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찢어진 면죄부 (1)
“김 국장, 어째 말씀에 뼈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지나간 일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뭐요.”
“아, 지나갔군요. 저는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꾸 말씀 배배 꼬실 거요?”
약이 바짝 오른 두 사람과 달리 김 국장은 여유로웠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칙대로 하게 해 주십쇼.”
“뭐?”
“세상 모든 범죄는 못 잡아도 눈에 보이는 건 잡아야죠. 군납 업체 담합은 못 덮습니다.”
“누가 지금 그걸 덮어 달래? 처벌은 담합 모의한 업체들로 끝내! 직무유기다 뭐다 해서 관계자들 잡아넣지 말고!”
김 국장은 준철에게 눈을 돌렸다.
“이 팀장. 지금까지 담합으로 의심되는 입찰이 몇 건이야.”
“……총 50건 정도 됩니다.”
“그중에서 단독으로 입찰해서 사업 따낸 놈들은?”
“22건입니다. 파기된 과거 자료까지 조사하면 더욱 늘 수도 있습니다.”
준철의 보고에 두 사람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공공사업은 100만 원짜리 사업도 단독 입찰을 엄격히 금지한다. 그게 벌써 22건이나 발견되었다는 건 최소한의 원칙도 안 지켰다는 뜻이다.
“의원님. 이래도 직무유기가 아닌지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않소. 방사청은 내부 규정 강화하고, 공정위는 군납 업체 처벌해요. 이쯤 해도 충분히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여 주기식 처벌한다 해도 여론의 관심은 못 돌립니다.”
“뭐?”
“국민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지금 이 마당에 군납 업체 과징금이 중요하겠습니까. 그 큰 비리를 방사청이 왜 못 막았는지, 그래서 담당자를 어떻게 처벌할 건지. 모두 다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양당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피 터지게 싸우긴 했겠다, 결과물은 있어야겠다. 그러니 업체들한테 중징계 내리고 국민들 앞에서 생색내고 싶겠지.
“그러니까 우리 뜻대로 하기 싫다는 거군.”
“이해해 주십쇼. 이건 도둑놈 못 잡은 경찰관의 문제가 더 큽니다. 방사청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박성택 의원은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준철을 노려봤다.
“예상대로구먼. 어떻게 일개 팀장이 저리 설치고 다니나 했는데, 여기 든든한 뒷배가 있었어.”
“네. 팀장급이 무슨 권한으로 이걸 조사하겠습니까. 다 제 지시였죠.”
“그럼 그 지시에 대한 대가도 당연히 각오하고 있겠지?”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박성택은 엉덩이를 들었고 이젠 김 국장을 노려봤다.
“공권력 함부로 남용하면 항상 부메랑으로 날아옵디다. 지금은 공정위가 방사청 과거 자료를 털지만 상황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소.”
“뭐 이렇게 공명정대하게 조사하는 걸 보니, 재임 자료가 다 깔끔하신 분인가 봅니다. 앞으로 많이 기대하겠소.”
두 사람은 노골적인 협박을 남기며 자리를 떠났다.
“고약한 양반들이군. 다음 국감에선 내 재임 자료가 터지려나?”
“구, 국장님.”
“됐어. 어차피 내년쯤 은퇴할 생각이었다. 뭐 골프 치러 다니는 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담담한 어투로 말했지만 준철과 오 과장은 이미 사색이 됐다.
재임 자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국장은 수십 가지의 보고를 듣는 자리며, 그중엔 증거불충분, 과장 제보 등으로 진행시키지 않은 사건도 많다.
“딴생각하지 마라. 요즘엔 TV만 틀면 국방부 뉴스야. 우리 이거 빨리 수습해야지. 이 팀장, 검찰한테 면박당했단 얘긴 뭐야?”
국장님의 호통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전직 관계자 두 명과 현직 방사청장을 소환하려 했는데 검찰이 거부했습니다. 직무유기로 판단하기엔 애매하다고…….”
“그게 왜 애매해? 단독 입찰 건이 이렇게나 많은데.”
“모르겠습니다. 뭐라 뭐라 설명하긴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김 국장은 혀를 찼다.
직무유기로 고발을 했는데, 담당자인 검찰도 직무유기를 해 버린다. 무슨 그림인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저 영감들이 또 연줄 동원했구먼. 하루만 기다렸다 다시 해 봐. 그때쯤이면 얘기 다 정리될 거다.”
“알겠습니다.”
“근데 왜 세 명만 소환했어. 10년 치 자료를 다 뒤집었다며?”
“공소시효 남아 있는 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전직자 두 사람과 현직 방사청장. 물론 그 전 사건에 대해선 공소권 없음으로 조사 종결했다고 따로 발표할 계획입니다.”
“그 전직자 두 명은 어느 정권 사람이냐.”
“모두 이전 정권입니다.”
“그럼 뭐 뒷말 안 나오겠네. 말한 대로 진행해. 근데 너무 많은 걸 바라진 마라. 청탁 같은 명백한 비리는 없으니 잘해 봤자 집행유예야.”
준철은 사실 집행유예도 바라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들의 처벌 사례를 살펴보면 무죄로 끝날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이건 무죄도 무죄가 아니다.
두 명의 전직자는 검찰 포토 라인에 서게 될 것이며, 기나긴 법정 싸움을 피할 수 없다. 더 불쌍한 건 현직 방사청장이다. 여론의 관심은 현직자에게 쏠릴 수밖에 없으니 검찰 수사는
물론 그는 불명예 퇴진까지 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쌍한 건 현직 국방부장관이다.
사상 초유의 군납 비리 사건에 장관이 마냥 침묵을 지킬 순 없다. 게다가 그는 국감에서 열렬히 방사청을 두둔한 원죄도 있다.
