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구속? 불구속? (1)
대한전력 5인방은 예의 차릴 것 없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최소한 일정은 잡고 오셔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우리 5년 치 발주 자료를 전부 가져갔으면서 무슨 일로 오셨소.”
준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소한 반성하는 시늉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됐다.
“오늘은 자료 압수하러 온 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기회?”
“읽어 보시죠.”
지사장이 눈짓을 보내자 말석에 있는 사내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오?”
“재발 방지 대책입니다. 이걸 수용하신다면 저희도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아니, 재발 방지 대책을 왜 당신들이 만들어! 여기 이건 또 뭐야. 슬쩍 담당자 징계하라고 끼워 놨네?”
지사장은 말없이 준철을 노려봤다. 전신주정비사업은 모두 지사장의 지시로 돌아간다.
면전에 대고 자신의 징계안을 가져온 이 젊은 놈에게 재떨이라도 던지고 싶었다.
“그게 재발 방지 대책의 핵심입니다.”
“뭐?”
“아무도 징계받지 않고 끝나면 재발 방지 대책 같은 건 있으나 마나더군요.”
기업들도 궁지에 몰리면 반성문을 제출한다.
반성문 대로면 더 이상 사망 사고, 갑질, 횡령, 비리가 없어져야 하는데 늘 그렇듯 시간만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 딱히 경각심도 없는 것이다.
“만약 대한전력에서 자정의 노력을 보여 주면 저희도 이 문제 대법까지 끌지 않겠습니다.”
젊은 놈이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들 나가 봐.”
“…….”
“얼른!”
지사장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준철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팀장님. 마침 저희끼리도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방지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귀중한 조언이 되겠군요.”
과연 그랬던 분위기였나?
“하지만 징계 얘긴 좀 당혹스럽습니다. 사정 기관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구는 건 월권처럼 느껴지는군요.”
“제 뜻이 아니라 유가족들 입장입니다. 대한전력에서 자정의 노력을 보여 주면, 상고 포기하겠습니다.”
“팀장님.”
“이 문제를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전신주정비사업의 총책임자인 지사장님이 물러나셔야죠.”
쾅-!
놈은 단 두 마디도 지나지 않아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왜 내가 물러날 문제야. 공사의 총책임은 한명건설에 있어. 대한전력은 발주자지 시공자가 아니라고.”
성질이 뻗쳤다.
공정위가 구속영장을 신청하며 망신을 단단히 샀다. 평소 대한전력의 지사장이 누군지, 전신주정비사업이 뭔지도 모를 사람들이 앞다퉈 손가락질하고 있는 처지다.
그 모든 일이 바로 이놈의 영장신청 때문이었다.
당연히 기각될 게 빤한 영장을 왜 신청했겠나. 그 자체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되고 공론화가 되니 한 것이다.
“판례 많이 뒤져 봤으니 더 잘 아실 거 아니요. 법원이 우리 책임 인정한 적 있습니까? 당신들 이러는 거 결국 재판 결과 승복 안 하겠단 억지요.”
“지사장님. 정말 책임을 못 느끼세요?”
“뭐?”
“판례를 많이 뒤져 봤는데, 볼 때마다 신기하더군요. 매달 같은 방식으로 사람이 죽는데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어요. 나 같으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도로공사, 철도공사 험한 일
하는 공공 기관이 수도 없이 많은데 사망 사고는 대한전력이 1등 아닙니까.”
“그래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여러 번 사과했잖아!”
준철은 그를 경멸적으로 쳐다봤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건 사과는 하겠다, 이게 도의적 책임 아닙니까. 그런 거 필요 없으니 직무적인 책임지세요.”
“벽하고 대화하는 기분이구먼.”
지사장은 준철이 가져온 서류를 찢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갑시다, 대법원. 판례까지 있다는데도 우기면 어쩔 수 없지.”
확실히 공공 기관이 철밥통이긴 한 모양이다.
여느 사기업에선 느껴 볼 수 없는 모욕이었다.
“우리도 할 말 많아. 당신들 무슨 사문서위조 혐의로 우리 임원들 영장 걸었지? 재판 때 제출한 자료가 다 조작됐다고?”
“아닙니까. 근로 일지랑 현장 점검 내용 다 조작한 것 같던데.”
“꼴값 떨지 마. 너 그거 공론화시키려고 일부러 이상한 혐의 건 거잖아. 근데 뒷감당할 수 있겠어?”
지사장은 예의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막말을 쏟아 냈다.
준철은 그 모습이 오히려 편하고 반가웠다.
“이것도 완전 등신이구먼.”
“뭐, 뭐?”
“그럼 안전 수칙 다 잘 지켰는데 사망 사고가 유독 많았겠어? 원청이 반값 하청 데려온 것 자체가 아이러니야. 난 당신 횡령·배임 의혹도 걸 수 있어. 그럴 거면 그냥 하청한테
몇십억 더 주고 일 시켜도 됐잖아.”
이성을 잃은 놈과의 대화는 더 이상 의미 없다.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자 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두고 봐 이 새끼야! 법원이 우릴 구속하는지 마는지! 네가 우리 욕먹게 하려고 영장 친 거 세상이 다 알게 해 주마.”
