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
17화
한경모비스 (3)
“헉헉- 헉…….”
두통이 지나간 이후, 준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또 그 증상이다.
공정위와 5년 넘게 하고 있는 싸움, 성의 없는 시정안, 대리점들 배신.
이 모두 한경 그룹 임원들의 대화라는 걸 말해 주었다.
‘……법대로 가도 유리하다? 대리점들 입은 확실히 막았다?’
준철은 서류를 다시 첫 장으로 넘겼고, 놈들의 대화와 이를 비교했다.
재검토가 끝났을 땐 준철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공정위는 대리점들에게 5번의 익명투표를 실시했는데, 강매를 당했다고 응답한 비율이 70%를 육박했다.
하지만 구체적 진술을 요구했을 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들 이름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은근히 겁만 줘도 설설 긴다고 했어. 이건 뒤에서 협박하고 있다는 거야.’
수사가 왜 5년이나 끄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한경 그룹이 대리점들 입을 막으며 지금까지 계속 버텨 왔던 것이다.
내밀한 대화를 듣고 나니, 놈들의 동의의결안이 얼마나 도발적인지도 분명하게 보였다.
‘관련자 징계 없고…… 피해자 보상 없고…… 앞으로는 잘하겠다?’
이게 무슨 동의의결안인가?
대리점에 강제 구매 할당량을 없애겠다. 재고 반품 규정을 완화하겠다.
시정안은 이렇듯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 이런 논의 없이 앞으로 잘하겠다는 건 관심 끄라는 말과 다름없다.
‘근데 피해자가 없어. 대리점들이 직접 피해를 호소해야 죄가 성립되는데…….’
-띠리릭.
준철이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박 조사관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팀장님. 이거 진짜 트럭으로 옮겨야 할 정도의 양인데요……? 아무래도 직접 오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심사관 1팀장 박윤수라고 합니다.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죠.”
“예. 처음 뵙겠습니다. 종합감시국 이준철 팀장입니다.”
처음 방문한 심사관 사무실은 탕비실을 방불케 했다.
5년 동안 조사하며 쌓인 수많은 증거 자료가 쌓이다 못해 무너질 지경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 수많은 증거와 압수수색 자료도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무용지물 아닌가?
준철의 눈을 의식했는지 그가 급하게 덧붙였다.
“아, 저 자료 다 가져갈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핵심 자료만 첨부해서 넘겨드리죠.”
“감사합니다.”
“일단 앉으세요.”
자리에 앉은 준철은 주변을 둘러보다 넌지시 물었다.
“한데 혼자만 계십니까? 다른 반원 분들은……?”
“아직 대리점들 돌고 있습니다.”
“아. 피해자 확보 때문에요?”
“예. 보면 아시겠지만 익명투표에선 피해 응답 비율이 70%가 넘는데, 이름을 밝혀 달라 하면 모두 뒤로 숨는 실정입니다. 저희도 그 사람들 찾아다니며 부탁하고 있긴 한데…….”
그는 착잡한 얼굴을 숨기며 다시 물었다.
“현 수사 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서류만 봤습니다. 한경모비스에서 동의의결안을 가져왔다는 것 만요.”
“그건 솔직히 동의의결안도 아닙니다. 그냥 저희를 도발하려는 선전포고문이죠. 이 팀장님께선 납득하실 수 있습니까?”
“관련자 징계 내용과 피해 보상 규정을 애매하게 가져왔더군요.”
“예, 맞습니다. 솔직히 저희도 관련자 형사 입건하고 법원에서 진흙탕 싸움하는 거 원치 않아요. 하지만 회사 내부에서 담당자는 징계하고, 대리점들한텐 피해 보상해야죠.”
“그…… 피해 보상으로 상생기금을 마련하겠다는 방안은…….”
“말도 안 됩니다. 상생기금 300억? 그렇게 큰돈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강매 기록은 대리점 피해가 60억 수준이에요. 이 60억을 피해자에게 ‘돌려주기만’ 하면
쓸데없는 기금 안 만들어도 됩니다.”
관련자 징계.
이걸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다음 후임자가 똑같은 짓을 그대로 한다. 문제가 터지면 회사도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이런 경각심을 줘야 후임자가 대리점에 갑질하지 않는다.
피해 보상.
60억대 강매 기록만 보상하면 된다. 언뜻 보면 300억이 더 큰 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상생기금은 ‘주는 돈’이 아니라 본사가 ‘쥐고 있는 돈’이다. 본사가 자기들 마음대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단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현재 한경모비스 반품 규정을 보면 말도 못 하게 복잡합니다. 물건 하나 반품하는데 변호사가 필요할 수준입니다.”
대리점 갑질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물건 받아 가는 건 쉽게, 다시 반품할 땐 어렵게.
“그럼 그 부분 개정도 필요하겠군요.”
“네. 근데 거긴 저희 희망 사항이고요. 관련자 문책하고, 피해 보상만 제대로 행하면 그 정도는 본사·대리점 자율 규약 하게끔 양보할 수 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하신 말씀, 한경모비스에 제안해 보셨습니까?”
“직접적인 거론은 안 했지만 눈치는 여러 차례 줬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저희가 생각하는 시정안을 한경 그룹에 전달해 보시죠.”
“그게 좀 애매한데…… 이놈들이 피해자 안 나타나니 배 째라 식이에요.”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뭘 할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죠.”
그는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시정안 전달하고, 그 안에서 조율을 해 보시죠.”
“그쪽에서 들어주느냐 마느냐 싸움인데 조율할 게 있을까요?”
“아무리 피해 규모가 명확하다 해도 60억 피해 모두 보상할 순 없을 겁니다. 저희도 하한선을 정하고 액수 정도는 타협해야죠.”
