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여야, 서로를 용서하다 (1)
여당은 대국민 사과문으로 송구스럽단 표현을 세 차례나 언급했지만, ‘하지만’ 이후부터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부조리한 관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방부의 만성적인 무능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사안이 이러한 때에 야당은 오로지 정쟁을 벌이는 데에만 혈안입니다. 이전 정권에서도 같은 비리가 이어져 왔는데 자성과 성찰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피해자인 척
사실을 호도하고, 여론 몰이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하지만 저희는 집권 여당으로서 더 이상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장병들의 식탁을 우롱한 군납 업체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습니다. 이 진상 규명에는
전직자, 퇴임자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저희 여당은 이번 문제를 국방 개혁의 계기로 삼겠습니다.
여당의 도발적인 담화문은 또다시 여의도에 파란을 불러왔다.
발표 직후 야당은 즉각 ‘정치공세’ ‘물타기’라 비판하며 열을 올렸지만, 자신들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선 시원한 해명이 없었다.
-무책임의 극치! 이게 과연 집권당이 할 말인가!
-엄정 수사 촉구! 국방부장관 사퇴!
-엄정 수사 찬성! 과거의 비리까지 모두 진상 규명!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 책임자 모두 엄벌!
SNS으로 전장을 옮긴 양당은 수시로 치고받으며 엄정 수사를 촉구했다.
사실 양당 의원들의 설전은 총기 난사에 가까웠다.
과거 국방부 관계자 및 군납 업체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행적들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여의도 정보통이 좋긴 좋네. 이건 뭐 정식 조사 들어가도 알 수 없는 얘기가 다 쏟아져 나와.”
“그러게요. 사실상 조사는 의원님들이 다 해 주고 계셔. 우리가 딱히 할 일이 있나요?”
반원들은 이 막장 판에 즐거운 비명이 나왔다.
한 치의 수상한 행적이라도 나오면 양당 의원들이 없는 얘기까지 보태서 언론에 떠들어 준다.
덕분에 이미 군납 업체들의 비리 규모가 정리됐으며, 품목이 무엇이었는지도 명확해졌다.
“팀장님. 우리 오늘 방사청 가는 게 의미가 있나요? 지난번처럼 괜히 문전박대나 당하지. 좀만 더 기다리면 양당 의원들이 증거자료도 가져와 줄 것 같네요.”
“오늘은 좀 다를 겁니다. 방사청이 지금 저희 문전박대할 군번은 아니니.”
“근데 자료 압수할 게 또 있습니까? 이미 언론에 다 파다하게 퍼져서 뺏어 올 것도 없는데.”
“아직 저희한테 정식으로 온 건 없잖아요. 그리고 저흰 군납 업체 집합시켜서 입찰 담합을 어떻게 했는지도 들어 봐야죠.”
조사가 수월해졌다고 어깨도 가벼워진 건 아니다. 사실 본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만약 군납 업체들이 허술한 방법으로 담합을 했다면, 담당자의 직무유기도 검토해 봐야 한다. 그때부턴 칼바람이 피바람으로 변하겠지. 어쩌면 더 막중한 임무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반원들이 다시 방사청에 도착했을 땐 한결 협조적인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번엔 구경도 못 해 본 방사청장이 자리에 나와 있었고, 당시 목소리를 높였던 차장 놈은 찌그러진 얼굴로 땅만 바라봤다.
“지난번에 영장을 가져오라 하셔서 자료를 하나도 못 받아 갔습니다. 오늘은 주실 수 있나요.”
방사청장은 옆 편에 있는 사내에게 쏘아붙였다.
“김 차장. 지난 일 정식으로 사과드려. 수사기관에서 정당한 자료를 요구했는데, 그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야.”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때는 결례가 많았습니다.”
속에선 웃음만 났다.
일개 차장이 믿는 구석도 없이 공정위에게 무례하게 대했겠나. 방사청장이 그러라고 시켰으니 수족처럼 움직였겠지.
“모두 나가 봐.”
간부들을 모두 내보내더니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전의 얘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직원 교육을 잘못시켰더군요. 팀장님껜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한데 자료는……?”
그는 옆에 있는 서류 뭉치를 가리켰다.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공정위에서 요구한 10년 치 입찰 자료요.”
“네. 그럼.”
“잠시만요! 팀장님,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거 진짜 다 뒤집어 볼 겁니까.”
“조사 안 할 거면 저희가 왜 준비하라 했겠습니까.”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이 자료 중엔 이미 시효가 지나서 처벌 못 하는 담합도 있습니다. 혹시 정치권 눈치 때문에 이러는 거면 적당히 부탁드립니다.”
준철은 딱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정치권을 누가 설득했는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적당히요?”
“현재 공정위가 담당자의 직무유기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한데 단연코 직무유기는 없어요.”
“그럼 군납 비리가 어떻게 이리 오래 지속된 겁니까?”
“신경을…… 많이 못 썼을 뿐이요.”
“그게 직무유기잖아요.”
“제가 무슨 부탁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직무유기는 담당자의 판단에 따라 혐의를 걸 수도 안 걸 수도 있다. 한마디로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해 달란 부탁이다.
“저희가 무능했습니다. 하지만 고의적이진 않았습니다. 퇴임한 사람들은 봐주시죠.”
“글쎄요. 현재 여야가 엄정 수사를 요구해서…… 무작정 덮기엔 저희가 난감합니다.”
“정치권도 지금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지 막상 일 커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준철이 계속해서 딴청을 피우자 그가 비장한 얼굴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게 제가 보여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진정성이라 생각합니다. 제 사직섭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나든 저는 책임지고 옷 벗을 겁니다. 그러니 남은 직원들이라도 안전하게 해
주십쇼.”
