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정쟁을 막아라 (3)
소리를 버럭 지르려던 강 의원 말문이 막혔다.
현 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이어져 왔던 비리…… 야당도 공범이란 소리며 국민들의 질타를 두 방향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집권 여당이 아주 발을 뺄 순 없었다. 야당은 방사청 내부 자료까지 폭로해 자신들을 궁지에 몰았고 당 내부에서도 진상 규명이란 말이 슬슬 오르내렸다.
만약 이걸 진압해 버리면 당은 온건파와 강경파가 피 터지게 싸우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정당 지지율이 추락하고 야당이 반사이익을 보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떳떳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야당까지 이 진흙탕에 끌고 들어온다면?
국민들의 비난 수위가 더 커지겠지만, 최소한 야당의 반사이익은 막을 수 있다. 또한 이 젊은 놈 말대로 썩은 관행을 뿌리 뽑았단 감투도 얻을 수 있다.
“도망가실 건가요.”
준철은 복잡해진 강 의원 얼굴을 보며 슬쩍 도발적인 말을 꺼냈다.
“도망? 젊은 팀장, 주제넘은 소리 그만하지! 이건 특정 당의 비리 사건이 아니라 한국 국방부의 고질적인 문제야! 우리가 왜 도망가?!”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군 장병들인데, 야당은 그 문제엔 별 관심 없더군요. 어떻게든 집권당 책임으로 끌고 가려는 정치 공세로
보였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오? 공정위가 앞잡이 노릇해 주니까!”
가시 돋친 말이 돌아왔지만 준철에겐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럼 저희가 앞잡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뭐?”
“만약 여당이 협조해 주시면 저흰 지난 8년간의 입찰 내역을 다 들여다볼 겁니다. 현직자들은 물론, 퇴임한 방사청 관계자까지 모두 조사 대상에 오를 겁니다. 어쩌면 그 이전
자료까지 다 봐야 하죠.”
“지금 은퇴한 사람까지 다 뒤집겠다는 건가? 어차피 5년 이상 된 자료는 공소시효 끝나서 처벌도 못 할 텐데.”
“죄가 없어서 처벌 못 하는 거랑 시효가 끝나서 못 하는 건 천지 차이죠. 국민들도 그 차이를 알 겁니다.”
방사청의 뿌리 깊은 무능을 드러내는 게 차라리 여당에게 반가운 일이다.
현 정권의 특수한 비리가 아니라 고질적인 문제로 인식되니 말이다.
하지만 사건 스케일이 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으며, 어쩌면 지금까지 누적된 모든 잘못이 현 여당의 잘못으로 둔갑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이거 어째 떡밥 냄새가 스멀스멀 납니다. 혹시 야당한테 사주받고 이러는 거 아니요?”
“무슨 말씀인지.”
“아무리 야당 잘못이라도 사건 크게 터져 봤자 우리한텐 득 될 게 없어. 결국 나오는 소리는 지금 국방부장관 모가지 잘라라, 방사청장 옷 벗겨라 소리지. 퇴임한 놈들 처벌하라 소리
나오겠소?”
정치는 그렇게 선이 분명한 판이 아니다. 이 정도 비리가 터졌는데 잘잘못을 분명히 가릴 만큼 국민들의 시간이 한가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과거 잘못이었다 한들 책임은 현직자들에
쏠릴 것이다.
준철은 강 의원의 은근한 눈빛이 무얼 요구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거 사건을 더 집중적으로 캐셨으면 하는 겁니까?”
“그래야 공평하지 않소. 좋든 싫든 책임은 우리가 져야 됩니다. 그럼 똥물은 저쪽에 더 튀어야지.”
“의원님……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국민들이 보기엔 그 밥에 그 나물일 겁니다. 누구 잘못을 더 드러내느냐는 그냥 모양새의 차이죠.”
“정치판에선 모양새가 본질보다 중요하오. 야당? 아무튼 집권여당 잘못이라고 전부 매도할걸. 이 사건도 보세요. 그쪽도 당당한 건 없을 텐데 눈 뒤집혀서 우릴 공격해 대잖소.”
