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
16화
한경모비스 (2)
금쪽같은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준철은 가벼워진 몸으로 출근을 했다.
야근·주말 근무 없이 보낸 지난 휴가는 흡사 방학과 같았다.
밀린 잠 보충하고 삼시 세끼 챙겨 먹었을 뿐인데 10년은 회춘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가벼운 발걸음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축 늘어졌다.
“어, 이 팀장 왔구먼.”
사무실에 도착하니 과장님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준철은 직장 경력 20년에 공무원 생활 2개월인 베테랑이다.
상급자가 사무실에 찾아올 땐 엄청난 용건이 있을 때란 걸 잘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휴가는 잘 보냈어?”
“덕분에…….”
“원래 그거 이틀 휴가였는데, 내가 국장님께 어필해서 하루 더 늘린 거야.”
“아…….”
“위에서도 자네 일 잘했다고 얼마나 칭찬인지 몰라. 이제 보니 이 팀장이 일 재주가 좋아.”
불행한 직감이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휴가 신경 써 줬다, 위에서 너 좋게 생각한다. 이건 주로 업무 폭탄 투하할 때 쓰는 미사여구 아닌가?
죽을 맞춰 고개를 끄덕이니 오 과장이 본심을 드러냈다.
“다 모인 것 같으니 말하지. 뭐 별건 아니고 심사관 쪽에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어떤 문제입니까?”
“한경모비스라고 대리점 갑질 사건이야.”
김기남 반장이 경기를 일으켰다.
“한경모비스요? 그거 저희 쪽에서 5년 동안이나 맡고 있는 거 아닙니까?”
“어, 잘 아네. 5년 동안 조사하면서 거의 다 끝냈다.”
“그럼 저희가 왜…….”
“근데 퍼즐 몇 개가 빠진 모양이야. 이게 말로 하면 좀 복잡한데…….”
과장님이 자꾸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준철은 이게 얼마나 큰 사안인지 직감했다.
공정위 심사관.
여긴 기업이 처벌에 불복하면 싸우는 부처다.
준철은 전생에서 이 심사관과 엄청난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갑질 적발됐을 때 늘 처벌 수위 가지고 싸우지 않았나?
여기서 협상 결렬되면 바로 법원으로 가서 행정소송이다. 퍼즐 찾기니 보물찾기니 하며 가벼이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그런 예감은 적중했고, 과장님의 설명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장장 5년 동안 진행된 수사 얘기를 5분으로 압축해 들으니, 설명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해서 말인데 이거 자네들이 좀 맡아 줘.”
“…….”
“역시 우리 1팀은 열의가 있어. 다른 부서였으면 맡기 싫다고 군소리나 했을 텐데.”
“과장님 그게 아니라.”
“아, 자세한 내용은 여기 더 나와 있어. 일단 검토해 보고 추후 생각해 보자고.”
오 과장은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남기며 자리를 훌쩍 떠나 버렸다.
꼭 공중화장실에서 물 안 내리고 튀는 사람처럼 보였다.
***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한경모비스에서 잘못을 인정 안 한 것도 아니고. 동의의결안까지 가져왔잖아요.”
과장님이 나가고 난 뒤엔 사무실이 불지옥으로 변했다.
그냥 참여하면 안 되는 수사다.
동의의결안 가져왔으면 기업이 죄를 인정했다는 뜻 아닌가?
종합감시국은 유·무죄를 밝히는 곳이지 처벌 수위 가지고 싸우는 부처가 아니다.
“결국 ‘반성문’ 내용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데 이게 우리가 다룰 문제입니까?”
“처벌은 검사랑 상의해야죠.”
“보니까 대리점한테 강매한 증거도 다 잡았네요. 재판 두려울 게 뭐 있습니까?”
김 반장은 준철을 슬며시 봤다.
“팀장님. 왜 한 말씀도 없으십니까. 이거 하실 겁니까?”
“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심사관 쪽에 완곡히 거절할 순 있죠. 저희가 소극적인 모습 보이면 대강 뜻 접을 겁니다.”
