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어느 하청 근로자 (1)
“벌집을 쑤셔 놨군. 그것도 말벌집.”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죄송하긴 뭘. 자네가 몸소 나서 준 덕에 의원들이 내 욕은 안 하더라. 강 건너 불구경 잘했다.”
김 국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공정위로 직접 찾아왔던 의원들이 위원장이라곤 안 건드렸을까. 아마 수십 통씩 협박 전화를 해 댔을 것이며, 그중엔 청와대의 전화도 있었을 것이다.
조직의 수장이 견뎌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없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그놈인가. 자네가 그때 과장으로 추천한 놈?”
“예. 제가 늘 입에 달고 사는 그놈, 맞습니다.”
“뭐 좋다고 웃어. 박쥐 새끼처럼 양당 이간질시켰다며.”
“덕분에 판 커져서 수습도 못 했습니다. 젊은 놈이 배짱도 좋지 않습니까.”
“내 눈엔 꼴통으로 보이는데 자네 눈엔 배짱으로 보이는가 보군.”
그리 말하며 슬쩍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인사 결정 내렸다.”
“아…… 설마.”
“그 이준철이란 놈 내년쯤 본청 과장으로 보낼 거야. 당사자가 원하면 더 일찍 보내 줄 수도 있고.”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자네에 대한 인사 조치도 지금 논의 중이네.”
국장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인사 검토는 징계 아니면 진급이란 뜻인데, 현 상황에서 진급이 논의될 리 없다.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자네 진짜로 물러날 생각이야?”
“종합국장이 요직도 아니고 제가 올라가면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미련 없습니다.”
“내가 그럼 내일 당장 사직서 가져오라면 가져와 줄 텐가.”
예상치 못했던 물음에 김 국장이 당황했다.
정치권의 외압을 묵묵히 버텨 주신 위원장님이…… 사퇴 압박을?
“위원장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여·야·청와대 세 곳에서 자네 재임 자료를 털어갔네. 정기 감사 핑계를 대긴 했지만 누가 봐도 먼지 찾기야. 그뿐 아니라 자네가 고위 공직자 재산 등록 때 신고한 내용을 갑자기
트집 잡아서 증빙 자료 다시 가져오래.”
정치권이 금융 자료를 손댔다는 건 벼르고 있단 증거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욕보기 전에 은퇴하는 게 어때.”
“…….”
“솔직히 자네가 은퇴 안 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잖아. 옷 벗으면 밑엣놈들한테 화살이 향하니까.”
김 국장은 왜 준철의 진급 얘기가 먼저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본청으로 불러들이는 건 위원장님이 직접 커버해 주겠단 뜻이다.
“그럼 더 꿋꿋이 버텨야겠는데요.”
“뭐?”
“제가 이 자리에서 욕 한 번이라도 더 먹어야 위원장님께 갈 화살이 줄죠. 제 금융 자료 털어 봤자 개털입니다. 월급 타면 마누라한테 생활비 주기 바빴습니다.”
“우습게 보지 마. 양당이 합작하면 없는 죄도 만들 수 있어.”
“그것도 어느 정도 그럴듯해야 먹히죠. 허무맹랑한 얘기 꺼냈다간 역풍 맞습니다.”
그 방면엔 누구보다 전문가들이니 허튼수작 안 부리겠지. 김 국장의 당찬 자신감에 위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정말 죄송한 건 위원장님뿐입니다. 만약 정치권이 계속 저를 압박한다면 그냥 한직으로 보내 주십쇼.”
그리 말하면서도 절대 먼저 물러나겠단 소리는 안 한다.
“하여간 저 황소고집.”
위원장은 결국 엉덩이를 들 수밖에 없었다.
“물 떠다 놓고 빌어, 얼른 선거 날 오게 해 달라고. 싸울 거리 생기면 좀 나아지겠지.”
“두 번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알면 당분간 몸조심하자. 사건 쉽게 풀려고 언론 플레이하고 그러지 마. 그냥 쥐 죽은 듯 있자.”