한심한 소리가 계속됐지만 어떤 면에선 준철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조사하는 입장에서야 똥이냐 오줌이냐 차이지만, 이들에겐 누가 똥이고 오줌인지가 무척 중요할 것이다. 최근 보여 준 야당의 행보만 보더라도 이들의 반응이 전혀 과민한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조사할 때마다 몇 년도에 일어난 비리인지 출처 분명히 하겠습니다. 전직 관계자들 이름도 적극 거론하겠습니다.”
대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그의 얼굴이 한층 누그러졌다.
“좋소. 근데 조사 수위는 어디까지 할 작정이요?”
“방사청에 한 번 다녀와 봤습니다만, 그쪽에서 자료 협조를 안 하더군요. 압수수색영장 없으면 협조 안 하겠답니다.”
“팀장님 스타일 보니 그거야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받아 낼 것 같고. 구속도 시킬 건가?”
“아직은 계획에 없습니다만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담합 사건은 들키겠다 싶으면 사건 축소 싸움이거든요. 이제부턴 군납 업체들과 방사청 모두 규모를 줄이는 데 혈안이 될 겁니다. 증거인멸 정황이 발견되면 저는 원칙대로 할
계획입니다.”
강 의원에게 원칙이란 단어는 중의적으로 들렸다.
엄정하게 조사를 하겠다는 뜻인 동시에 정치권의 눈치도 보지 않겠단 뜻이다.
“혹시 제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도.”
“눈치 준다고 볼 사람 같지도 않은데 무슨.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단, 현직자들이라서 더 강하게 조사하고, 전직들이라고 봐주면서 조사하는 꼴은 나 못 봅니다.”
“물론이죠.”
“좋소. 그럼 잘 부탁…… 아니, 공명정대한 조사 바랍니다.”
강 의원이 자리를 벗어나자 김 국장의 짧은 탄식이 이어졌다.
“누가 금배지 아니랄까 봐. 부탁한다는 얘기가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구만.”
“그래도 오늘 대화는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강 의원 낌새를 보니 이 사건 덮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게, 성공인가.”
“예?”
“뚜드려 맞던 여당한테 비수 한 자루 넘겨준 거 아니야. 당하고만 있지 말라고. 이젠 여당 놈들도 신나게 가세할 거다.”
아차차. 이 사건은 관여 안 하는 게 최고의 성공이지.
이건 성공이 아니라 재앙이다.
한 번 당했으니 이젠 여당 차례다. 그들은 이 사건이 다년간 이어진 비리라는 걸 어필할 것이고, 최선을 다해 이전 정권에 뒤집어씌울 것이다. 당분간 9시 뉴스엔 온통 국방부
얘기밖에 없을 것이다.
공정위는 이제 그 중심에 서게 됐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우리 이준철 팀장님은.”
국장님의 따가운 눈총이 닿자 준철이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뭐가 죄송하신데.”
“어쩌다 보니 제가 또 여당을 부추긴 것 같은…….”
“그 부분이야 내가 더 죄송하지. 마음 같아선 자네한테 날개라도 달아 주고 싶은 심정이야. 현 군납 업체가 200곳도 넘는다고? 현직자, 전직자…… 이거 원 조사 대상을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구먼.”
“…….”
“그중에 하나라도 봐줬다, 뭐 했다 소리 나오면 안 돼.”
공명정대한 조사.
세상에 이런 조사는 없다. 자기편에 불리하면 편파 조사고 봐주기 조사다. 양당은 또 한동안 이걸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울 것이며, 공정위를 들들 볶아 댈 것이다.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소한 편파 조사란 얘기는 안 나올 겁니다.”
“뭐?”
“언론에 나간 자료만 해도 이미 방사청의 무능이 다 드러났습니다. 만약 현직 관계자들에게 직무유기 혐의를 검토하면, 전직자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겠습니다.”