***
푸닥거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
차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아무리 증거인멸을 강조해도 이런 상황에서 구속수사가 진행되는 건 부질없는 희망이다.
내심 대한전력이 항복하길 바라고 왔지만 놈들의 태도를 보니 그것마저 요원할 것 같다.
“반장님. 영장 발부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어제까지 답변을 주기로 했습니다만 좀 늦어지나 보군요.”
“대답은 언제쯤…….”
“미정입니다.”
벌써부터 불운한 징조가 보인다.
법원이 영장 기일을 미루는 건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마 여론 등쌀에 밀려 고민하는 척하겠지만 결국 기각으로 결론 날 것 같네요.”
김 반장이 말끝을 흐리자 박 조사관이 끼어들었다.
“팀장님. 현실적으로 영장은 단념해야 돼요. 대한전력이 사문서를 위조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잡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판례가 유리한 것도 아니고…… 법원은 당연히 그쪽 편 들겠죠.”
“검찰은 이 사건을 대법원에 가져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우리 편은 하나도 없어요.”
확실히 힘에 부친다.
이 정도로 여론이 달아올랐으면 관련기관이 부랴부랴 불 끄러 나와야 할 텐데.
떡값의 힘인지 불리한 판례의 힘인지 아직도 나서는 놈이 없다.
“구속영장 기각되면 원점입니다. 대법원 판결도 1, 2심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두운 전망이 계속되자 준철이 입을 열었다.
“불구속 수사가 무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장 기각됐는데 유죄받은 사례도 많아요.”
준철도 불안했다.
불리한 것 투성이라 3심을 진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영원히 관행이 뒤바뀌지 않는다.
처음엔 한명건설에 대한 증오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속죄하는 마음이 더 커져 갔다. 김성균으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망 사고를 덮어 왔나.
만약 증오심으로 이 조사를 진행했다면 책임을 한명건설에만 한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보단 속죄가 먼저라 생각했고, 개인적인 생각에도 이 사건은 대한전력 책임이 맞았다.
“고생하시는 거 아는데, 좀만 더 해 봅시다.”
강행하겠단 의지를 내비치자 더는 반론이 나오지 않았다.
“반장님, 잠시 얘기 좀 나눌까요.”
반원들이 올라가자 차 안엔 준철과 김 반장만 남았다.
“검찰 반응이 많이 안 좋습니까.”
“안 좋다마다요. 영장도 원래 안 들어주는 거 우리가 소장을 아예 다 작성해서 바쳤어요. 제발 좀 해 달라고…… 담당 검사가 그 정도면 법원 분위기 딱 나오죠.”
김 반장이 눈치를 살폈다.
“근데 팀장님. 정말 3심 강행하실 겁니까. 혹시 다른 방법은 생각 없으신지.”
“다른 방법요?”
“대한전력이 저렇게 나오는 거 보니 그래도 보상은 확실히 해 줄 모양입니다. 그…… 유가족분들도 차라리 현실적으로 타협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김 반장은 이런 얘길 꺼내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다.
“대한전력 말대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럼 차라리 배상이라도 많이 받는 게 유가족들한텐 나아요.”
처벌을 포기하면 배상은 높아진다.
대한전력은 지금 유가족들에게 백지수표라도 주고 싶을 것이다.
“저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근데 유가족 측에선 이미 배상금을 반환해 버렸더군요. 돈으로 달랠 만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게 목표였으면 국회 앞에서 일인투쟁을
하지도 않았겠죠.”
예전엔 모든 것은 다 돈으로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를 거절하는 건 액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 믿었다.
하지만 믿었던 부회장에게 배신당하고, 가족들까지 잃어 보니 여실히 알겠다. 세상엔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다는 걸.
일확천금을 준다 해도 부회장은 용서할 수가 없다. 만약 놈에 대한 단죄와 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단죄다.
지금 유가족들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배상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처벌은 포기할 수 없겠지. 설사 대한전력 간부들이 집행유예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건 돈과 바꿀 수 없는 가치다.
“괜한 얘길 꺼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얘기였어요.”
이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한다. 불구속 수사로 진행돼도 3심에서 이길 방법 말이다.
“반장님. 이거 시공을 한 하청사는 어디였죠?”
“태영건설의 김태영 사장입니다.”
“우리 그분 한번 만나 볼까요?”
“예? 그 사람은 이미 직무유기로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는데요. 유가족들이 딱히 원망하는 사장도 아니고…….”
김 반장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설마 협조 요청하시려고요?”
“제가 봤을 때 한명건설은 사고 터지자마자 이쪽으로 달려갔을 것 같아요. 근로 일지, 안전 점검 조작하려면 이 사람 협조가 필수죠.”
“그럼…… 만나 봤자 의미가 없잖습니까. 결국 한통속이란 뜻인데.”
“쌓인 게 많을 겁니다. 사실 공사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는데 처벌은 자신 혼자 당했으니.”
“그런다고 도와주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이죠. 만약 이 사람이 법원 자료가 조작됐다고 말해 주면 사문서위조 혐의 빼도 박도 못합니다.”
당연히 그러겠다만 그게 과연 쉬울까.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
“일단 이 사람과 자리 좀 잡아 주세요. 공판 전략은 그때 다시 말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