너무 무능해서 청탁까지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던 사건…….
과연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뭘까.
“또 보고할 거 있나?”
“군납 업체 처벌 정했습니다. 업체 총 47곳에 과징금 300억과 입찰 제한 2년을 부과할 생각입니다. 챙긴 돈에 비해 그렇게 과한 처벌은 아니라 이 정도면…….”
“그건 나한테 따로 보고 안 해도 돼.”
업체들 처벌은 사실 국민들 관심 밖이다. 기업이야 이윤 추구가 목적인 놈들인데 당연히 치사한 짓 많이 했겠지. 하지만 그 도둑놈을 잡지 못했던 경찰관은 참아 주려야 참아 줄 수가
없다.
“아, 예. 알겠습니다.”
“또 있나?”
“없습니다.”
“좋아. 그럼 나가 봐. 당분간 고생 좀 해 주고.”
준철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오 과장이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국장님 정말 이대로 진행하실 겁니까?”
“왜?”
“여야가 합심하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놈들이 재임 자료까지 운운하고 갔는데…….”
“난 또 뭐라고. 오 과장, 뭔 걱정을 사서 하냐.”
“예?”
“저것들 오붓한 시간이 얼마나 갈 것 같아. 한 달? 두 달? 아니, 다음 주도 장담 못 해. 코앞이 선거 날인데 합심은 얼어 죽을.”
선거도 오래 본 거다. 그 전에 비리 사건 터지면 누구보다 열렬히 싸울 사람들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의 요구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국민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덮으면 순장당하겠단 뜻이다. 설사 그런 목적으로 왔으면 좀 공손하게라도 찾아오든가. 공정위를 들러리 취급하던 두 사람 모습이 아직도
괘씸했다.
공무원을 일개 시종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여의도 마인드다.
“그냥 원칙대로 해. 내부 규정을 강화하느니 뭐 하느니 다 책임 회피하겠단 소리야. 윗놈들 모가지 안 날리면 무조건 재발한다.”
“하면…… 어디까지 날리실 계획입니까?”
“그림으로 보면 국방부장관이 사퇴하는 게 맞지. 국감에서 아주 자신만만하게 두둔해 줬잖아.”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문제다. 장관의 거취는 사실상 청와대가 결정한다. 특히나 국방부처럼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이라면 더욱더.
근데 정권의 흠이 될 수도 있는 장관 사퇴를 청와대가 결정해 줄까?
“뭐 너무 깊게 가지 말자고. 방사청장 사퇴로도 상징적인 처벌은 한 셈이니까.”
김 국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서류를 뒤적거렸다.
“근데 생각보다 처벌 수위가 약하네. 입찰 제한 2년이야 당연한 거고 과징금 300억? 저놈이 혹시 나 생각해서 수위 조절한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담당 검사가 소환장 반려시키니 바로 법무부로 뛰쳐가려 하더군요. 직무유기로 담당 검사를 신고한다나 뭐라나…… 법무부 감찰실로 가려던 거 제가 뒤통수 잡고
겨우 끌고 왔습니다.”
김 국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놈이라면 법무부 감찰실뿐 아니라 감사원도 갔을 것 같다.
“사실 처벌 수위도 약한 편이 아닙니다. 얘기 들어 보니 업체들이 너무 많아 최대치로 못 때리고 적당치로 때렸다더군요.”
“역시 일머리는 좋네. 그래, 여러 기업 처벌할 땐 긴 싸움 피하는 게 최고지.”
“네. 이 정도면 군납 업체도 승복할 겁니다.”
김 국장은 서류를 덮었다.
“뉴스만 틀면 국방부다. 이제 얼른 마무리 짓자.”
***
-다음 소식입니다.
연일 군납비리 규모가 커지는 가운데 오늘 공정위가 최종 조사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연루된 업체가 마흔 곳을 넘으며 과징금은 300억을 넘었는데요. 이와 함께 전·현직 방사청장들이
줄줄이 검찰로 소환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정가에선 방사청장의 사퇴설이 돌고 있는데요. 국감에서 방사청을 적극 옹호한 김성남 국방부장관의 거취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 윤성빈 기잡니다.
공정위의 최종 조사 발표 당일.
전직 방사청장 두 명이 나란히 검찰 포토 라인에 섰다.
-한 말씀만 해 주십쇼. 군납 업체 선정에 청장이 관여했습니까?
-단독으로 입찰한 업체만 스무 곳이 넘었습니다. 이건 공공사업 기준의 최소치에도 못 미친 거 아닙니까.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계속됐지만 다행히 두 사람은 전직자들이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상투적인 대답만 할 순 없는 법이다.
오후에 소환된 현직 청장은 아카데미 시상식처럼 모여 있는 기자들 앞에서 긴 원고를 읽었다.
군납 비리는 모두 인정하나 직무유기는 아니었으며, 현 사태에 큰 책임감을 느낀다는 게 골자였다. 그리고 그는 정가에서 떠돌고 있는 사퇴설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여 저는 오늘부로 모든 직을 내려놓고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공식적으로 등장한 첫 사퇴 발표였다.
방사청장에겐 나름대로 비장한 발표였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오늘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게 끝입니까?
-세간에선 장관의 사퇴설도 돌고 있는데요.
“그건 제가 잘 모르는…….”
-그럼 사퇴 결심은 혼자 하신 겁니까, 아님 청와대의 요구가 있었습니까?
-청와대는 현 사태에 대해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없었습니다.
-국방부 장관의 거취에 대해 들은 게 있습니까?
“오늘은 제가 검찰에 출석하는 날…….”
그때, 한 기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선배님! 청와대에서 특별 담화문을 발표한답니다! 2시간 뒤에요. 지금 저희 거기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