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악연, 시작 (1)
“팀장님 자료 정리 다 끝났습니다.”
“그래요? 그럼 회의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어렵게 열린 회의.
반원들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불편한 감정을 다 감출 순 없었다.
한명 그룹은 대통령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기업이라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한 건드려선 안 될 곳인데, 팀장이 직권조사를 강행해 버렸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해당 사건은 이미 2심까지 무죄 판결이 난 사건입니다. 사실 대한전력의 사망 사고는 한두 건이 아니었습니다. 피소도 많이 당했고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처벌된
사례는 없습니다. 누적된 판례가 많으니 이 사건은 3심 간다 해도 뒤집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저기 저기서 얕은 한숨이 들렸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팀장이면 그렇군요 소리가 담담하게 나올 수 없다. 승소 가능성이 거의 없단 뜻인데 그만합시다 소리가 나왔어야지.
눈총이 쏟아졌지만 준철은 개의치 않으며 회의를 진행시켰다.
“과거 사건은 나중에 다시 파악하고요. 해당 사건부터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네. 은 노후 전선 교체, 전봇대 보수 등 많은 숙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업입니다. 한명건설은 이 사업을 100억에 따냈죠. 한데 이걸 80억에 하청을
줬고, 하청은 재하청, 재재하청을 썼습니다.”
“공사비는 얼마씩 삭감됐습니까?”
“최종 시공자인 영신은 50억에 이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100억에 따낸 공사비도 널널한 돈은 아니었을 거다.
그 돈을 이리 깎고, 저리 깎았으니 사고가 안 터지는 게 이상하다.
“전신주정비사업의 100억은 적절한 공사비였습니까?”
“솔직히 빠듯한 공사비는 아닙니다. 안전 수칙 다 지키고, 숙련된 기술자 썼으면 사망 사고까진 안 일어났을 겁니다.”
“결국 공사비 절감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군요.”
“네. 근데 이놈들이 법정에선 완전 딴소리를 했더군요.”
다음 장 서류는 1, 2심 재판 자료였다.
소극적이던 반원들도 재판 자료를 봤을 땐 탄식과 신음을 쏟아 냈다. 이건 재판이 아니라 고인을 능욕한 부관참시의 현장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모든 책임을 다 사망자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김 반장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근로일지를 보면 영한 씨는 2인 1조로 작업을 나갔다가 혼자 사고를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인 안전 장비도 다 지급된 걸로 나와 있고. 전신주 올라갈 땐 활선차도
대동한 걸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도 안 지킨 안전 수칙을 다 지켰다고 꾸민 겁니까?”
“네. 사고당한 경위도 영한 씨가 독단으로 행동하다 감전을 당했다고 나와 있더군요.”
퇴근 시간을 재촉하다 일어난 사고로 추정, 이게 1심이었다.
“응급실로 실려 왔을 때 면장갑을 끼고 있었답니다. 그건요?”
“업체에선 절연 장갑을 모두 지급했는데, 영한 씨가 덥다고 그 장갑을 자주 벗었다 합니다. 관련 징계 기록도 제출했더군요.”
개인의 부주의로 안전 장비 미착용, 이게 2심이었다.
“활선차는요?”
“유일하게 그 부분은 인정했는데요. 1차 작업 땐 활선차 타고 올라갔답니다. 영한 씨는 2차 작업 때 독단으로 사다리 타고 올라가다 사고를 당했다고…….”
한명건설은 사람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유가족까지 바보로 만들었다.
증거 사진을 끼워 맞추기라 매도했고, 현장에 있는 근로일지 자기들 유리하게 조작했다.
가장 답답한 건 법원이 이에 속아 줬다는 것이다.
사고 후 30분이나 방치됐지만 법원은 이를 증거불충분으로 기각시켰고, 안전 수칙 위반 혐의도 모두 한명건설의 손을 들어줬다.
증거를 중요시하는 법원의 원칙 때문일까, 아니면 한명건설에 포섭된 재판관 때문일까.
“…….”
아직 단정할 순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명건설은 이를 십분 이용할 것이다.
“팀장님…… 이대로 가면 3심은 가나 마나입니다. 근로일지야 조작하면 그만인데, 한명건설에 유리한 자료만 나오겠죠.”
“한명건설도 처벌 못 하는데…… 대한전력은 더욱 못 하지 싶습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준철이 입을 열었다.
“그럼 결국 과거 사건까지 다 끄집어내야겠군요.”
“예?”
“지난 5년간 일어난 사망 사고 40건. 모두 조사해 주세요. 재판까지 간 사건은 어떤 식으로 재판이 이뤄졌는지도요.”
“그게 소용 있겠습니까…… 어차피 똑같은 소리 나왔을 텐데.”
“그럼 법원도 느끼는 바가 있겠죠. 대한전력은 늘 안전 수칙 다 지키는데, 왜 똑같은 사고가 되풀이될까.”
“그래도 모를 놈들…… 아닙니까?”
“그럼 국민들한테도 물어보죠. 누가 잘못한 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원들이 펄쩍 뛰었다.
“팀장님! 설마 또 이걸 공론화시키려고요?!”
“절대 안 돼요. 이미 2심까지 진 사건이라 반전 가능성 없습니다. 오히려 재판 결과에 승복 못 한다고 우리만 질타당할 거예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희 지금 진짜 몸 사려야 될 땝니다.”
“군납 비리 사건 강행하면서 양당을 전부 적으로 만들었어요.”
“우리가 시나리오 주면 야당에서 바람 잡아 줘야 공론화되는 거지…… 우리끼리 한다고 뭐 되겠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준철도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산재 사고 당한 사람이 어디 이 하날까. 뉴스에도 실리지 않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국민들에게 관심을 부탁하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
마음속에서 갈등도 일어났다.
