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대법원 (3)
수인복을 입은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그런 심정을 읽었을까.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먼저 인사를 건네주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시간에 와 주셨는걸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법정에서 모든 걸 다 자백하니 후련하군요. 대한전력 대신 내가 처벌 받으면 되는 거라 생각한 제 자신이 바보였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 같다.
“그나저나 아쉽습니다. 지사장 한 명만 처벌이 내려지네요.”
“다 처벌 받는 건 무리였습니다. 가장 윗급이 처벌 받았으니 성공한 거죠. 그리고 이런 사건에 실형은 법정최고형이나 다름없어요.”
그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되길 바랐다.
지시를 내린 놈은 실형 1년. 협박당해 증거를 조작한 사람은 1년 6개월. 그것도 원심에선 시공사인 김 사장만 집행유예를 받았다.
내색은 못 해도 억울함이 클 것이다.
“김 사장님, 이런 말 뭣하지만 오늘 사건은 기념비적인 판례가 될 겁니다. 발주사가 책임을 물은 첫 사례였으니, 앞으로 하청 관행이 눈에 띄게 달라질 겁니다.”
“그렇게 거창한 건가요?”
그는 털털하게 웃으며 준철에게 물었다.
“혹시 제 진술이 더 필요한 부분이 있나요?”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사장님께서 제출하신 대화 기록은 한명건설 홍 사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더 윗선의 지시가 있었느냔 말씀이시군요.”
“네. 한명건설은 구조상 부회장이 모든 지시를 내리거든요.”
확신할 수 있다.
부회장은 단가를 아끼기 위해 콘크리트 업체까지 직접 선별하는 놈이다. 이번 사업이 재재하청까지 갔다는 걸 모를 리 없으며, 증거인멸에도 가장 앞장섰을 것이다.
“이건 최영석 부회장의 묵인, 아니 지시 없인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최영석 부회장과 직접 통화한 적은 없었습니다.”
“정황상 그의 지시처럼 보였다거나…….”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홍 사장이 부회장 이름을 팔며 지시를 내린 적도 없습니다. 제가 드린 대화 기록은 법원에 제출한 게 전부입니다.”
젠장.
역시나 얕은수로는 안 무너지는 건가.
통화 녹취는 물론, 결재 사인에 나와 있는 최종 책임자도 홍영기 사장이었다. 정황상 부회장이 모를 리 없겠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심증.
홍 사장은 최선을 다해 뒤집어쓸 것이며, 부회장은 진부하지만 재판에선 늘 먹히는 변명 ‘몰랐다’만 되풀이할 것이다.
“제 대답이 도움 안 되는 모양이군요. 한명건설은 처벌 못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녹취까지 확보했으니 홍 사장은 곧 기소될 겁니다. 증거인멸을 직접 지시를 내린 사람이니 지사장 이상의 실형이 나올 거예요.”
“그래도 저보단 낮게 나오겠죠?”
농담처럼 말했지만 억울함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결국 이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을 지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1년에서 1년 6개월 사이겠죠.”
“제 형량이 최대치고, 대한전력이 최소치군요. 기왕 그러면 1년 6개월에 가깝길 바랍니다.”
정말 모든 죄를 자백했다는 후련함 때문일까. 아니면 현실에 대한 자조일까.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웃음을 띠며 호송차에 올랐다.
그 모습에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
[속보, 대법원 실형 선고] [뒤집힌 판례, 발주자를 안전 관리 책임자로 인정] [다른 공공기관에 미칠 파장은?]세기의 재판답게 하루하루 속보가 쏟아졌다.
발주사를 처벌한 것도 충격이지만, 이에 실형이 떨어진 건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에 가장 시끄러워진 건 엉뚱하게도 광화문이었다.
-13시간 땡볕 작업! 하청은 기계 인간!
-지하철은 하청 근로자의 피로 달린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10대 건설사는 모두 커미션 장삽니다. 공공기관이 하청 업체와 직접 거래하면 인력과 시간 모두 아낄 수 있습니다!
그간 숨죽여 왔던 하청 노조들이 전국적으로 궐기한 것이다.
이들은 공공기관과 하청의 직계약을 요구하며 100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원청노조에 늘 눈칫밥 먹던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보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청와대 낙하산으로 소문난 공공기관장들도 이젠 이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산재 사망 사고 2위 철도공단은 언론 발표를 통해 하청의 재하청을 엄격히 금하는 조항을 발표했다.
3위인 도로공단은 한술 더 떠 원청의 하청도 금지시켜 버렸고.
농어촌공단은 전국 안전 점검 실태조사를 지시하며 칼바람을 예고했다.
하지만 사건의 주범인 대한전력은 언론에 입장 표명도 할 수 없었다. 한순간에 지도부 다섯 명이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수습할 지사장은 감방에 들어갔고, 이를 대신할 권한대행은 집행유예로 자동 해임……. 그렇게 넘버5가 줄줄이 옷을 벗었다.
초유의 사태 속에 출범한 비상대책위는 소집 이틀 만에 눈물의 반성문을 읽었다.
-전신주 정비 사업은 대한전력의 가장 큰 규모 사업이지만, 규모에 걸맞지 않게 저희들은 무책임했고, 안일했습니다. ……(중략)…….
내부에서 논의한 바, 공사비 삭감이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라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대한전력은 재하청, 재재하청 등을 엄격히 금할 것이며, 직접 시공 원청에 일감이 갈 수
있도록 가산점제를 운용하겠습니다.
또한 자사 직원을 감리사로 파견하여 근로 일지, 안전 점검 등이 제대로 작성되고 있는지 파악하겠습니다.