“흠…….”
“아이참- 팀장님. 그냥 거부하세요. 증거 다 잡았잖아요.”
“우리가 거절해도 재판 가면 돼요.”
반원들이 성토하자 준철이 웃음을 보였다.
“재판 가면 저희한테 더 불리할걸요.”
“예?”
“언뜻 보면 증거가 다 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게 빠졌잖아요. 피해자.”
준철은 오 과장이 말한 ‘빠진 퍼즐’이 뭔지 금세 눈치챘다.
피해는 있는데 피해자가 없는 사건이다.
익명으론 갑질 피해를 호소하는데, 대리점 그 누구도 자기가 피해자라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라면…… 대리점이요?”
“네.”
“아니 그래도 한경에서 동의의결안 가져왔잖아요. 이건 기업 스스로도 죄는 인정했다는 겁니다. 유죄 확정 아닙니까?”
“그것도 뒤집힐 수 있어요. 피해자 확보 못 하면 더 큰 사건이 있었어도 덮어질 겁니다.”
단순하다. 갑질은 친고죄니까.
심사관은 재판까지 가겠다고 협박하면서, 처벌 수위를 높이고 싶을 것이다.
근데 한경모비스가 눈치챈 것 같다.
가져온 ‘반성문’이 형편없다.
“솔직히 말하면 심사관 쪽에서 기분 나쁠 만해요. 이건 말만 시정안이지…….”
준철은 서류를 펼쳐 보였다.
“관련자 처벌, 징계 아무것도 안 하고. 피해입은 대리점에게 피해 배상도 안 하고. 상생기금…… 이건 솔직히 나중에 가서 자기들 위해 쓰면 되는 거고. 이 중에 진정성 있는
시정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나선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
“분위기 조성은 할 수 있죠. 저희가 움직이면 그쪽도 오만 생각 다 들 겁니다. 진짜 재판 가나? 싶으면 자기들도 시정안 수위 높일 거고.”
최종 목표는 재판이 아니다.
한경모비스가 이를 두려워해 자진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게 목표다.
“왜 5년이나 싸우고 있나 했더니만…… 결국 눈치 싸움이었네.”
김 반장이 퉁명스레 말하자 준철이 웃었다.
“아마 심사관도 한경모비스도 서로 안 물러날 겁니다.”
“그렇겠죠. 5년이나 싸웠으면 서로 베팅 크게 했다는 건데.”
“자세한 건 우리도 심사관 쪽 얘기를 들어 보죠.”
“후우……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김 반장이 먼저 일어났다.
“그럼 팀장님 빼고 나머진 전부 다 나 따라와. 심사관 가서 세부 자료 받아 오자고.”
“저도 갈게요.”
“짐 드는 건 저희로 충분합니다. 그쪽 팀과 곧 미팅 가져야 할 텐데 팀장님은 자료 검토 더 하십쇼.”
“아,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김 반장이 나가고 난 후 준철은 무겁게 서류를 들었다.
“하필 걸려도…….”
휴가 복귀 첫날부터 재수가 없다.
하필 걸려도 갑질의 끝판왕 대리점 갑질이라니.
대리점-본사 문제는 원-하청 문제와 차원이 다르다.
일감 끊긴 하청은 다른 거래처라도 찾을 수 있지만, 계약 끊긴 대리점은 그냥 죽으라는 거다.
-휙휙.
그들의 그런 수직적 관계는 서류를 넘길수록 소상히 드러났다.
‘목표 매출 50억? 작년 매출 40억짜리 대리점에?’
본사에서 대리점에 과대 매출을 설정했고, 매출 미달 시 계약 끊겠다 협박했다. 이는 곧 본사 제품 강매로 이어졌다.
‘얼씨구. 재고는 반품도 안 해 줬어?’
‘대리점에서 할인 행사한 거 한 푼도 안 까 줬네?’
남은 재고는 어떡하겠는가? 대리점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세일해 팔아야지.
한경모비스는 이 세일 행사에 10원 한 장의 보조금도 주지 않았다.
