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찢어진 면죄부 (2)
특별 담화 48시간 전.
“강 의원님. 아무래도 우리가 호랑이 새끼를 끼운 모양이군요. 사건의 단초를 제공해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우리도 잘한 건 없지. 이제 와 박 의원한테 잘잘못 따질 생각 없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
현 상황은 공정위의 반역이나 다름없다. 여야의 합의를 이렇게 가볍게 무시하다니.
“기어코 전직자까지 소환을 했더구만. 직무유기 검토는 강행할 모양이야.”
“네. 저희 쪽 사람이든 여당 쪽 사람이든 공소시효 남아 있는 건 다 죄를 물 것 같습니다.”
박성택은 잠시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젠 저희도 수습하는 게 어떨지.”
“생각해 놓은 방법이라도 있소?”
“정리할 사람은 정리하시지요. 전직 방사청장 두 명은 어차피 저희 쪽 사람입니다.”
“내치겠다는 건가?”
“네. 이 사건은 국민정서법으로 심판하는 거라 무죄는 무리죠. 저흰 그 두 사람에겐 미리 말해 놓을 계획입니다.”
강 의원 입에서 조그마한 한숨이 나왔다.
진짜 문제는 현직 방사청장이다. 국민들은 어차피 전직 방사청장이 누군지도 모를 테니 조용히 넘어가겠지만 현직자는 무조건 옷을 벗어야 한다.
“그럼 우리도 정리하겠소. 현직 청장이 검찰에 소환될 때 사퇴 발표할 거요.”
“결단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 큰 문제가 남았습니다.”
“뭐? 설마 국방부장관까지?”
“네. 그 선까진 정리해야 국민들의 분노도 가라앉을 겁니다.”
“박 의원 그건 나가도 너무 나갔지! 방사청과 국방부는 검찰과 법무부만큼 서로 독립적인 기관이야. 검사 비리 드러났다고 법무부장관이 사퇴를 해? 좋게 얘기하는 척하면서 슬쩍 당신
사심 끼워 넣는구만.”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김 국방은 국감 때 저와 싸우며 방사청을 두둔했어요. 국민들은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성질이 뻗쳤지만 그 말엔 반박할 수 없었다.
국감에서 박성택을 신나게 쥐어 패며 입지가 상승한 김 국방이다. 그 말이 모두 헛소리였단 게 증명됐으니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강 의원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으며 씩씩거렸다.
이해득실 따지고 보면 여당에 더 불리하다. 집권당이니 당연히 더 큰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는데 영 내키지 않았다.
이를 의식한 듯 박성택 의원이 저자세로 말했다.
“저흰 이 사건 가지고 득 볼 생각 없습니다. 솔직히 발등에 떨어진 불끄기에도 바빠요.”
“우리 불이 더 커. 장관 사퇴하면 야당에서 또 집요하게 물타기 할 것 같은데.”
“저희 당대표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장관 사퇴를 문제 삼지 않음은 물론, 후임 장관 청문회도 조용히 넘어가겠다고.”
“후임…… 장관까지?”
“네. 그러니 청와대만 설득해 주십쇼. 주제넘게 조언 하나 드리자면 김 국방이 직접 사퇴하는 것보다 청와대가 경질시켰다는 인상을 주는 게 더 낫습니다.”
솔직히 김 국방이 똥물 다 떠안고 퇴장해 주면 여·야·청이 다 좋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또 놀랐구만. 고맙소. 야당이 그렇게 진정성 있게 나와 주면 우리도 청와대 설득해 보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김 국장에 대해서 말해 보고 싶은데.”
“김 국장?”
“네. 그 사람은 우리 눈치를 전혀 살피지 않더군요. 참 경악스러웠습니다. 여야의 공동 합의를 이렇게 박살 내다니.”
“어차피 은퇴할 요량인가 보지. 검찰 쪽이면 우리랑 연줄이 닿아서 그렇게 나대지 못할 텐데 그건 아쉽게 됐소.”
검찰이면 부장만 돼도 여의도의 눈치를 살핀다. 여의도에는 사시 출신들이 정말 많고 입김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의도와 공정위의 접점은 찾기 힘들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강 의원님. 그런 놈을 정말 명예롭게 은퇴시킬 겁니까?”
“안 그러면?”
“우리가 당한 수모, 그 이상 돌려줘야죠. 여야의 합의를 무시한 건 반란이나 다름없습니다. 공직 기강을 잡는 차원에서도 가만두면 안 되죠.”
“피차 같은 생각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 김 국장 재임 자료 다 뒤져 봤는데, 이렇다 할 흠이 없더군.”
“큰 사건 작게 만들고, 작은 사건 크게 만드는 게 우리 일 아닙니까. 솔직히 의혹 제기만으로도 얼굴에 먹칠은 해 줄 수 있습니다.”
강 의원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무슨 말인진 알겠소. 하지만 시간을 더 두고 보지. 지금 공정위 건들면 누가 봐도 정치보복이니까.”
“네. 저도 원수는 꼭 기억해 두자는 차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기회 봐서 오늘의 굴욕을 돌려줍시다. 반드시.”
강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그럽시다.”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에 군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20대 청년들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여 국가 안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군납 비리 사건은 경악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해당 사건이 고질적으로 이어져 온 관행이란 점에, 대통령인 저조차 분노를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 정부는 누구보다 엄중하게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으며, 국방개혁의 중요성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이 사태의 책임을 물어 김성남 국방부장관의 사의를 수용하겠습니다.
청와대의 특별 담화는 여야가 물밑에서 협상한 내용에 충실했다.
군납 비리가 오래 이어져 왔다는, 국민들이 이미 다 아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이며, 그걸 바로잡은 것이 바로 현 정부란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각본대로 청와대는 국방부장관을 해임시켰다.
