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짬밥 스캔들 (1)
“박성택이?”
“네. 과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저희 금리인하권 사태 때 굉장히 많은 역할을 해 준…….”
“역할은 얼어 죽을. 그놈이나 우리나 얻어 가는 게 있으니 합작한 거지. 까먹은 지 오래다. 아, 하나는 기억나네. 국감에서 간첩잡았다고 허풍 떨다가 탈탈 깨진 거.”
“…….”
“최소 한 달은 고개도 못 들고 다닐 줄 알았는데, 이걸 고스란히 우리한테 가져왔어?”
오 과장은 서류도 들춰 보지 않았다.
“이건 국장님께 보고하고 말 것도 없다. 안 돼.”
“과장님. 편견 없이 서류만 봐 주십쇼.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럼 편견이 안 생기게끔 행동하든가. 국감에서 탈탈 털리고 이걸 이제 와 조사해 달라? 너 같으면 이게 편견이 안 생기겠냐.”
하라고 등 떠밀어도 도망가야 될 사건이다.
정치적 논란이 다분한 사건을 왜 하겠다는 건지.
“그건 사연이 있었답니다.”
“무슨 사연?”
“군납 업체가 가격을 올려서 납품했으니 당연히 청탁을 의심했다고…… 근데 방사청은 입찰 담합을 의심 못 할 만큼 무능했더랍니다.”
오 과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검찰에 가져가라 그래. 잘난 검찰 후배들 내비 두고 왜 우리한테 와?”
“입찰 담합이잖아요. 저희가 전속 고발권 안 쓰면 검찰도 수사 못 합니다.”
“야, 이게 지금 업무 영역 칼같이 지켜야 될 사건이냐? 딱 봐도 거기 가져다주면 안 될 거 같으니 우리한테 온 거 아니야.”
준철도 할 말이 없었다.
이 말이 정확히 맞는 표현이다.
“불순한 목적이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딱 봐도 금리인하권 때 한 번 도와줬다고 생색낸 모양인데 휘말리지 마, 너 이거 맡으면 정쟁에 휘말리는 거다. 아니, 공정위 전체가 다
휘말릴 수 있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저 그거 때문에 맡겠다는 거 아닙니다. 진짜 자료 이상합니다.”
“뭐?”
“한 번만 검토해 주십쇼. 군납 업체 납품 가격이 시중가보다 높습니다. 지금까지 왜 안 들켰나 모를 정도로.”
오 과장은 준철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문득 후회가 들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업무 성과가 아니었다면, 과장으로 진급하라고 채근하지 않았다면 엉덩이를 걷어차 돌려보냈을 텐데.
“네가 생각보다 잔정에 약하구나.”
하지만 이놈은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오 과장은 푸념하며 서류를 들었다.
그리고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
이상했다.
납품 가격은 물론 불량률도 비정상적이다. 만약 이게 학교나 회사 급식에 납품되던 식품이라면 당장 거래가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의심되는 식료품은 미트볼, 돈가스, 참치 등 사소한 식품들이었는데, 그 사소한 모든 것들이 다 구린내를 풀풀 풍겼다.
“…….”
오 과장은 부지불식간 박성택이 이해돼 버렸다.
단순히 서류만 놓고 보면 정말 썩은내투성이.
방사청과의 청탁 관계도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다. 만약 국감 같은 큰 무대에서 깨지지 않았다면 별말 없이 조사를 허락해 줬을 정도다.
“……업체가 총 몇 개야?”
“22곳입니다.”
“그럼 뒤에 있는 곳은 더 많겠네.”
“예. 총 한 100개 사가 담합했을 겁니다.”
오 과장은 이렇게 호기심을 보이는 자신이 싫었다.
단칼에 거절해야 하는데 자꾸만 의심이 쏠린다.
“가격 담합은 확실해?”
“일단 가격을 보십쇼. 시중가보다 더 비싸게 납품했습니다.”
“겨우 그것만 가지고는 조사 허락 못 한다. 더 결정적인 건?”
“그건 방사청 입찰 자료를 봐야 합니다. 입찰 업체가 얼마를 제시했고, 어떤 기준으로 낙찰 업체를 선정한 건지.”
