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어느 하청 근로자 (3)
“또 그 여자야?”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의사당 앞에서 연일 시위를 이어 가고 있다고…….”
“보상금 다 받고 합의된 일이잖아. 왜 자꾸 뒷다리 물고 늘어져.”
“보상금을 다 반환하겠다 합니다…… 아무래도 3심 갈 것 같습니다.”
최영석 부회장이 인상을 찌푸리자 임원들은 눈길을 피하기 바빴다.
사람 죽는 게 딱히 뉴스거리도 안 되는 세상이다.
일개 하청 근로자 때문에 이렇게 골치 썩을 줄이야.
“홍 사장, 어떻게 생각해?”
“……이미 2심까지 무죄 떨어졌는데 3심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끝까지 가 봤자 저희가 이길 겁니다.”
“부사장은?”
“눈치 빠른 여의도 의원들도 다 손들고 도망간 문젭니다. 국감을 막았다는 건 3심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단 뜻입니다.”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지만 부회장은 시큰둥했다.
“근데 왜 저 거머리 하나를 못 떼어 낼꼬?”
“부회장님 결국 액수의 문제 같습니다. 보상금이 성에 안 차니 계속 뒷다리 잡는 거죠. 만약 뒤에 ‘0’ 하나 더 붙여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조아릴 겁니다.”
“그럼 우린 사람 죽어 나갈 때마다 30억씩 뿌려야겠군?”
“…….”
“아니지, 지금까지 우리 공사판에서 죽은 놈들이 몇 명이더라. 까딱하면 유가족들이 청구서 다시 보내겠는데, 부조금 더 내라고.”
“그 말씀이 아니오라…….”
쾅!
“그따위로 돈 뿌리고 다닐 거면 하청 왜 썼어? 하청이 재하청, 재재하청 쓰는 거 왜 묵인해 줬어! 공사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그 짓거리 한 거 아니야?”
“…….”
“근데 왜 이제 와 책임은 아무도 못 지겠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야?”
사실 이렇게 길게 끌 문제가 아니다.
한 놈만 십자가를 지면 된다. 부회장을 대신해 모든 죄를 뒤집어써 줄, 그럴듯한 임원만 등장해 주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눈치를 줘도 그 희생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어! 다들 나가 봐.”
임원들이 줄행랑치자 부회장의 목소리가 더욱 격양되었다.
“회사를 위해 한 몸 희생하는 게 그리 어렵나. 한평생 회사 돈으로 먹고산 놈들이!”
“…….”
“우리 임원이 공사의 모든 책임지고 형사처벌 받아 줬어 봐. 저 여자가 계속 시위를 했겠어? 저것들이 계속 꽁무니 빼는 건 결국 나더러 책임지라는 소리야.
“고정하십쇼, 부회장님.”
“내가 미련했다. 본부장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입에 절대 담아선 안 될 이름에 비서실장은 사색이 됐다.
“부, 부회장님.”
“자네도 알잖아. 성균이는 이런 일 있을 때 절대 몸 안 사린다는 거.”
익히 잘 안다.
협박을 하든, 회유를 하든 어떻게든 유가족과 합의를 했을 것이다.
그게 통하지 않으면 부회장을 대신해 기꺼이 죄를 뒤집어써 줬을 사람이 김성균이다.
“자업자득인가. 본부장이 어떤 꼴 당했는지 아니까 아무도 안 나서는 건가.”
“……그건 아닐 겁니다. 본부장 사고와 관련한 얘긴 부회장님과 저 외엔 일절 모릅니다.”
“저놈들도 눈치가 100단이야. 내색은 안 해도 내막은 알고 있겠지.”
“부회장님.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묻어 둬야죠.”
비서실장의 만류에 부회장도 넋두리를 그만두었다.
그래, 내 손으로 죽인 놈이다. 안타까워한다고 살아 돌아오지도 않는다.
“자넨 어떻게 될 것 같아. 이거 진짜 3심 가도록 내버려 둬도 돼?”
“홍 사장 말이 맞긴 합니다. 2심까지 무죄였는데 대법에서 뒤집어질 리 없죠. 사실 가장 확실한 건 국회의원들 태도입니다. 국감에서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었는데 모두
나가떨어졌습니다.”
재벌들 망신 주는 걸 가장 좋아하는 놈들이 일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건 재판 결과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이 문제가 여론과 부합하면 이상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우려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자네도 저 여자 시위 구호가 걸리지?”
“예. 사망 사고 최다 공공 기관…… 저 여자가 계속 대한전력을 공격하더군요.”
대한전력은 5년째 사망사고 1위를 놓치지 않는 기관이었다. 대부분 안전 수칙을 위반해 일어난 사고로 공사비 삭감이 주된 요인이었다.
그 때문에 대한전력은 끊임없이 소송을 당해 왔지만 법원은 매 판결마다 대한전력의 손을 들어 주며, 희생자들을 두 번 죽였다.
대한전력을 공사의 발주자로 보고, 공사에 대한 책임이 없다 본 것이다.
“물론 판례가 많으니 저희한테 유리할 겁니다.”
“판례라…… 글쎄, 내가 보기엔 그 판례가 우리한텐 독으로 작용할 것 같은데.”
“예?”
“지금까지 누적되어 온 문제가 한 번에 터지면, 터트린 놈이 독박 쓰는 거야. 솔직히 얼마나 꼬투리 잡기 좋아?”
하청이 하나씩 늘 때마다 공사비가 삭감됐고, 종국엔 그것이 사고로 이어졌다.
가뜩이나 위험의 외주화다 뭐다 떠들썩한 시국에 이건 딱 돌 맞기 좋은 사건이다.
“3심은 무조건 막아야 돼. 안 그래도 이미 이 사건으로 대한전력과 많이 틀어졌어.”