부득이 하청을 쓸 수밖에 없는 사업이면 그 감리사를 통해 시공사와 대한전력이 직접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유가족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준철은 취조실에 있는 티비를 끄며 물었다.
“어떡하실래요, 홍영기 씨.”
한명건설 홍영기 사장.
솔직히 전생에 나쁜 인연은 아니었다. 그 또한 하청 쥐어짜기의 달인으로 부회장에게 적잖은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다.
비슷한 계통의 사람이라 김성균과 통하는 게 많았고, 번갈아 가며 악역을 맡을 때도 있었다.
“깨끗하게 인정하겠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적대 관계로 마주하니 꼴통도 이런 꼴통이 없다.
“자꾸 이러실 거예요? 이거 홍 사장님 책임 아니잖아요. 더 윗선이 있잖아요.”
“누굴 말씀하시는지.”
“최영석 부회장 말입니다.”
“그 결재 서류를 보십쇼. 부회장님 사인이 있습니까? 모두 제가 지시한 일입니다.”
그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건설 관련 최종 결정권은 모두 부회장에게 있는 거 압니다. 그리고 서류를 보세요. 하청이 재하청, 재재하청 부리면서 공사비 다 깎였는데, 이게 부회장 귀로 안 들어갔어요?”
잠시 말이 막히는 그였다.
하지만 그 또한 취조실 설렁탕 한두 그릇이 아니다.
“네. 모두 제가 지시한 내용이네요.”
“일개 임원이 이렇게 중차대한 일을 결정한다고요?”
“예의는 지켜 주십쇼. 일개 임원이라니.”
“그럼 사문서 위조 지시한 것도 당신 단독 범행이란 거지? 참고로 말하는데 우리 구형은 무조건 3년 이상이야. 여론 반응 보면 못 빠져 나간다는 거 알걸.”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맞습니다. 모두 제가 지시한 일이에요. 달게 받겠습니다.”
반성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구형 아무리 높게 때려 봤자 어차피 상한선은 1년 6개월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변호사들한테 컨설팅 받았을 테니 더 이상의 협박은 의미가 없다.
“짠한 놈.”
준철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해 봐야 퇴직금 몇 푼 더인데 자기 명예를 파는군. 아닌가? 최영석 대신 실형까지 살 정도면 최소 계열사 정도?”
“이보쇼. 왜 자꾸 아무 연관도 없는 부회장님을 걸고넘어지는 거야.”
“결정권은 모두 다 그놈한테 있으니까.”
“그럼 병상에 누워 계신 회장님을 부르지 그래? 그룹 내 모든 결정권은 결국 회장님한테 있어.”
놈이 득의양양 웃었다.
“방금 그 말 자백으로 들어도 되나.”
“뭐?”
“병상에 누워 계신 회장님이 했단 말 말이야.”
“이런 미친놈을 봤나. 크큭. 조사관님,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유도신문으로 당신 걸 거요. 그냥 좋게 말할 때 내 잘못인 걸로 합시다.”
놈이 또다시 웃었다.
퇴직금인지 계열사인진 몰라도 한몫 단단히 챙겨 받은 것 같다.
하긴 징역 1년이 긴 세월도 아니지. 챙겨 받은 돈으로 노후 계획 세우다 보면 출소가 눈앞일 것이다.
“아, 근데 한명건설에 의문의 교통사고 당한 놈 있지 않나? 부회장 대신 죄 뒤집어쓰려다가.”
“뭐, 뭐?”
“그 신문에도 나왔잖아요. 갑질 끝판왕 사망했다고. 모쪼록 몸조심 잘하쇼. 내가 알기론 그쪽 부회장이 썩 믿음직한 사람은 아니야.”
웃음 가득하던 놈의 얼굴이 팍 식어 버렸다. 그래, 그 말을 듣고 네 속이 좋을 리 없겠지.
“어떻게 됐습니까, 팀장님.”
“잡아 처넣어야겠네요, 이놈.”
김 반장은 말투만 들어도 취조실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
“얘기가 잘 안 풀리셨군요.”
“……끝끝내 자기가 한 짓이랍니다. 분명 결정권은 모두 부회장에게 있을 텐데.”
“그럼 형량이라도 높게 받아 내면 되죠.”
준철은 긴 한숨을 쉬며 서류를 내밀었다.
“하늘에 빌어야겠네요. 이 내용 이제 검찰로 이관해 주세요. 저흰 오늘부로 공식 수사 종료입니다.”
애석하지만 끝장을 볼 수 없다.
사문서 위조는 공정위가 고발할 수 없는 범죄로 이젠 검찰의 역량하에 달렸다. 그나마 들끓고 있는 여론이 위안이 된다.
이렇게 살벌하게 국민들이 감시하고 있는데, 봐주기 구형은 하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
김 반장이 물러나고 혼자 있게 되자 여러 생각이 겹쳤다.
‘최영석…….’
새삼 부회장이 얼마나 든든한 방패를 쥐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덮을 수 있는 범죄는 모두 변호사를 통해 덮고, 들킬 수밖에 없는 건 임원을 대신 총알받이로 세워 버린다. 역시나 인의 장막을 넘을 수 없구나.
사실 그놈을 취조실로 부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알고 있는 횡령만 수십 가지이며, 그중엔 임원들이 절대 뒤집어써 줄 수 없는 범죄도 많다.
하지만 모두 내부자만 알고 있는 내용이라 이걸 어떻게 요리할지…….
‘일단 조사하고 내부 고발인 척해? 저놈들 혼란스럽게?’
준철은 취조실 문을 보며 혀를 찼다.
아는 얘기 슬쩍……. 하나만 꺼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