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악연, 시작 (3)
“이젠 선조취 후보고냐? 왜, 나한테 미리 말하면 내가 뜯어말릴까 봐?”
“아, 아닙니다. 사실 이 사건은 진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많았습니다. 신중하게 검토 후 보고드리고 싶었습니다.”
김태석 국장은 준철에게 눈을 흘겼다.
“신중하게 검토해서 도달한 결론은 뭔데?”
“해야 합니다. 재판 자료와 유가족들 진술을 들어 보니 대한전력은 상습범이더군요. 이대로 두면 같은 희생자가 계속 나올 겁니다.”
“마음은 이해한다. 근데 냉정하게 현실적인 부분을 따져 봐야지. 관련 기관은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고, 대한전력은 단 한 번도 패소당한 적 없어. 해당 사건도 이미 2심까지 무죄
판결 받았는데, 대법 간다고 달라져?”
“공론화시키면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준철이 내민 서류 다음 장을 넘겼을 땐 짧은 신음이 나왔다.
“대한전력 간부진 다섯 명에게 영장을 신청하겠다고?”
“예. 사문서위조 혐의로요. 재판 자료를 보면 현장에서 안전 수칙이 다 잘 지켜졌다고 나와 있더군요. 한명건설에서 이 자료를 조작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럼 한명건설 임원한테 영장을 쳐야지.”
“둘 다 할 겁니다. 대한전력도 서류가 조작됐다는 걸 절대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최소가 묵인, 어쩌면 적극적으로 지시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대한전력 임원 다섯 명 구속.
솔직히 가능성 없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법원이 이를 허락해 줄 리 없다. 증거 인멸이네 뭐네 해도 결국 도주의 가능성이 없다고 기각당할 것이다.
하지만 영장 청구 자체만으로도 언론의 주목은 받게 될 것이다. 이놈이 원하는 것도 후자겠지.
“이 팀장…… 이건 솔직히 너무 무모한 거 아니냐. 공론화는 신중해야 돼. 잘못하면 재판 결과에 승복 못 하는 놈이라고 우리가 역풍을 맞아.”
“절대 안 그럴 겁니다. 사망 사고 최다 공공 기관. 저희는 계속 이 점을 어필할 겁니다. 국민들이 느끼기에도 뭔가 이상하다 느낄 겁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는데 단 한 번도 유죄를 받은 적 없다. 안전 수칙 다 지켰다는 말이 얼마나 지독한 거짓말이었는지 국민들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은 국민들 가슴에 얼마나 크게 불을 지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여론이 활활 타오르면 노동부와 검찰도 계속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에휴.”
김태석 국장은 고단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눈에 봐도 스케일이 커질 사건이다. 정치권이 도와주면 많이 수월해지겠다만…… 애석하게도 그 기대는 접어야 한다. 와서 훼방이나 놓지 않으면 다행이지.
김 국장은 옆에 있던 오 과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봐? 아니지, 당연히 될 것 같다 싶으니까 저놈 데리고 나한테 온 거겠지?”
“이런 말씀 뭣하지만 밑져야 본전입니다. 대한전력의 사망 사고가 워낙 많아 공정위에서도 한번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이런 명분이라도 있죠.”
“출구 전략도 다 짜 놨어? 질 때를 대비한?”
“솔직히 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한명이 공사를 100억에 따냈는데 최종 시공자는 50억에 공사를 진행했어요. 이 내막을 알고도 여론이 저흴 욕할까요.”
오 과장도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닌 말로 이건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욕먹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이렇게 구린내 풀풀 나는데, 침묵한 기관들은 함께 도마에 오를 겁니다.”
그걸 만회하려면 관련 기관도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김 국장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서류에 사인을 갈겼다.
“이 팀장. 미리 말하지만 이번엔 금배지들 도움받을 생각 마라. 넌 이미 적이 많아서 그놈들이 똥물 안 뿌리고 가면 다행이야.”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언론에 자료 뿌릴 때 너무 적나라하게 까지 마. 출처가 우리라는 걸 알면 우린 공무원들의 공공의 적 된다.”
“예. 물론입니다.”
김 국장이 서류를 넘겨주자 준철은 허리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
영장 신청은 확실히 약발이 좋은 카드였다.
기각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일단 신청한 것 자체만으로도 언론 보도를 탔으니 말이다.
언론 보도가 반가운 건 덕분에 지금까지 묻혔던 사건이 모두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한명건설의 막대한 로비로 그간 잠잠했던 언론사도 더 이상 침묵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파면 팔수록 새로운 괴담이 쏟아졌고 이들의 막장 실태가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의사당 앞에서는 유가족들의 시위가 열렸다. 그때와 달리 이젠 한 사람의 시위가 아니었다. 의사당 앞엔 기자들이 벌 떼처럼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정황입니다. 원청이 공사를 100억에 따내서 하청한텐 50억에 줬습니다. 공사비가 반으로 삭감됐는데 현장에서 안전 수칙이 어떻게 제대로
지켜졌겠습니까?