“부회장님…… 그러려면 그 방법이 제일 확실합니다.”
“대타 선수?”
“네. 그냥 저희 임원이 자폭 스위치 누르는 게 가장 깔끔하죠. 현장감독 소홀했다, 하청이 재재하청 쓰는지 몰랐다. 이 두 마디만 검찰에서 시인하면 대한전력도 살고, 저희도
삽니다.”
“그걸 해 주는 놈이 없군…… 어차피 집행유예로 끝날 거, 그걸 해 주는 놈이 없어.”
또다시 김성균 얘기가 나올 것 같자 비서실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부회장님. 그럼 이번 한 번만 회장님께 도움을 청해 보시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양반 심술을 몰라? 은퇴한 지 벌써 3년이나 넘었는데 아직까지 후계자 발표도 안 했어. 유언장 까 보기 전까진 누가 한명 그룹 주인이 될지 몰라.”
불현듯 원망이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만약 최 회장이 후계 구도를 일찌감치 발표했더라면, 이렇게 무자비하게 공사비를 줄이지 않았을 것이다.
방만 경영 때려잡겠단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공사비를 삭감했던가.
“외부 사람도 무섭지만 제일 조심해야 할 건 기석이랑 만석이야. 그놈들은 내가 휘청거리면 바로 이 자리 차지하겠다고 덤빌 거라고.”
“염려 마십쇼. 최 사장과 최 상무 약점은 저희도 많이 쥐고 있습니다.”
부회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비서실장에게 눈을 돌렸다.
“좀만 더 고생하자. 일단 그 여자 한 번 더 만나서 돈으로 합의할 의향 있는지 확인해. 단, 부조금 크게 받는 조건이면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돼.”
“알겠습니다.”
“그리고 관련 기관 계속 주시해. 돈으로 자빠트릴 수 있는 공무원은 무조건 포섭하라고. 부조금은 줄여도 공무원들한테 뿌리는 돈은 안 줄여도 된다.”
공무원에게 뿌리는 돈은 아깝지가 않다. 그 액수만큼 인연이 깊어진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좋은 장학생을 선발할지도 모른다.
“네, 염려 마십쇼.”
꾸벅 인사하고 나온 비서실장은 관련 기관 고위직 명단을 뽑아 들었다. 당분간은 발에 불나도록 뛰어다녀야 할 것 같다.
***
부회장의 지시에 따라 돈으로 구워삶을 수 있는 모든 공무원에겐 장학금이 수여되었다.
있는 죄 덮어 달란 부탁은 공무원에게도 부담이지만, 이미 2심까지 판결이 난 사건 모른 척해 달란 건 크게 어려울 게 없는 부탁이었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 기관인 노동부와 검찰의 침묵만 있다면 게임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판례도 많고 이미 2심까지 결과가 나온 사건 아닌가.
단 하나의 변수가 있다면 해당 사건이 여론과 부합하는 것.
한명건설의 막대한 떡값은 그 주요 변수인 여론을 틀어막는 데 주력했다.
[사망 사고 최다 공공 기관] 누구나 다 이상함을 느낄 이슈였지만 뉴스는커녕 포털 기사에도 한 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변수는 언제는 의외인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뭐? 공정거래위원회?”
“예. 법원에서 재판 자료를 열람했다 합니다.”
“뜬금없이 그놈들이 왜?”
“국회경비대 얘길 들어 보니, 그 여자가 시위할 때 웬 팀장 하나가 접근했다고…… 아무래도 사건을 접수한 모양입니다.”
비서실장은 짜증이 솟구쳤다.
좋게 좋게 다 끝나 가는 마당에 웬 똥파리람.
“대체 어떤 놈이야?”
“종합감시국 소속의 평범한 사무관입니다. 행시 출신이긴 한데 지방대를 졸업했더군요.”
젠장. 이래서 출신 성분 안 좋은 것들과는 상종해서 안 된다.
가진 스펙이 고시 합격밖에 없는 비주류들.
출신을 만회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는 부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지독히 깨닫는다. 아무리 공적을 세워도 출신의 한계를 떨쳐 낼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그냥 신경 끄자. 종합국이면 공정위에서 제일 끗발 떨어지는 부처 아니야. 여기 사실상 민원실이지? 그냥 그 여자가 계속 민원 넣으니까 상대 몇 번 해 준 거다.”
대수롭지 않게 정리하려 했지만 보고자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실장님. 사실 이 담당자가 끗발이 좀 있는 놈입니다.”
“뭐?”
“신상 조사해 보니 굵직한 사건을 여러 건 맡았더군요. 금리인하권 사태부터 군납 비리까지…….”
비서실장은 준철의 신상 자료를 살피더니 표정을 구겼다.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커리어였다. 산재 은폐, 특허 갈취, 담합…… 대기업을 상대해 본 경험이 많으며 결과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좋다.
특히나 거슬리는 건 산업재해 사건이었다.
“대성중공업 산재 은폐를 드러낸 게 이놈이다?”
“예. 그때 고용노동부 직접 찾아가 작업 중지 명령까지 받아 왔답니다. 조선 업계에선 이미 칼잡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마냥 무시할 순 없는 놈입니다.”
비서실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유 과장. 이놈하고 자리 한번 주선해 봐. 내가 직접 만나 봐야겠다.”
귀찮은 거머리가 들러붙었지만 비서실장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비주류 공무원이 어디 이놈 하난가.
지방대 출신의 미친개 검사, 판사, 노조 변호사 모두 상대해 봤다. 하지만 한명 그룹의 힘으로 못 길들인 공무원이 없었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놈이면 목줄 채우긴 더 쉽다. 결국엔 돈 아니면 자리겠지.
비서실장은 별 고민 없이 준철의 신상 자료를 구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