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대법원 (2)
변호인 얼굴이 쩍 갈라졌다.
방청석에 있는 사람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판사님. 시공사 김태영 사장입니다.”
“증인. 늦은 이유가 뭡니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많이 도망 다녔습니다. 오래 고민한 만큼 오늘은 확신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전과 달리 불안한 얼굴이 아니다. 비장한 각오가 표정에서부터 느껴졌다.
“판사님! 이미 심리(審理)는 다 끝났습니다. 법정에 무단 지각은…….”
“오늘은 고인이 설 수 있는 마지막 재판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증인 출석 인정합니다.”
주심 판사는 변호인들의 이의 제기를 단칼에 무시하며 의사봉을 내려놨다.
김태영 사장은 증인석에 오르며 준철에게 나직이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제가 보고 들은 모든 내용을 가감 없이 말씀드리죠.”
이로써 재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준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묻겠습니다, 증인. 태영건설의 시공비는 얼마였죠?”
“50억이었습니다.”
“대한전력은 이 공사를 100억에 발주했는데, 금액이 크게 다르군요.”
“예. 아시다시피 저희는 재재하청사였습니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 이러면 발주사와 의사소통은 제대로 됐습니까?”
“현장 애로 사항을 전달할 때도 대한전력을 직접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상대측에 불리한 진술은 반복하고 강조해 물어야 한다.
“대한전력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이 말씀이십니까?”
“예. 대한전력은커녕 원청인 한명건설도 제대로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애로 사항도 위로 잘 전달되지 않았겠군요.”
“그렇습니다. 전신주정비 사업은 특성상 위로 보고할 문제가 많음에도 단 한 번도 책임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 꼭 필요한데 묵살당한 요구도 있습니까.”
“예. 한 번은 저희 쪽에서 정전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전봇대가 태풍에 반파돼서 위험한 작업이었죠. 그래서 정전 작업을 요청했습니다만 묵살됐습니다.”
잠자코 있던 지사장이 입을 열었다.
“이의 있습니다, 판사님. 정전 요청을 거부한 건 주민들의 민원 때문입니다. 시공사의 정전 요청을 다 들어주면 오히려 국민들의 불편만 심해집니다.”
준철도 맞받아쳤다.
“민원을 상대하는 것도 대한전력의 역할 중 하납니다. 근로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진행했어야 합니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해당 사건은 정전 요청을 했던 사건이 아닙니다! 증인이 책임을 회피하려 관련 없는 사건까지 들먹이는 겁니다.”
“말씀 삼가십쇼. 이건 대한전력이 현장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증명해 주는 사례입니다.”
“그럼 그 증명을 왜 1, 2심 때는 안 했습니까? 재판장님. 김태영 사장은 모든 안전 수칙을 철저히 지켰고, 대한전력과의 업무 협조도 원활했다 밝힌 바 있습니다. 왜 1, 2심
진술과 다릅니까.”
거기에 대해선 준철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곧 폭탄선언이 등장했다.
“제 진술을 번복하겠습니다. 현장은 안전 수칙을 대부분 지키지 않았고, 대한전력과 소통한 적도 없습니다.”
“증인! 법정에서 진술은 함부로 바꾸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위증도 했습니다. 저는 사고가 터진 직후 근로 일지와 현장 점검 내용을 조작했습니다. 대한전력 임원과 하지도 않은 미팅을 한 것처럼 꾸몄고, 의사록도 꾸몄습니다. 저희가
제출한 내용 모두, 거짓입니다.”
청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양심선언에 피의자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증인……. 방금 한 말은 본인이 처벌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입니까?”
“예, 판사님. 모두 사실입니다. 한명건설의 지시로 저희는 모든 현장 일지를 위조했고, 자재 창고에 안전 장비도 쌓았습니다. 이게 그 증거입니다.”
김 사장은 한명건설과 나눴던 대화 기록을 판사에게 제출했다. 내용은 적나라했다. 몇 날 몇 시에 자재 창고에 안전 장비를 입고시키겠단 내용, 근로 일지를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
그리고 재차 확인하는 치밀함까지.
해당 내용이 법원 프롬프터를 통해 공개되자 청중석이 시끄러워졌다.
-뭐야, 그럼 사문서 위조가 사실이야?
-공정위가 무리한 혐의로 영장 친 게 아니라고?
준철은 기세를 올렸다.
“증인. 비단 한명건설만 이를 지시했습니까, 아니면 대한전력 간부들도 있었습니까.”
“예. 제게 연락해 원청사와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라 했습니다. 맥락상 조작을 도우란 지시로 들렸습니다.”
모든 시선이 대한전력 지사장에게 향했다.
“아, 아닙니다! 그런 적 없었습니다.”
“분명히 있었습니다. 제 통신 자료 조회하면 대한전력 간부와 통화한 내역이 있을 겁니다.”
준철은 판사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비단 이뿐이 아닙니다. 대한전력은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망 사고를 냈습니다. 하지만 서류만 보면 늘 안전 수칙이 다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 내용을 보십쇼.