“그냥 말해선 씨알도 안 먹힐 텐데…….”
“당연히 적당한 협박 정도는 필요할 겁니다. 법정 싸움 가면 상생기금 300억이 아니라 과징금 300억을 물겠다, 이런 메시지 정도?”
이열치열이다. 상대가 세게 나오면 더 세게 나가야 한다.
박 팀장은 단숨에 상황을 정리하고, 계책까지 제시하는 준철의 모습에 놀랐다.
솔직히 처음엔 얼굴을 보고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경험 많은 베테랑이 아니라 이제 막 임관한 행시 출신 아닌가?
하지만 방금 이 제안으로 파트너에 대한 우려를 조금 지울 수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쪽과 날짜 한번 잡겠습니다.”
***
입장이 정리된 공정위는 바로 한경모비스로 향했다.
“어서 오십쇼. 한지호 부사장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근데 저희는 최종 담당자를 만나고 싶습니다만 사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관련 사항은 제가 최종 담당자입니다. 제가 직접 지시한 일이기도 하고요.”
준철은 한지호의 빤한 거짓말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부사장은 사장과 승진 싸움에서 밀린 임원이 가는 대표적 한직이다. 어떤 일을 주도하기는커녕 임원회의에서 발언권조차 미미하다.
그리고 불명의 대화를 통해 놈들의 내막을 확인하지 않나?
자신을 최종 책임자라 자처하는 건, 최악의 경우 회장님을 대신해 모든 걸 떠안겠다는 의지로 들렸다.
박윤수 팀장도 이를 알아챈 건지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최종 책임자시다? 그럼 이 동의의결안 쓴 것도 부사장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은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는데, 이쯤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쯤요?”
“의도치 않았지만 저희가 그간 대리점에 한 부당 행위를 인정합니다. 하여 300억가량의 상생기금 마련하여 피해자 보상하겠다는 겁니다. 추후 대리점과 논의 후 반품 규정도 완화할
것이고요.”
박 팀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 말 요약하면 ‘알아서 하겠다.’ 이 말 아니요?”
“계속 그렇게 삐딱하게 들으시면 이 문제 해결 방안 없습니다.”
“방안이 없는 게 아니라, 한경 그룹의 해결 의지가 없겠지. 잘못을 했으면 피해를 보상하고, 관련자를 문책하세요. 최소한의 진정성은 보여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공정위도 직원이 실수하면 사람 내치고 기업에게 보상금 줍니까?”
“뭐요?”
“공권력 남용해서 기업들 괴롭히는 건 처벌 안 하느냐 이 말입니다.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실수는 누구나 해요. 그때마다 사람 내치고 보상까지 다 하면 누가 일하겠습니까?”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번 사건이 혐의 없음으로 끝나면, 그땐 팀장님께서 사표를 쓰셔야겠군요. 원칙과 책임을 중요시하는 분이니까.”
부사장이 몰아붙이자 박 팀장도 시원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은 공정위가 법정 싸움까지 안 가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긴 쪽이 진 쪽에 책임을 물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은 피해자도 확보 못 한 상황이다.
말문이 막힌 박 팀장을 대신해 준철이 조심스레 말했다.
“뭐 그렇게 해서 기업에 피해를 입혔다면 당연히 해야죠. 한데 그건 다른 문제고요. 지금 쟁점은 동의의결안의 진정성입니다.”
“저흰 충분히 진정성 있다 생각합니다만?”
“그럼 관련자를 징계 안 할 이유가 없죠.”
“그 얘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대리점에 갑질한 임원들은 사실상 회사의 암묵적인 지원하에 한 일 아닙니까? 이를 징계 안 하는 건 회사가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후임자도 당연히 똑같은 사람이 오겠죠.”
준철은 그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가 원하는 건 상생기금이 아니라 피해 보상입니다. 돌려줄 건 돌려주고 받아 갈 건 받아 가세요. 저희도 여러 여건들을 고려해 과징금은 부과하지 않겠습니다.”
“뭐요? 과징금?”
그가 되묻자 준철이 서류를 내었다.
공정위가 원하는 처벌 수위를 본 부사장은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졌다.
이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과징금까지 부과하겠다. 그 서류가 곧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대로 안 하면 막대한 과징금까지 때려 버리겠다. 이렇게 들리는군요?”
“그래야 후임자가 같은 잘못 또 안 하죠. 이쯤에서 합의하시면 반품 규정 어떻게 할지는 대리점과 자율 협의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관련 당사자에게 감봉 3개월 조치를 내리겠습니다.”
또다시 성의도 없는 대답이 나오자 박윤수 팀장이 벌떡 일어났다.
“감봉 3개월?! 정직 3개월도 아니고 감봉 3개월? 이보세요, 실장님. 지금 우리 가지고 장난합니까?”
“거 보세요. 우리가 징계 내리면 그땐 또 그 징계 내용 가지고 왈가왈부할 거잖습니까.”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당신들이 우리 신경 건드리면서 도발해 대는 거 모를 것 같아요? 대리점들이 입은 피해가 최소 60억대입니다. 부사장님 눈엔 이 돈이 장난 같습니까?”
그도 지지 않고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징역이라도 시킵니까?”
“해임이나 권고사직! 최소한 그 담당자는 나가게 해야 할 거 아니요.”
“해고? 아주 막가자는구먼.”
“우리 이거 형사 고발하면 실형은 못 받아도 집행유예는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경고 무시하지 말아요.”
“그렇게 자신 있으면 제발 기소 좀 해 주십쇼. 우린 법원에서라도 억울함을 밝히고 싶은 입장입니다. 언제 해 주실 겁니까?”
놈이 그리 묻자 박 팀장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기소 문제를 가지고 처벌 수위를 협상해야 하는데, 놈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