철썩같이 믿던 여당마저 자신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냥 돌린 게 아니라, 바깥에서 몽둥이를 주워 와 곡소리 나도록 쥐어 패고 있었다.
이는 철저히 거리를 두겠단 뜻이며 이제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이게 끝입니까?”
“……예?”
“여당 입에서 국방 개혁 소리 나올 정도로 사태가 커졌는데 겨우 청장님 사퇴 가지고 끝나겠어요?”
최소한 국방부장관의 사퇴 정도는 돼야지.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비리에 연루된 군납 업체, 엄정하게 처벌해 주세요. 두둔할 생각 없습니다. 하지만 직무유기는 결코 아닙니다.”
준철은 무심한 얼굴로 서류 하나를 뽑았다.
잠시 검토하는가 싶더니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직무유기가 왜 없습니까. 이렇게 슬쩍 자료 하나 뽑아 봤는데도 벌써 보이네요.”
“그게 무슨…….”
“전방 사단 두 곳에 납품하는 소시지는 단독으로 입찰을 했네요?”
“그건 규모 1억도 안 되는 소규모 납품이었습니다. 경쟁자가 없어서 입찰자를 정한…….”
“청장님. 공사장에서 함바집 하나 선정하는데도 밥집 수십 곳이 달려들어요. 경쟁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절대로 말이 안 된다. 군납은 명실상부 공공기관 사업으로 기업 이미지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세상에 절실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중소 식품사가 이 기회를 놓쳤을까.
설사 정말로 경쟁자가 없다 하더라도 이건 사업권을 줘선 안 된다. 공공 기관 사업은 철저하게 단독 입찰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1억, 2억짜리가 합쳐져 300억대 비리가 된 거겠죠. 저희는 철저히 원칙대로 조사할 겁니다. 어쩌면 전 현직 관계자들한테 구속영장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구, 구속이라뇨. 그건 무슨 말입니까.”
“새삼스럽게 무슨. 이렇게 단독 입찰해서 사업권 따낸 식품사들, 이게 관계자들 친인척 회사인지 아닌지 누가 압니까. 방사청 직원 모두 저희한텐 요주의 인물들입니다.”
방사청장은 얼이 빠져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이건 겨우 직무유기가 아니라 청탁 관계도 의심하고 있단 거 아닌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달달 떨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공정위한테 자료 내주지 말라고 지시 내렸을 때부터? 아니면 그놈의 국감에서부터?
“혹시 지난번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제가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기억도 안 납니다. 방사청에 사심 없어요.”
“그럼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팀장님. 젊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이건 딱히 정치권에서 원하는 액션이 아닙니다. 여야는 지금 서로 잠깐 감정이 격해졌을 뿐이라니까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서로 발도 빼지 못할 테니.”
“뭐, 뭐라고요?”
“그럼 이만.”
준철은 진정성이 듬뿍 담겼다는 그의 사직서만 남기고 모든 서류를 압수했다.
악감정이 있다면 박성택한테 더 있겠지, 방사청에게 있겠나.
물론 방사청에도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군납 업체한테 바가지당했으면 최소한 품질이라도 좋던가. 납품은 개판이었고, 일선 부대에서 보고된 식중독은 취사병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우기까지
했다.
‘전쟁 나면 간부부터 쏜다더니…….’
전역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맛없는 짬밥 맛은 잊히지가 않는다.
***
-갈수록 가관, 군납 업체 수상한 입찰 143건.
-최소한의 원칙도 어겼다, 그중 23건이 단독 입찰로 밝혀져.
-공정위, 방사청 관계자들의 친인척 회사일 가능성 거론.
-모든 가능성을 열고 조사에 임할 것.
중간 조사 발표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공정위는 방사청의 무능한 업무 처리를 낱낱이 보고하며 또다시 여론에 불을 지폈다. 사실 이건 무능의 범위가 아니었다. 단독 입찰자에게 사업권을 준 건 명백한 위법행위로 사법 처리
대상이다.
공정위는 언론사를 통해 직무유기 혐의를 검토하고 있다 알렸고 전·현직 방사청,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소환장을 날렸다.
-없는 이름이 없네!
덕분에 전직 국방부장관 이름도 알게 됐다. 야당은 깨끗한 척하더니 단독 입찰 건수가 더 많아?
-싸그리 다 조사해라!
이건 무조건 친인척 회사지. 공공기관 사업에 어떻게 기업 단독 입찰이 나오냐? 그것도 23건이나?
발 빠른 언론사는 현직 취사병을 취재해 부실 급식의 실태를 폭로했다. 전역한 예비역까지 찾아가 부식 상태가 얼마나 불량인지 보도했다.
덕분에 9시 뉴스는 온통 국방부 소식으로 도배되었고, 관계자들의 출석 당일엔 생방 보도까지 되었다.
-하실 말씀 없습니까?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습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하실 말씀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렇게 여론이 전부 달아올랐을 때.
여의도 당사에선 아주 내밀한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정위가 기어코 직무유기까지 적용시킬 모양이군.”
“그러게요…… 이건 좀 선을 넘는 거 아닙니까.”
여야 중진 의원들이 모인 자리.
국방부 관계자들이 모조리 다 소환되자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강 의원은 긴 한숨을 내쉬며 박성택에게 말했다.
“박 의원. 저 사람들 처벌되면 결국 우리 얼굴에 침 뱉는 겁니다. 이 싸움 계속하실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