“네. 흠잡힐 만한 일 안 만들겠습니다.”
위원장은 준철의 인사 결정 서류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
“팀장님. 방사청에서 내부 규정 개정안 넘어왔습니다. 슬쩍 읽어 봤는데, 저희 의견 다 반영한 것 같더군요.”
“그래요?”
“네. 이제 기소 자료만 전부 검찰에 넘기면 됩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자료만 토스하면 되니 식사부터 하시죠.”
군납 비리가 일단락되며 공정위에도 여유가 찾아왔다. 국감도 다 끝난 시기라 여의도 전체가 한산했다.
벚꽃은 어느새 낙엽이 되어 있었고, 드문드문 앙상해진 나무들도 보였다.
정말로 치열했던 국감이다. 보통은 낙엽 떨어지기 전에 다 마무리되는데.
점심을 먹은 반원들은 모처럼 의사당 둘레길을 돌며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여유로운 일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망 사고 최다 공공 기관 대한전력! 각성하라, 각성하라!
의사당 앞에서 한 노년 여인이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왜 시위를 광화문에서 안 하고 의사당에서 해.”
드문 광경에 호기심이 향했지만, 그 호기심은 이내 소름으로 바뀌었다.
[하청 근로자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푯말 위에 젊은 청년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었던 탓이다.
-여러분! 대한전력의 사망 사고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꺼? 5년 동안 40명! 작년에만 8명! 그중에는 등록금 벌어 보겠다고 아르바이트했던 내 자식새끼도 있십니더. 근데 지금까지
대한전력이 책임진 건 얼만지 아십니꺼.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이게 대한전력이 2심에서 직접 한 말입니다. 자신들은 공사 발주자로, 공사를 직접 수행하지 않았다. 안전 준수의 책임은 모두 하청사에 있다! 대한전력 높으신 분들! 이럴 때 책임
회피하려고 하청 썼십니꺼?!
국회 경비대가 달려오자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더욱 가관인 건 나랏님들입니더.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어떻게 국감에서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습니꺼! 대한전력에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던 의원님들은 왜
침묵하셨습니꺼.
“아주머니 그만하세요! 여기 시위하는 곳 아니에요. 그리고 시위할 땐 미리 신고 하셔야 돼요.”
-놓으소! 이런다고 내 여기 다시 안 올 줄 아나. 경찰은 무죄 판결한 판사, 국감에서 문제제기하겠다고 공갈친 국회의원부터 잡아가소.
“……그만 하시라니까요. 제발.”
-나 이렇게는 내 새끼 땅에 못 묻십니더! 여러분, 대한전력이 저승사잡니꺼.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람이 죽어 나갑니더.
그 안타까운 광경을 보며 김 반장이 혀를 찼다.
“어휴- 또 공사비 아끼려다 사람 하나 잡았구만.”
“뭔진 몰라도 좀 불길한데요. 대한전력이면 공공 기관인데…….”
“신경 쓰지 마. 2심까지 무죄 판결 받았다는데 뭔 이유가 있겠지.”
김 반장은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는 준철에게 서둘러 말했다.
“팀장님. 저희 저런 거에 신경 쓸 겨를 없어요. 아직 검찰에 기소 자료 안 넘겼습니다.”
“아, 네.”
“얼른 가시죠.”
그렇게 반원들이 자리를 떴지만 실랑이는 계속됐다.
“그만하세요 어머님. 저희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진짜 안타까우면 나 말고 대한전력 잡아가이소. 그리고 국감에서 문제 제기해 주겠다고 공갈친 신효재 의원! 그 사람도 잡아가이소.”
그때 국회로 출근하는 한 중년 남성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신효재 의원님!”
그녀는 경찰관들의 손을 뿌리치며 그에게 달려갔다.
“대답 좀 해 보소. 왜 국감에서 한마디 말도 못 했습니꺼.”