“부디 꼭 그래 줘. 만약 여당 쪽 인사를 6시간 취조했으면, 야당 쪽 인사도 꼭 6시간 취조해. 여당한테 설렁탕 사 주고 야당한테 육개장 시켜 주면 신문에 대서특필될지도 몰라.”
한 치의 빌미도 주지 말란 뜻이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만 그것만큼 문제 삼기 쉬운 것도 없다. 수사 과정은 물론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도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
“나가 봐.”
준철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자가 김 국장의 푸념이 이어졌다.
“어쩌다 저런 애물단지가 종합국으로 왔나 몰라.”
“국장님 너무 염려 마십쇼. 당분간은 제가 저 녀석 넥타이 색깔도 신경 쓰겠습니다. 그리고 원체 융통성 없는 성격이라 그런 논란에선 오히려 자유로울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걸 걱정하는 줄 아나. 난 이거 중간에서 덮일까 봐 걱정이야.”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 의원이 지금 야당 당사로 갈 수도 있다고.”
“설마…… 여야가 여기서 합의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닌 말로 폭로할 때마다 지들한텐 치명상이야. 양당이 뒤에서 합의를 했으면 했지, 이걸 계속 수면 위로 드러내겠어?”
여야의 극적 타결. 다른 말로 하면 정치 야합.
김 국장의 예상대로 흘러가면 상황은 정말 최악이다. 국방부는 아무 일 없이 정상화될 것이고, 공정위만 미운털 잔뜩 박힌 채 끝나게 된다.
“그래도 이미 야당이 판을 달궈 놨는데 합의가 이뤄질까요.”
“그냥 덮지는 않겠지만 흐지부지될 가능성은 커. 보는 눈이 많으니까 상징적인 처벌로 끝낼 수 있지.”
“하나 마나 한 처벌로 끝내는 거 말씀이십니까.”
“이미 다 훤히 보이지 않나. 깊게 들어가면 양당이 다 치명타 입는다는 거.”
“그럼…… 앞으로 외압이 심해질 수도 있겠군요.”
“아무렴. 처벌 수위가 좀만 세질 거 같다 싶으면 양당에서 매일 전화가 올 거야.”
이번 문제를 계기로 깨끗한 국방부를 만들자…… 라고 생각하는 의원이 얼마나 될까.
자성과 성찰은커녕 드러난 비리를 상대 당에게 뒤집어씌우는 데 혈안이다.
김 국장은 강 의원이 씩씩대며 찾아왔을 때부터 진정성 있는 처벌이 어렵겠구나 싶었다.
지금은 분한 마음에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지만, 나중 가선 저기도 봐주고 우리도 봐달라고 압력을 넣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죄지은 놈들이 이렇게 당당할 수 없다.
“그럼…… 지금 조사는 사실상 요식행위군요.”
“그래. 양당에서 생각하는 ‘적당한’ 처벌 수위가 있을 거야. 우리가 자기들 기준치를 넘는다 싶으면 바로 외압 들어오겠지. 그러니까 오 과장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예?”
“융통성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 놈. 여기다 써먹지 어디다 써먹나? 주변 요소 고려 말고 소신껏 조사하라 그래. 우린 그놈이 앞만 보고 갈 수 있게끔 바람만 막아 준다.”
오 과장은 아연실색했다.
“국장님 제가 아까 앓는 소리를 좀 했습니다만…… 이놈은 진짜 소신이 너무 뚜렷한 놈입니다. 가만 두면 국방부장관까지 날릴 수도 있습니다.”
“잘됐네. 썩은 관행 뿌리 뽑으려면 장관 정도는 갈아 치워야지.”
“……진심이십니까.”
“그럴 마음 없었으면 강 의원 앞에서 나불대지도 못하게 했어.”
“…….”
“내가 경고하고 싶은 건 하나야. 알아서 기지 마. 이 정도면 정치권에서 불편해하겠지, 이 정도면 공정위가 위험해지지 이딴 거 하지 마. 외압은 내 선에서 막는다.”
오 과장은 더 이상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장님은 이미 결심이 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