당사자의 입장 표명도 없이 청와대가 먼저 발표해 버린 건 경질을 의미했다. 신문 헤드라인도 모두 사퇴가 아닌 경질이란 표현을 썼다.
특별 담화에 여야는 자신들 진영 논리에 맞게 논평을 냈다.
-현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군 장병들입니다. 이 책임에선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늦었지만 현 정부에서 이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김성남 국방부장관의
사퇴를 처리한 청와대 결정을 존중합니다.
-군 내부 고질적인 문제가 드러났고, 그를 두둔했던 김성남 국방부장관 또한 물러났습니다. 궁극적으로 저희 야당이 국감에서 제기한 문제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이 썩은 관행을
고치는 데 저희 또한 적극 임하겠습니다.
여야는 가볍게 잽을 한 대씩 치고받았지만 그 이상의 도발은 없었다. 각 당 의원들도 함구령을 받고 SNS를 자제했다.
청와대의 깜짝 담화에 가장 충격인 건 공정위였다.
“결국 국방부장관까지 사퇴하게 만들었군.”
오 과장은 살짝 격양된 얼굴이었다.
바랐던 결과의 최대치다. 솔직히 이 정도까진 바라지도 않았었는데.
“검찰은 어때?”
“전현직자 세 명에 대한 취조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일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조사할 의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협조적인가 봐.”
“네.”
청와대의 의지가 반영될 걸까.
검찰도 수사에 적극이었다. 이 정도면 무죄가 아니라 집행유예도 노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준철의 다음 장 서류에 다시 싸늘하게 굳는 오 과장이었다.
“……가서 꼭 이거까지 해야겠냐?”
“지금만큼 적당한 기회가 없습니다.”
“적당은 무슨. 방사청이 하나 마나 한 내부 규정 만들까 봐 단도리하러 가는 거지.”
진짜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이라 이름 붙인 서류는 방사청 내부 규정을 어떻게 뜯어고쳐야 하는지 아주 세세하게 나와 있었다.
“정말 꼭 필요해서 그러는 겁니다. 현재 방사청 납품 규정을 보면 경쟁을 제한하는 규정이 많습니다. 규제 철폐하라고 권유만 하겠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권유는 시정명령이나 다름없어. 각오는 하고 가라. 초상집 찾아가서 염장 지르는 격이니.”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자 오 과장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국장님이 이제 국방부 뉴스 그만 보자신다. 오늘 내로 마무리 지어.”
***
세 번째로 찾아온 방위사업청.
과연 초상집이다.
서류는 널브러져 있었으며 직원들 얼굴엔 짙은 그늘이 묻어났다. 청장과 장관이 동시에 경질당한 초유의 사태이니 표정 관리도 안 될 것이다. 그 원흉인 공정위가 얼마나 미울까.
준철이 도착하니 방사청장 권한대행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전직 청장님들 다 검찰에 계실 텐데, 아직 우리한테 할 말이 남았소? 설마 직무유기 혐의를 우리한테도 적용시킬 건가.”
못 할 것도 없지.
준철이 말없이 서류를 건네자 권한대행은 흠칫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장이나 소환장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보다 더 기분 나쁜 서류였지만.
“……담합을 유발하는 내부규정?”
“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방사청도 내부 규정을 강화한다 들었습니다. 이건 저희가 검토한 경쟁을 제한하는 규정들이에요.”
“아니, 누가 지금 조언해 달라 했습니까. 우리 분위기 빤히 잘 알면서 염장 지르러 왔소!”
“곪은 부분 싹 다 도려냈으니 이제 상처 꿰매야죠. 제대로 봉합 안 하면 상처 또 재발합니다.”
준철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현재 방사청 내부 규정은 입찰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참가 자격 갖춘 선수가 별로 없으니 담합하기도 쉽죠.”
실적이 부족한 중소 식품사에게도 입찰 자격을 줘라, 이것이 첫 번째 바느질이다.
“물론 중소 식품사들의 가장 큰 고민은 돈입니다. 그래서 선납 결제를 제언드립니다. 방사청에서 대금을 먼저 주면 중소기업도 차질 없이 납품할 수 있을 겁니다.”
“선납 결제? 그럼 먹튀당하면 공정위가 책임져 줄 거요?”
“당연히 최소한의 검증은 마친 기업에 한해서죠. 방사청이 그 정도 검증 방안은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시비조로 말했지만 젊은 놈은 미동도 없었다.
“두 번째 제언은 벌점 제도입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 담합의 가장 큰 동기부여는 어차피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거였습니다.”
“그건 입찰 제한이라는 중징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입찰 제한이 끝나고 나서도 일정 기간 벌점을 부과해 주세요. 처벌이 무거울수록 동기는 작아집니다.”
준철은 그렇게 다섯 가지 제언을 덧붙였다.
“이렇게 해 주시길 권유드립니다.”
“뜻은 알겠다만 규정 문제는 생각 좀 해 봅시다. 난 권한대행이요. 정식 총장님이 임명되기 전엔…….”
“그럼 권유가 시정명령으로 바뀔 겁니다. 언론에도 떠들썩하게 나갈 테고요.”
권한대행은 컥컥 기침을 내뱉었다.
“권한대행님. 본인이 사실상 차기 청장이란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한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같은 공직자로서 길게 싸울 생각 없습니다.”
자존심이 무척 상할 것이다. 공정위 조사 하나로 조직이 풍비박산 났으니. 하지만 그깟 자존심 때문에 이 문제 길게 끌고 갈 생각 없다.
권한대행은 긴 생각에 잠기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정위 제언 적극 검토하겠습니다. 내부 규정 개정하는 데 참고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