“아니 진짜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 죄, 죄송합니다 의원님.”
“괜찮습니다. 여기 일 신경 쓰지 마시고 공무들 보세요.”
신효재 의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비대를 물리쳤다.
“저랑 얘기할 땐 분명히 대한전력에 책임을 묻겠다 안캤습니까. 법안 발의도 하고, 3심도 준비해야지예.”
“어머님. 저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봤습니다만 이 문제는 안 되는 겁니다.”
“뭐라꼬예?”
“이미 2심까지 무죄 판결이 났어요. 이런 사건은 대법원 간다고 결과가 달라지지 않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멱살을 잡으며 달려들었다.
“사람이 어떻게 금배지 하나 달았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교!”
주변에 있던 보좌관들이 놀라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 또한 신효재가 제지했다.
“당선되기 전엔 내한텐 그리 말 안 했잖아요. 국감에서 문제 제기하고 대한전력 처벌하자, 더 이상 같은 피해자가 나와선 안 된다! 이거 다 의원님이 했던 말 아닌교!”
“어머님.”
“이제 와 누구 처벌하는 건 바라지도 않십니더. 근데 최소한 이 공사의 최종 책임자는 사퇴해야지! 의원님이 안 하면 내가 할 겁니더. 나 지금 유가족들 만나서 같이 3심 준비하고
있심더.”
“그래서 충분한 책임 보상받으셨잖아요. 그 돈은 잊으신 겁니까.”
신효재의 싸늘한 대답에 그녀의 손이 달달 떨렸다.
“뭐, 뭐라꼬?”
“사망보험금 2억 5천에, 위로금 1억. 도합 3억 5천 받으셨죠?”
“위로금은 업체에서…….”
“하청사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 큰돈을 드립니까. 대한전력에서 전달한 위로금, 어머님께 드리기 좋게 포장한 겁니다.”
“그, 그 돈이 내 새끼 잡아먹은 돈…….”
“그것 말고도 신경 써 드린 것 많습니다. 산재 사망으로 2억 5천이나 지급된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신효재는 맥이 빠져 버린 그녀의 손길을 쉽게 물리쳤다.
“그 돈엔 제 개인적인 미안함도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 국감에서 다루기엔 너무 애매한 감이 있었어요.”
“……처음부터 그짓말이었십니꺼. 국감에서 다뤄 주겠단 거.”
“부단히 노력하다 좌절된 겁니다. 저도 여의도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소리 크게 못 내요. 그리고 군납 비리가 그렇게 크게 터졌는데 어떻게 그 카메라를 이쪽으로 뺏어
오겠습니까.”
그리 둘러댔지만 사실 처음부터 문제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국감에서 시간은 금보다 귀하다. 2심까지 패소당한 사건은 그 어느 의원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국감은 끝났습니다. 어머님도 이젠 일상으로 돌아가세요. 영한 씨도 하늘에서 그걸 더 바랄 겁니다.”
아들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신효재에게 당한 배신감은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를 외면하며 자리를 벗어난 신효재는 보좌관들에게 호통을 쳤다.
“국회 경비대 아주 개판이구만! 여기가 무슨 광화문이야?”
“죄, 죄송합니다 의원님.”
“오늘 당직자들 명단 뽑아서 내 사무실로 가져 와. 허우대 멀쩡한 놈들이 무슨 할망구 하나 못 막아서.”
신효재는 헝클어진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아까 저 여자가 한 말은 뭐야. 저 사람 유가족들 만나고 다녀?”
“예. 알아보니 대한전력 사망 사고 유가족들과 계속 접촉을 하고 있더군요. 시위를 한 번 할 거라곤 했는데…….”
“재판에서 두 번 졌으면 알아먹을 때도 됐는데, 참.”
신효재는 혀를 끌끌 찼다.
“여야가 모처럼 오붓한 시간이야. 이 평화 내가 깨뜨릴 순 없잖아. 당분간 저 여자 좀 주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