“방사청은 절대 그 자료 안 내 줄 건데.”
“그러니까 강제로 가져와야 합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오 과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 이건 곧 영장과 압수수색도 불사하겠단 뜻이다. 달리 말해 사건이 커질 수도 있단 뜻이었고, 사실 커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도
했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겠습니다.”
“그게 되겠냐? 이거 맡는 순간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갈걸. 박성택이 보복하려고 조사 청탁했다고. 그럼 방사청과의 리베이트가 아니라 우리랑 박성택의 유착이 되는 거야.”
오 과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자칫하면 공정위와 야당의 청탁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위험하다. 덮자.”
“과, 과장님.”
“정 하고 싶으면 한 1년만 기다려. 논란 좀 잠잠해지고 난 뒤에 해도 되잖아.”
오 과장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서류를 덮었다.
“이건 정말 안 돼…… 만약 했다가 소득 없이 끝나면 공정위에 피바람 분다.”
***
“안 됐죠?”
“네…….”
“거 보세요, 팀장님. 이건 정말 아니라니까요. 과장님도 어지간해서 팀장님 편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런 과장님이 못 박아 버릴 정도면 위험한 사건이란 뜻입니다.”
준철이 힘없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김 반장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놈의 팀장이 폭탄 스위치를 누르려 하지 않나. 말단인 자신이 봐도 위험한 사건이었다.
“그래도 이거 서류만 보면 분명 문제 있어 보이는데…….”
“저희가 뭐 만날 서류만 보고 조사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마음먹고 보면 대기업 자료 중에 안 이상한 서류가 얼마나 있겠어요.”
“……그건 그렇네요.”
“솔직히 정쟁을 떠나서 우리가 공공 기관한테 칼을 대는 것도 모양새 이상합니다.”
사기업이라면 얼마든 물고 뜯어도 된다. 그러라고 있는 게 공권력이니까. 하지만 여기에 공기관이 얽혀 있으면 처세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준철은 이미 전과도 엄청났다. 특허 갑질 땐 중기부와 싸웠고, 산재 은폐 땐 노동부와도 싸웠다. 나중에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공기관과 척을 지는 건 분명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과장님께서 안 된다고 한 이상 저도 더는 욕심 안 낼게요.”
“그럼 이 자료 다 폐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똥은 싼 놈이 치워야죠.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진짜 안 할 테니까.”
마음 같아선 서류가 파기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김 반장이었지만 그쯤은 양보했다.
직접 안 하겠다 말했으니 뒤통수칠 일은 없겠지.
“식사 먼저 하세요.”
반원들을 보내고 난 뒤.
준철은 허망한 얼굴로 국방부 자료를 들었다. 서류의 양은 박성택의 간절함을 대변했다. 국방부와 방사청의 3년 치 군납 업체 자료가 있었는데, 그 양이 혼자 나르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정쟁은 차치하고…… 이거 진짜 문제없나.’
박성택이 국감에서 자살골만 넣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사건인데. 털어 내기엔 너무 버거운 똥이 묻어 버렸다.
‘일선 부대에서 식중독까지 보고 될 정도면…… 납품이 정말 개판이란 뜻인데.’
조류독감이 돌면 닭고기만 나오고, 구제역이 돌면 돼지고기만 나온다, 라는 군부대 도시전설이 이 자료엔 적나라하게 나와 있었다.
감자가 풍년이면 정말 온 식단이 감자국, 감자조림, 감자볶음. 배추가 풍년이면 듣기만 해도 손이 안 가는 배추국이 연달아 이틀 동안 나왔다.
군부대 식단 자료만 보면 군부대 밥을 왜 짬밥으로 부르는지 절로 이해가 될 정도다.
하지만 의심만으로 진행시키기엔 너무나 리스크가 큰 조사.
‘젠장. 또 허튼 생각했네. 깔끔하게 덮자.’
그렇게 덮고 일어났을 때.
“윽…… 악!”
한동안 잊고 있던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
“진짜 이래도 될까…… 꼬리가 길면 밟힌댔어.”
“아, 장 사장님은 왜 자꾸 걱정을 사서 해요. 지금까지 잘해 오셨으면서.”
