 있다 와야 돼. 가서 네 적성 찾으면 꼭 종합국으로 올 필요 있냐? 카르텔조사국으로 가도 되고, 시장감시국으로 가도 된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조사를 해 왔다. 그 어떤 부처에 가든 쌍수 들고 환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준철은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저 과장님. 진급 안 하면…… 아니 조금만 미룰 수 없습니까.”
“뭐?”
“저는 현장에서 굴러야 힘이 나는 놈입니다. 본청에서 책상 업무 보면 흥미가 많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가기 싫었다.
본청 지휘부는 조사 부처가 아니라 국회 입법부에 가깝다.
건전한 시장 조성을 위한 새 공정법 발의, 공정거래법 개정, 제도 개선 등의 고차원적인 일을 맡는다.
그래서 진급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이번 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으니까.
한명 그룹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치가 떨리지만, 매 사건을 맡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한심한 놈이었는지도 함께 깨달았다.
지휘부로 가면 속죄할 기회도 없어지겠지.
“이 팀장. 까불지 말고 그냥 진급해.”
오 과장은 그 한마디로 준철의 고민을 박살 냈다.
“본청 지휘부가 무슨 책상에만 앉아 있는 줄 알아? 따지고 보면 큼지막한 조사는 다 본청에서 내려온다. 너 본청 가면 엉덩이 붙이고 있을 시간도 없어. 전국 돌아다니면서 기획조사
전달해야 할걸.”
“그게 아니라 전 진급에 욕심이…….”
“진급에 욕심 없는 거하고 거부하는 건 다르다. 그리고 네가 무슨 로보트냐? 진급에 욕심도 없고, 돈에 욕심도 없고 만날 일만 해. 넌 인생의 목적이 뭐냐?”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나는 김성균이 아니라 이준철이라는 걸.
오 과장도 적이 당황했다.
국장님이 의견을 물어보라 시킨 건 진급 대상자라는 걸 미리 통보하란 뜻이지 정말 의사를 물어보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 대답이 no일지도 몰랐다.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내일 당장 진급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최저 연차 채웠으니 심사 한번 봐주겠다 하는 수준이야. 내년까지 아직 시간 많다. 그 안에 너 사고 치면 바로
없던 일이 될걸.”
“…….”
“솔직히 네가 그 안에 사고 안 친다는 보장도 없지. 너는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놈이잖아.”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에 조금 위안이 됐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너무 겸손 떨었습니다. 진급시켜 주시면 최선을 다해 본분에 충실하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3, 4분기 고과는 다 다른 팀장들한테 몰아줄 거야. 본인이 싫다면 남이야 좋지.”
“……좋은데요. 과장님 밑에서 더 오래 일할 수도 있고.”
“이놈이 말은!”
오 과장은 웃는 말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나가 봐. 이번 사건 고생 많았다.”
“네. 과장님…… 3, 4분기 고과 잘 부탁드립니다.”
“한번 생각해 보지.”
웃으며 과장실을 나왔지만 곧이어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이번 생을 사는 이유가 뭘까…….
처음에 이 몸으로 눈을 떴을 땐 그리 생각했다. 속죄하라고. 하지만 속죄만 하라고 다시 태어나진 않았을 터.
불현듯 한명 그룹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막연했다. 아직 부회장과 닿는 연도 없는데, 내가 무얼 해야 할까? 어쩌면 너무 막연한 얘기라 일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내년이면 아직 시간은 있겠지……?’
밀린 숙제를 좀 급하게 해야 할 것 같다.
***
ATT의 과징금이 완납되며 공정위에도 한산한 가을이 찾아왔다.
액땜을 크게 한 것인지 모처럼 큰 사건이 없었다.
종합국 본연의 역할대로 민원 업무에 주력했으며, 가끔은 퇴근 후 반원들과 맥주를 기울였다. 평범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좋은 시절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윤 팀장! 이거 국감에 제출할 자룐데 누락시키면 어떡해? 이런 거 하나 꼬투리 잡히면 바로 단두대 되는 거 몰라?”
코앞으로 다가온 국정감사에 여의도가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공정위에게 9월은 유격과 혹한기를 합쳐 놓은 죽음의 계절이었다. 청문회 스타 지망생들이 가장 벼르고 있는 오디션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도 모를 의원실에서 자료 요청이 쏟아졌고, 이 때문에 지휘부 사무실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한 의원님…… 정말이십니까? 이걸 저한테 맡기시겠다고요?”
그리고 그중엔 드디어 실력 발휘할 기회를 얻은 지망생이 있었다.
“왜? 자네한텐 좀 부담스럽나.”
“아, 아닙니다! 맡겨 주시면 제가 잘해 낼 자신 있습니다.”
“싱겁기는.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엄살을 떨고 그래.”
“……저한테 이렇게 큰 기회를 주신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그만큼 당 지도부가 자네를 좋게 보고 있단 뜻이야. 금리인하권 때 자네가 보여 준 박력,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해 보라고.”
얼떨결에 스타덤에 오른 박성택은 심정이 복잡했다.
지난 금리인하권 사건은 공정위가 준비한 푸짐한 밥상이었지, 유달리 뭘 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큰 기회를 준 선배 의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법.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소한 국방부장관 모가지는 따 오겠습니다.”
“흐허허. 그래, 이래야 박성택이지.”
사실 중진 의원이 건넨 자료에 박성택 눈은 이미 돌아가 버렸다.
[군부대 납품 비리]제목만 봐도 군침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행정부 산하기관 중 국방부만큼 먼지 잘 나오는 곳이 또 있을까.
“내용은 숙지했나?”
“네. 군부대 급식 품목 19개 가격이 수상하다 들었습니다.”
이번에만 하더라도 그랬다.
식재료를 납품하는 업체들이 시중가보다 더 올려 군부대에 납품했던 것이다.
인상한 만큼 품질이라도 좋았으면 말을 안 한다. 하지만 군납 업체가 납품하는 식자재는 하자투성이었고, 일선 부대에선 식중독까지 보고되었다.
“근데 한 의원님. 식중독까지 보고될 정도면 진작 진상 조사를 해야 했던 거 아닙니까.”
“좋은 자세야. 국감에서 그거 반드시 지적하게. 방위청이 사고를 덮는 데만 급급했다고.”
“그게 아니라 순순히 궁금해 여쭤본 겁니다. 이거 비리가 꽤 오랫동안 이뤄졌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