대한전력이 간접적으로 증거 조작에 가담했다는 게 입증됐습니다.”
준철이 지적한 건 증거 자료 마지막이었다.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대한전력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세요.]한명건설 간부가 그리 문자를 보낸 것이다.
“이건 이미 원청과 대한전력 간에 합의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 증거 앞에선 놈들도 입을 다물었다.
주심 판사는 의사봉을 두드리며 좌중을 정숙 시켰다.
“변호인. 이 자료에 대해 반박할 거 있으면 하세요,”
“…….”
“없습니까?”
수없이 많은 자리를 지키던 변호인 증인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명백한 증거들 앞에 모두 침묵만 지켰다.
“없으면 검찰 측의 구형을 듣겠습니다.”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프롬프터로 향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희생자가 하고 싶은 마지막 말. 준철은 판사에게 고개를 돌려 청중들을 바라봤다.
“판사님, 그리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원청이 따간 공사는 100억이었지만 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을 만나며 반값이 됐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50억에
가능한 공사였다면 업무상 배임을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을 액수입니다.”
“…….”
“삭감되는 과정에서 근로자는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안전 수칙과 안전 장비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대한전력은 사망 사고 최다 기관이란 오명에도 불구, 단 한 번도 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
“하청 근로자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았던 겁니다. 이는 비단 대한전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공공기관은 발주자로 늘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무관심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해칠 수 있는지 우린 이 사건에서 똑똑히 배웠습니다.”
준철이 눈짓을 보내자 검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안전 감독 의무 소홀, 직무 유기,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판단, 대한전력 간부 5인에게 징역 2년을 구형합니다.”
방청석에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해 봤자 집행유예를 구형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구형마저 예상을 뛰어 넘었다.
“변호인 측, 마지막 변론하세요.”
“……존경하는 판사님, 직무유기는 너무 광범위합니다. 사문서 위조는 보통 직접 행동을 취한 사람에게 적용되지, 지시를 내린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위계에 의한 강요다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김태영 사장이 부탁도 하지 않은 일을 직접 지시한 겁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진짜 큰 처벌은 하청사 김태영 사장에게 더 막중하게 부과되어야지요. 대한전력 간부 전원에게 무죄를 요청드립니다.”
김태영 사장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자신은 이 일을 최종적으로 처리한 사람. 저들이 처벌을 받으면 자신도 무사치 못한다. 이미 각오한 일이다.
판사는 잠시 휴정을 선언했고, 뒤로 가서 의견을 나눴다. 이윽고 돌아왔을 땐 무척이나 무거운 얼굴들이었다.
“판결하겠습니다. 해당 사건은 증거 조작이 사실로 드러났단 점에 있어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본 대법원은 1, 2심을 파기, 발주자인 지사장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합니다. 아울러
증거 조작에 적극 가담한 김태영에게도 집행유예를 파기, 실형 1년 6월을 선고합니다. 검사 측은 한명건설에서 이를 누가 지시했는지를 파악한 후 별도 사건으로 재기소하길 바랍니다.”
-땅땅땅
의사봉이 떨어지자 유가족들의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
대법 판결이 역전승으로 끝나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발주자인 대한전력을 공사의 책임자로 인정한 첫 판례다. 이는 다른 공공기관의 입찰 사업에도 기준점이 될 것이다.
기자들은 앞다퉈 유가족들에게 달려갔고, 보도국에 해당 사실을 전하느라 법원이 도깨비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혼란을 틈타 한명건설 관계자와 임원진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떴지만 법정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실형을 예상하셨습니까?
지사장이 수인복을 입고 등장하자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무너진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준다. 오늘 같은 상황은 예상치도 못했다는 걸.
-시공사 사장이 직접 사문서 위조 혐의를 자백했습니다.
-대한전력 측에서도 협박을 한 겁니까?
그는 집요한 질문에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3심에서 이미 확정된 형량이니, 이젠 기자들도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반장님, 유가족분들 일단 저희 사무실로 모셔 주세요. 형사사건에서 이겼으니 이젠 위로금이 아닌 민사로 배상금 받아 내야 합니다.”
“네. 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근데 팀장님은 어디 가시려고요?”
“고맙단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 있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승리였지만 마음이 온전히 편하지 않았다. 사문서 위조를 자백한 김태영 사장도 즉각 구속됐으며 법정을 떠나지 못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땐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컸지만, 지금은 미안한 마음뿐이다.
한명건설에서 일하며 얼마나 많은 죄를 하청 사장에게 뒤집어씌워 봤나.
불법체류자가 적발되면 당연하게 인력사 탓이었고, 산재 사고도 모두 하청사에게 뒤집어씌웠다. 이 모두 일감 협박 한마디면 저절로 해결됐던 일이다.
근로 일지를 조작했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에서 여러 하청사 사장들 얼굴이 스쳤다.
“잠시만요.”
수인복을 입은 그가 호송차에 오르자 준철이 헐레벌떡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