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정쟁을 막아라 (1)
별안간 괴성을 내지른 그는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준철은 그 모습이 못내 불안했다.
사기업이라면 변호사 찾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거다. 궁지에 몰렸을 때 대형 로펌 찾는 건 밥 먹을 때 숟가락 드는 것만큼 당연한 일이다.
검찰 고위직 출신의 변호사가 직통 후배들에게 전화 한 통 싹 다 돌리겠지. 그러면 수사 수위나 처벌 수위는 몰라보게 달라진다.
하지만 놈들은 국방부 소속의 공무원.
끗발 좋은 전관 변호사 이상의 사람들도 데려올 수 있는 놈들이다. 만약 놈들이 정치권 사람을 데려오면 이번 조사가 여기서 백지화될 수도 있다.
애써 불안한 눈빛을 숨기고 있을 때, 그가 통화를 끝내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팀장님. 이렇게 합시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있을 수 있죠. 의도치는 않았지만 군납 업체들이 비리…… 아니, 조금 떳떳치 못한 일을 했을 수도 있죠.”
잡설이 길다. 목소리도 이전과 달리 조금 공손해졌고.
설마 대화가 잘 안 풀린 걸까.
“네. 그럴 수 있죠.”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저희도 자정의 노력을 보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방사청에서 TF팀을 꾸려 자체 진상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잘못된 관행이 적발되면 그 즉시 해당 기업에 엄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준철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웃음을 감췄다.
이런 말이 갑자기 나오진 않았을 거다. 방사청 내부에선 이미 진상 조사를 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무능이 얼마나 컸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어떻게 조사하실 계획인데요.”
“우리도 지금 의심 가는 업체가 몇몇 있습니다. 이들 소환해서 소명 들어 보고 아니다 싶으면 입찰 제한 등의 중징계를 내리겠습니다.”
“그건 그냥 군납 업체들한테 자백 받아 내겠다 이 소리 아닙니까.”
“그게 최선…….”
“최선이 아니라 최악이죠. 기업들은 비리 못 덮을 것 같다 싶으면 사건 축소하기 바쁩니다. 처벌 수위라도 낮춰야 하니까. 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면 아마 군납 업체끼리 총대 멜 놈
정할 겁니다.”
잠시 공손해졌던 차장의 목소리가 대번에 커졌다.
“아니 그럼 이거 어디까지 조사할 작정이요. 아직도 우리 관계자가 기업들한테 청탁 받았다고 생각하쇼?”
“저희도 그렇게 넘겨짚진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사건을 축소하거나, 적당히 처벌할 생각은 없습니다. 드러낼 수 있는 비리는 전부 다 드러내야죠.”
차장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방사청이 자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파악된 업체만 22곳이다. 사실상 입찰 담합에 참여 안 한 군납 업체가 없었다. 자신조차 경악을 금치 못했던 실체가 전 국민에게 공개되면
방사청을 넘어 국방부에도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리고 입찰 담합 이런 사건은 저희 공정위가 전문 부처입니다. 그냥 전문가에게 맡겨 주세요.”
“우리가 지금 전문가 못 믿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요. 내부에서 자체 조사하는 거랑, 외부에서 조사 들어오는 거랑 천지 차이예요. 만약 공정위가 우릴 조사하겠다는 소식이 퍼지면
언론사 또한 요란해질 겁니다.”
“그 정도는 각오…….”
“까놓고 말해 이거 공론화되면 피차 피곤해지는 거 아니요. 공정위는 야당 앞잡이 되는 거고, 우린 여당 앞잡이 되는 겁니다.”
참다못한 차장은 이 사건이 정쟁이 될 것이라고 노골적 협박했다.
앞잡이란 단어가 심히 거슬렸지만 준철은 크게 대꾸하지 않았다. 지루한 입씨름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어쩌겠습니까. 그 오해를 푸는 것도 각자의 역할이지.”
“아니 팀장님!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나 지금 누구랑 통화하고 온지 아십니까? 여당 고위직 의원과 통화했습니다. 그분께서 각 기관이 원만하게 합의하라 했어요.
청와대도 이 문제가 정쟁으로 비화될까 각별히 유의하고 있답니다!”
“그 고위직 의원이 누굽니까.”
“밝힐 수 없는 다선 의원이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이 사건 덮으려 하시면 저흰 중간에서 외압받았다고 언론에 광고해 댈 겁니다.”
준철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솔직히 이 사건을 정쟁으로 끌고 가고 싶은 건 방사청의 바람 아닙니까.”
“뭐, 뭐요?”
“그냥 군납 업체의 비리 사건이에요. 방사청의 무능한 급식 업체 선정으로 국군장병이 피해를 입었다, 이게 사건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여야가 왜 나옵니까?”
나오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계속 그 방패에 숨지 마세요. 설사 여당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와도 우린 이 담합 비리 계속 파헤칠 겁니다.”
쾅-!
“젊은 놈의 새끼가 어디 뚫린 입이라고.”
“차, 차장님. 고정하십쇼.”
“방사청의 무능? 정치적 논란에 휩싸일까 봐 배려해 주겠다는데 이걸 그딴 식으로 말해?”
이성이 끊긴 차장 때문에 주변 직원들이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차장은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다들 잘 들어. 공정위든 나발이든 외부 기관한테 함부로 우리 자료 주지 마!”
“…….”
“내 허락 없이 자료 반출하면 옷 벗을 각오해야 할 거야.”
그러더니 준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헛걸음하셔서 어쩌나. 당신들은 포스트 잇 한 장도 못 가져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건 박성택 의원한테 물어보쇼. 국감에서 간첩 잡았다고 허풍 치던데 그 간첩이 지금 어디 있나. 고작 한다는 게 공정위한테 사주해서 우리 치는 거야?”