해당 행위를 공정위에 모두 들켰을 땐, 스스로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처음엔 담당 직원을 징계위에 회부하고 공정위에 죄를 자백했다.
하지만 1-2년 지났을 땐, 해 볼 만하다 생각한 것 같다.
피해는 있는데 피해 대리점이 나타나지 않자 공정위에서 부과한 과징금을 거부하고, 성의 없는 동의의결안을 가져왔다.
“이것들이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마지막 서류를 넘길 때였다.
“아악.”
일전에 경험한 통증이 다시 찾아와 준철의 머리를 강타했다.
***
“확실해? 공정위 다른 행보는 없어?”
“예. 공정위가 검찰까진 안 갔습니다. 그쪽에서도 분위기 살피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또 그 증상이다.
불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렴풋 눈에 들어온 건 어느 회의 장소였고, 양복쟁이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상석에 앉은 한 노인은 한숨을 반복하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벌써 5년이다. 경찰 수사도 5년 이상이면 장기 미제로 분류되는데, 우리 지금 공정위랑 5년 동안 싸우고 있어.”
“…….”
“더 웃긴 건 아직 재판도 안 가 봤다는 거야. 3심까지 가면 10년 동안 싸우겠네? 우리 임원들은 최소한의 밥값도 못해?!”
늙은 회장이 호통치자 회의실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 필요 없어. 오늘은 계급장 떼고 할 말 있으면 다 해! 김 사장,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거야?”
그리 말하자 좌측에 앉아 있던 사내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 저희 시정안은 솔직히 속내가 너무 드러났습니다. 최소한 담당자 문책은 했어야죠. 사건 잠잠해지면 나중에 다시 불러들여도 됩니다.”
“회장님, 상생기금도 너무 뻔했습니다. 액수도 변변찮았고요.”
“적당히 반성하는 시늉 보여 줬으면 끝났을 텐데, 솔직히 골든타임을 놓친 감도 있습니다.”
다들 자성의 목소리를 내자 우측에 앉아 있던 부사장이 피식 웃었다.
“회장님. 관련자 문책한다고 이 사건 끝났을까요? 그건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그다음엔 피해 보상, 그다음엔 재발 방지 대책 같은 해괴한 요구가 다 나왔겠죠.”
“맞습니다. 솔직히 그 담당자들 다 회사 매출을 위해 일한 임원들입니다.”
“그런 임원들 함부로 해임하고 파면하면 직원들 사기만 떨어질 겁니다,”
김 사장은 부사장을 노려봤다.
“그렇다고 회사를 다 송두리째 엎을 셈이야?”
“송두리째 엎는 게 아니라 이게 살길입니다.”
“살길? 공정위 수사만 벌써 5년이야. 지지부진한 싸움이 계속되는데 무슨 회사가 살길이야?”
“지지부진하단 건 수사가 안 풀린다는 뜻 아닙니까? 끝까지 가도 어차피 공정위가 집니다.”
“무슨 그따위 궤변을…….”
“그만!”
김 사장의 목소리가 커질 때쯤 회장님의 호령이 떨어졌다.
“부사장, 계속해 봐. 공정위가 진다?”
“예. 지금처럼 대리점들 입단속만 하면 됩니다, 피해자가 안 나타는데 법이 어떻게 우릴 심판합니까?”
“그러다 대리점이 우릴 배신하면?”
“우리 5년 동안 그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근데 배신한 대리점 있었습니까?”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가맹 계약 끊으면 놈들은 죽는다.
“지금 저희가 은근히 겁만 줘도 대리점들 설설 깁니다. 공정위는 괜히 재판 얘기 꺼내면서 저희 겁주는 겁니다. 재판으로 붙어서 이길 것 같았으면 이미 기소했을 놈들입니다.”
“회장님! 저건 회사 명운을 걸고 도박하는 겁니다. 그러다 내부 고발 나오면요? 지금이라도 대리점 달래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김 사장은 다급히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장님의 은은한 미소는 이미 오늘 회의가 끝났다는 걸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