가장 불안한 건 고용노동부 같은 관련 기관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는 거다. 재판 내용을 보면 검찰도 억지로 기소했다는 게 보인다.
천하의 한명건설을, 그것도 2심까지 진 사건을 강행하는 게 맞을까? 내 개인적인 복수심 때문에 반원들을 희생시키는 건 아닐까?
-똑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불청객 한 명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
“무턱대고 찾아와 죄송합니다. 저희 비서실에서 연락을 남겼는데 도통 답이 없으셔서.”
언젠간 만나리라고 생각했다.
부회장의 그림자 수행원이니 당연히 더 먼저 만나자고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예고도 없이 만나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뵙네요. 김명호 실장님.”
“……제가 소개를 했던가요?”
“우리 구면 아닙니까.”
당황해 보라고 던진 말인데, 놈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 그렇죠.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언제 만났는지도 기억하세요?”
“혹시 지난번 합병 심사 때…… 아니면 작년 일감 몰아주기 의혹으로…….”
“기억 안 나면 묻어 둡시다. 부회장님한테 내가 그렇게 중요한 놈은 아니었나 보네.”
살살 약을 올리자 놈의 평정심도 서서히 무너졌다.
난 놈과 그리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한명건설의 두 축인 비서실과 임원진은 치고받는 게 일이었다.
비서실은 주로 부회장의 사생활을 담당했는데, 총애가 심할 땐 업무 보고도 비서실을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원들끼리 십상시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사실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이 분명 나의 죽음과 연관 있다는 걸.
부회장은 지저분한 일을 할 때마다 늘 비서실과 상의했으니, 이놈은 나의 죽음을 몰랐을 리 없다.
“명함 받을 필요 있나요?”
“오해십니다…… 제가 부회장님께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잊어도 부회장님께선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요. 내 신상 다시 파 보면 한명 그룹과의 접점이 나올 겁니다. 한데 오늘은 어인 일로?”
놈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추스르며 말했다.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자면, 대한전력 건 때문에 찾아뵀습니다.”
“대한전력요?”
“법원에서 이미 재판 자료를 열람하신 걸로 압니다. 과거 사건까지 모두 재검토하신다고.”
“한명건설 참 소문 빠릅니다? 그 사건은 내가 아직 과장님께도 보고 안 드렸는데.”
“오해 마십쇼. 유가족들 통해서 알게 된 내용입니다.”
유가족은 얼어 죽을. 이미 내 신상 자료를 수십 번 털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오늘 무슨 색깔 빤쓰를 입었는지도 알겠지.
“팀장님. 이게 사실 겉으로만 보면 냉정한 판단을 하기 힘드실 겁니다. 사망 사고인 만큼 감정이 치우치기 마련이죠. 하지만 사고 경위를 따지면 저희도 억울한 게 많습니다.”
뻔뻔한 것도 여전하구나.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놈을 봤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십니까?”
“재판 보시면 아시겠지만 안전 수칙엔 문제가 없었습니다. 2인 1조로 작업을 했고, 필요한 안전 장비는 모두 갖췄죠.”
“근데 왜 30분간 방치당한 겁니까. 왜 면장갑을 끼고 있었고?”
“그건 당사자가 수칙을 지키지 않았던 겁니다. 당시 작업반장 얘길 들어 보니 업무를 일찍 마치려고 허락 없이 전신주에 올라갔다더군요. 이런 말씀 뭣하지만…… 사망자는 평소에도 복장
지적을 여러 차례 당했다 합니다. 사고 당일도 날씨가 덥다며 절연 장갑을 면장갑으로 바꿔 꼈다고.”
놈은 재판 자료를 내밀었다.
“이런 얘길 꺼내는 저희 입장도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잘잘못은 냉정하게 가려야죠. 법원도 저희 진술을 타당하다 판단했고, 2심까지 무죄 판결 내렸습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놈이 기세를 올렸다.
“팀장님. 전 선한 목적이 늘 선한 결과로 이어진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팀장님께선 선한 목적으로 유가족들을 돕고 싶겠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부추기는 꼴이죠.”
“그런가요?”
“팀장님의 의도를 폄훼할 생각 없습니다. 유가족분들은 지금 감정이 격해진 상태란 걸 알아주십쇼. 그분들께 평생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그룹 차원에서 보상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다 검토하겠습니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그걸 설득했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물론 그 보상 범위에는 팀장님의 노고도 포함입니다.”
“내 노고?”
“불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공정위에서 굉장한 두각을 드러내셨더군요. 하지만 가장 끗발 없는 종합국에 계신 건 결국 출신의 한계라 생각합니다. 저희 한명건설엔 정관계를 망라한 유능한
인적 자원이 많습니다. 필시 팀장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중재를 부탁하더니 스리슬쩍 로비로 넘어간다. 튀어나온 말들을 보니 이미 신상 조사는 다 끝냈나 보다.
“흥미롭네요. 근데 난 원체 겁이 많은 사람이라.”
“부담되시면 퇴직 이후 자리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뒤탈도 걱정 없죠. 참고로 저희 법무팀 이사도 그렇게 인연을 맺었습니다. 공정위 출신이죠.”
“이 제안을 나 같은 말단에게만 하진 않았을 텐데. 또 있습니까?”
“그건 왜 물으시는지……?”
“난 맛있는 떡 안 좋아해요. 안전한 떡 좋아하지.”
“아, 역시 신중하신 분이군요. 사실 고용노동부 쪽에도 저희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보안이 생명이라 이름을 거론하긴 그런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인연입니다.
팀장님의 이름도 외부에 누설되지 않을 겁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놈이 내민 명함을 찢었다.
“이것들이 왜 입을 다물고 있나 했더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