“이건 그 문제랑 상관없습니다만.”
“우리한텐 상관있어. 정 자료 가져가고 싶으면 검찰에서 압수수색영장 받아 오고, 나 구속도 해 보쇼.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봅시다.”
그렇게 쏘아붙이며 놈은 자리에서 떴다.
준철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더니 반원들에게 말했다.
“일단 갑시다.”
그렇게 방사청을 나섰지만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박성택한테 사주당한 놈으로 매도당해서가 아니다. 이걸 무조건 정쟁으로 끌고 가겠다는 놈의 의지를 확인해서다.
“팀장님 저 양반 진짜 독하네요. 어차피 다 끝난 게임인데 저리 억지 부리는 거 보면.”
“뭐…… 자기들도 알겠죠. 얘기 들어 보니 이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비리의 실체를 파악한 것 같은데.”
“근데도 왜 저럴까요. 담합 비리 확인했으면 당연히 우리한테 넘겨야지.”
“자신들의 무능을 인정할 용기까진 없나 봅니다.”
김 반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마 끝까지 자료 제출 안 해 주겠죠.”
“아무래도.”
“그럼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검찰 가서 압수수색영장 빨리 받아 내야 할 것 같은데.”
준철은 혀를 한 번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네? 이건 비리가 너무 확실해 영장 바로 나올 텐데요. 자료 입수는 조사가 아니라 사실상 증거 확보입니다.”
“압니다만 모양새가 너무 좋지 않아요. 우리랑 검찰이 동시에 방사청 치면 분명 진영 구도로 갈 겁니다.”
“아…… 놈이 저렇게 악다구니 쓰는 이유가 있군요.”
마음만 먹으면 저 자료 입수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다만, 지금은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도 조심해야 하는 처지다.
“일단은 기다려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폭탄 전달하고 왔으니, 내부에서 다시 얘기가 오갈 겁니다.”
***
강현모 여당 최고의원은 방사청장과 국방부장관을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공정위에서 자료를 요구했다?”
“예. 그렇습니다.”
“자료는 내줬나?”
“저희 차장이 일단 거부했습니다. 온통 민감한 자료들이라…….”
“어떤 의미로 민감하다는 거야? 돈 받아 처먹은 걸 못 숨겼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의원님. 저희도 자체 조사를 해 봤는데, 군납 업체와 청탁 관계인 인사는 절대 없었습니다.”
지난 국감에서 강골 이미지를 얻었던 김 국방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비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만 군납 업체들의 납품가가 수상했다는 점은 아무래도 부정하기 힘든…….”
“시간 없는 사람 데리고 길게 얘기하지 마! 군납 업체들이 뒤에서 입찰 담합한 거 맞아? 방사청은 지금까지 파악도 못 하고 있었고?”
“……예. 그렇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청탁이 아니라 무능이었다.
군납 업체는 장장 8년이나 입찰에 조직적으로 참여했으며, 방사청은 이를 파악하지도 못했다.
“김 국방. 오죽하면 나 이게 차라리 청탁 사건이었으면 좋겠어. 뒷돈 처먹은 놈들만 솎아 내면 국방부가 제 기능 해 줄 거 아니야?”
“…….”
“근데 아예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지. 내 손으로 조직 전체를 뜯어고쳐야 되나.”
“소, 송구스럽습니다.”
강 최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공정위는 어디까지 파악한 것 같아?”
“그쪽에서 요구한 자료 목록을 보면 아무래도 내막 전체를 다 파악한 듯 보입니다.”
“자료 내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사실……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군납 업체들 처벌이야 당연히 이뤄지겠지만 만약 직무유기 혐의를 씌우면 방사청도 무사치 못할 겁니다. 야당에선 당연히 이걸
정치적 소재로 쓸 거고요.”
이 좋은 기회를 야당에서 불구경만 하고 있겠나. 어떻게든 정권 비리, 집권 여당의 무능함으로 만들려 더욱 부채질할 게 분명하다.
김 국방은 일그러진 강 최고 얼굴을 살피며 작심한 듯 말했다.
“의원님. 사실 가장 조용하게 끝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내부에서 자정작용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십쇼. 공정위 조사 멈춰 달라 요청해 주십쇼.”
“그거 멈추면?”
“저희가 진상 조사하고 자체적으로 처벌하겠습니다.”
강 최고가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국방부에서 그걸 어떻게 처벌하게?”
“어차피 군납 업체 선정은 매년 실시합니다. 이번에 문제된 기업들은 다음 입찰에서 선정 안 하겠습니다.”
“그건 처벌이 아니라 당분간 그 업체들한테 일감 안 주겠다는 거 아니야.”
“너무 큰 처벌을 하면 도리어 저희의 죄를 시인하는 꼴입니다. 입찰 제한은 최고 징계입니다.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관련자 기소하고, 업체들 고발하는 건 결국 누워서 침 뱉기다. 그런 죄를 파악 못 한 국방부의 무능만 더 부각되겠지.
차라리 징계인지 아닌지 헷갈릴 만한 처벌로 조용히 넘어가는 게 낫다.
하지만 강 의원에겐 마뜩지 않은 얘기였다.
“뭔 말인진 알겠는데 당신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우리가 당 차원에서 이 문제에 나서는 건 국방부 편 들어주고 싶어서가 아니야. 야당에게 빌미 주면 정권 자체가 위태로워질까
나서는 거지.”
“…….”
“만약 그쪽에서도 정쟁으로 안 끌고 갈 것 같다 싶으면 우리도 나설 생각 없어. 공정위 조사받고 내부 물갈이해.”
그때 회의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의원 보좌진이 급히 들어왔다.
“의, 의원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야당에서 기사 터트렸어요!”
“뭐?”
“야당이 언론사 전부 동원해서 이 문제 공론화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