-가장 안타까운 건 이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겁니다! 저희 유가족대책위엔 이미 대한전력과 싸우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줄기차게 시정 요구를 해 왔고, 그때
시정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후에 참사는 막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엔 법원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법원은 대한전력의 지위를 ‘공사의 발주자’로 판단하며 현장 사고의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변호해 왔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사태입니다!
“대한전력은 공사의 발주자가 아니다! 공사의 책임자다!”
“법원은 대한전력의 도급 사업주 지위를 인정하라! 인정하라!”
***
대한전력 지사장은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시위 현장을 보며 결국 리모컨을 던졌다.
“김 실장님. 이게 어떻게 된 거요?”
한명 그룹 김명호 실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문제없을 거라 하지 않았소?”
“죄송합니다. 갑자기 공정위가 나설 줄은…….”
“그럼 이제 대책을 내 보시오. 나를 포함한 간부 다섯 명이 모두 영장 심사를 받고 있어. 공사는 당신들이 했는데 쇠고랑은 우리가 차게 생겼다고.”
“……고정하십쇼. 저희도 법률 자문을 받아 봤는데, 그 영장은 발부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예전엔 이거 ‘절대’ 문제 될 리 없다 하더니, 이제는 거의?”
회의실에 모인 다섯 사람의 눈총이 김 실장에게 향했다.
“제가 잘못 말씀드렸습니다. 영장이 발부될 확률은 절대 없습니다. 무조건 기각될 겁니다.”
“지금 누구 가지고 놀아? 이제 와 또 말 바꾸면 우리가 믿겠어?”
“우릴 안심시키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할 게 아니오.”
사태가 너무도 심각했기에 튀어나오는 말들이 곱지 않았다.
“가장 걸리는 건 다른 기관이야. 여론이 저렇게 달아올랐는데 더 이상 침묵할 수 있겠어?”
“고용노동부가 지금 재조사 들어갈 거란 소문이 있습니다. 당신들 진짜 이거까지 막을 수 있어?”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론의 등쌀에 못 이겨 관련 기관이 하나둘 몸을 풀기 시작한다. 검찰에서 갑자기 간부들을 소환해 공사비 삭감 이유를 물었고, 감사원은 임원들 회의록을 요청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건 여론이다.
이제 포털 사이트에 대한전력을 치면, [사망 사고 최다 공공 기관]이 연관 검색어 1위로 뜰 정도였다.
“지사장님. 조금만 더 저희를 믿어 주십쇼. 이미 2심까지 이기며 저희 실력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랑 지금은 여론이 180도 다른데?”
“냄비처럼 잠깐 끓다 곧 팍 식을 겁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저희 이거 국감에서도 막았습니다.”
김 실장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지만 지사장 얼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김 실장. 국감 막아 냈다고 안심하지 마쇼. 분위기 봐선 내일 당장 국정조사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아.”
국감은 정기적으로 있는 행사지만, 국정조사는 필요할 때만 열리는 행사다. 만약 그 우려가 현실이 되면 대한전력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걱정 마십쇼. 국정조사는 여야가 합의해야 열리는데 저희는 고루고루 친분이 많습니다.”
“3심은? 대법관도 아는 사람이 많나?”
“그건…….”
“그쪽까진 닿는 연줄이 없나 보군. 하긴 대법관 구워삶을 실력이었으면 애초에 공정위가 저렇게 설치지도 못했겠지.”
뼈가 담긴 말에 김 실장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 실장. 그냥 우리의 입장은 한 가지야. 한명건설은 이미 우리한테 점수 많이 까먹었어. 전신주정비사업뿐 아니라 앞으로 신도시 세울 때 나오는 일감, 한명건설한테 국물도
없을걸.”
“지, 지사장님 그건.”
“방법은 딱 하납니다. 만회하려면 지금이라도 잘해요.”
“…….”
“더 이상 우리 대한전력에 피해가 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사장은 나가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쪼록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이제부턴 신경 쓰실 일 없을 겁니다.”
김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겨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최악의 말을 들었다. 대한전력은 주택공사, 도로공사 다음으로 건설사에게 일감을 많이 주는 곳이다. 이들을 잃는다는 건 매출에도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다. 지금 당장 대법관들 기수 알아보고 연줄 닿는 사람 섭외해. 아니, 어차피 어려운 부탁 안 할 거야. 우리는 처벌해도 대한전력은 처벌하지 말아 달라, 딱 이거면 돼. 그리고
담당 검사도 닿는 연줄 있나 알아봐. 그놈들한테도 우리만 기소해 달라고 할 거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대한전력만 처벌을 피하면 파국을 막을 수 있지 않나.
지금 당장 회사로 달려가 임원들을 닦달해야겠다. 이젠 이 모든 화살을 받아 줄 화살받이를 선발해야 한다. 그러면 끝이다.
“어? 여기서 뵙네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당신이 왜?”
“저희도 마침 대한전력 임원들 만나려고 왔는데, 먼저 다녀가셨나 보네.”
“뭐?”
“오후엔 고용노동부로 갈 건데. 거기서 또 만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준철이 싱긋 웃으며 대한전력 건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