“내가 요즘 관계자들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래. 군납품에 불량 너무 많다고 대대적인 칼질을 한댔어.”
“그 얘긴 5년 전에도 나왔고 10년 전에도 나왔습니다. 근데 우리 중 칼질당한 업체 있어요?”
두통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느 사내들의 대화였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우리 군납 업체끼리 진짜 출혈 경쟁할 거예요? 이 중에 딱 한 놈만 살아남을 때까지?”
“그건 안 되지! 우리끼리 쌈 붙으면 서로 죽어.”
“솔직히 우린 해 먹는 것도 아니야. 장 사장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만 이러더라.”
꼬리 없는 원숭이들 있는 사이에선 있는 원숭이가 왕따된다 했던가.
그나마 양심적으로 보이는 장 사장은 한순간에 바보가 되었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합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 이 정도만 올려 받아요.”
“홍 사장…… 이 가격도 시중가보단 높잖아. 이번에 바뀐 방사청장은 원리원칙밖에 모르는 놈이래. 수장이 바뀌었는데 당분간 조심하는 건 어때.”
“그 소리도 5년, 10년 넘었습니다. 무슨 취임하는 놈들마다 다 자긴 원칙적인 사람이래.”
“장 사장. 우리가 뭐 방사청 상대 하루 이틀 해 봐? 이것들은 된장 대신 똥을 납품해도 분간 못 할 놈들이야.”
담합을 모의한 게 이번 한 번이 아니었나 보다.
대화는 이미 많이 정리된 듯 보였고, 분위기는 거의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도 장 사장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옆 사람들이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잘하시다가.”
“……요즘 식제품 검수가 너무 까다로워. 장병들이 식단에 불만 많다고 사단장이 직접 취사 지원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거 다 쇼라는 거 모릅니까. 아닌 말로 병사들 반찬 투정이 하루 이틀이야?”
“맞아. 어차피 다 억지로 끌려온 애들이야. 한우스테이크를 먹여 줘도 다 고무 씹는 맛이라고.”
“그리고 요새 병사들 월급이 한두 푼이에요? 반찬 입맛에 안 맞으면 px 가라 그래.”
장 사장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졌다. 점점 이들의 말에 설득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럽디다. 직장인들 월급 실수령액은 40만 원이라고. 군인들은 국가에서 먹여 줘, 재워 줘, 입혀 줘 어디 돈 쓸 데 있습니까?”
“맞아, 맞아.”
“아무리 군대 편해졌다 해도 사단장들이 병사들 반찬 투정까지 들어주진 않아요. 장 사장님 우리 거국적으로 결단 한번 합시다.”
한참 고민에 잠기던 그는 어느새 얼굴이 밝아졌다.
본래 양심은 지킬 때 괴롭고 어길 때 즐거운 법이다.
“모르겠다. 그래…… 우리끼리 쌈 붙으면 다 죽지. 다른 사장님껜 미안해요. 그냥 우리 전체를 위해 신중했다 생각해 주세요.”
“알다마다. 이 가격에 납품해도 우리 애국하는 겁니다. 흐흐. 그럼 이번 입찰도 우리끼리 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거죠?
“……대신 약속이 있어. 아무리 담합해서 물량 나눠 가진다 해도 불량품은 줄이자. 원래 큰 사고는 다 이렇게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해.”
“자- 들었죠? 가격 올려 받는 만큼 우리도 품질로 보답합시다.”
여기저기서 끄덕였지만 진짜로 그럴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군대 밥이 왜 짬밥이겠는가. 시중에 납품하면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을 상품, 이만한 짬 처리장도 없다.
“그럼 지난번처럼 육류는 우리 한동식품이 가져갑니다.”
“수산물은 저희 생생자원이요.”
“우유는 일단 우리 쪽에 줘. Fresh사와 물량 나눌 거야.”
“라면은 우리가 납품합니다.”
“음료수는 우리.”
“참치 골뱅이는 우리가 가져갑니다.”
그렇게 각자 원하는 대로 입찰이 결정되었다.
군인들의 밥상이 능욕당했다는 박성택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 대화를 슬쩍 엿들었을 뿐인데 있던 밥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