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8
178화
슬쩍, 하나 (1)
“저놈들 완전 꼬리 내린 거야?”
“네. 이 팀장이 과징금 부과했더군요. 총 7천만 원. 대한전력 비대위 측에서 모두 승복하겠다고 알려 왔습니다.”
“독한 놈이네. 이걸 3심에서 뒤집다니.”
“솔직히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비단 두 사람만 예상 못 했던 게 아니다. 2심까지 졌고, 공사 사고를 발주자까지 처벌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여론이 부정적 전망을 내놨을 만큼 대법 판결은 결말이 빤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역전승이 나올 줄이야.
판례가 뒤집힌 것도 놀라웠지만, 실형이 떨어진 건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세기의 재판답구먼.”
“예. 판례 한번 제대로 썼습니다. 얘기 들어 보니 공공기관들 군기가 아주 바짝 들었더군요. 자진해서 감리사를 파견하는 곳도 생겼고, 매주 하청사와 미팅을 잡는 일정도 생겼다
합니다. 중대재해법 이후 최악의 위기란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승리였지만 찝찝한 구석도 있었다.
“한명건설은 사장 놈이 뒤집어썼다고?”
“네. 사문서 위조 지시한 게 모두 자기 잘못이라 하더군요. 누가 봐도 최종 책임자는 최영석인데.”
“이준철이가 가만있어?”
“속을 모르겠습니다. 다른 기업 같았으면 홍 사장한테 자백받아 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지?”
탁-.
김 국장이 서류를 덮었다.
“미련 그만 떨라 그래. 한명그룹이 어떤 놈인데 홍 사장이 자백한다고 되겠어? 부회장 대신 뒤집어써 줄 놈들 줄 섰다.”
“네. 아직 조용한 눈치라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만약 수위 넘는다 싶으면 제가 엄하게 주의를 주려 합니다.”
서류를 덮는 두 사람도 찝찝하긴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런 사건이 부회장 지시 없이 이뤄지진 않겠지. 근로일지를 조작하라 지시 내린 것도 다 부회장의 오더였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처벌이 있고, 없는 게 있다.
밑에 놈이 폭탄 조끼 입고 스위치 누르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애초에 사문서 위조 혐의를 공정위가 오래 끌고 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도 수족들 다 잘려 나갔는데 그놈도 눈치는 보겠지.”
“네.”
“뒷말 나오면 안 돼. 사문서 위조는 검찰 영역이야. 깔끔하게 이관하자.”
국장님이 서류를 건넸다는 건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뜻이다.
“예, 그럼.”
오 과장이 고개를 숙이고 나갈 때, 김 국장이 불렀다.
“참, 오 과장. 그때 얘기했던 진급 문제 말이야.”
“아, 예.”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당사자한테 알려 줘.”
“벌써 발령 결정된 겁니까?”
“다음 달 인사심사 때 정식 발령 날 거야. 세종.”
본청으로 불러들이는 건 최고의 진급 코스를 밟았단 뜻과 다름없지만 축하가 잘 나오지 않았다.
사고는 잘 쳐도 일처리는 확실한 놈, 이 녀석이 주는 재미는 여기서 끝인가 보다.
“두 달도 안 남았으니 미리 말해. 괜히 또 이 기간에 사고 치다가 엎질러지면 안 되잖아.”
“예.”
“고생했다는 말도 전해 주라고.”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온 오 과장은 마음이 이상했다.
이젠 정말 보내 줘야 할 때인가 보다.
***
“설명부터 해 봐. 이게 뭐지?”
이놈에겐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것도 사치인가.
보기만 해도 질식할 것 같은 서류 폭탄에 퉁명스런 말투가 나갔다.
“한명건설의 허위 계열사로 의심되는 회사입니다. 외국계 콘크리트 업체로 신고되어 있는데, 물품 오간 흔적이 없더군요. 부회장이 유령 회사를 세워 횡령한 것 같습니다.”
“이 자식이 누가 그걸 물었냐.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싱가폴로 가서 그 회사를 세우고 온 게 김성균이었으니까.
준철은 그 말 대신 준비한 변명을 꺼냈다.
“이번 한명건설 수사하며 알게 된 자료입니다. 훑어보니 이것저것 나오더군요.”
“이 팀장.”
“예.”
“너 혹시 억하심정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
“무슨 말씀인지…….”
“대충 네 심정 알아. 대한전력 사건, 딱 봐도 최종 몸통은 부회장이겠지. 사정이 저럴 때까지 최종 결정권자가 모르고 있었단 건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별건 수사
쳐 버리면 되겠냐.”
조사하면서 얻은 정보로 별건 수사를 치는 건 사실 치사한 일이다.
“그리고 한명건설의 어떤 자료를 봤기에 부회장 비자금 내역이 나와?”
10년 동안 한명건설을 거쳐 간 시멘트 업체는 열 곳이 넘는다. 그중에 딱 하나 잡아 이걸 부회장 명의의 유령 회사라 의심하는 게 황당했다.
“과장님 자료만 봐주십쇼. 안 이상하십니까?”
하지만 더욱 황당한 건.
이놈이 올린 보고서가 그럴듯하다는 거다.
수많은 시멘트 업체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 세워진 회사였고, 대표자 이름도 이상하다.
“가격 비교표를 봐 주세요. 국내 시멘트 업체한테 산 가격보다 이 거래처가 20%씩 비쌉니다. 물량도 월등히 높아요. 왜 이렇게 비싼 값을 주고 샀겠습니까.”
대기업은 하청들의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곳이지 웃돈 주고 사는 놈들이 아니다. 시멘트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싱가폴에서 사 올 이유도 없다.
“웃돈 주고 납품받고 차액은 부회장 주머니로 갔을 겁니다.”
횡령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상황.
“심지어 PL시멘트는 설립 4년 차밖에 되지 않는 회사인데, 단숨에 한명건설 납품의 30%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회장이 싱가폴에 유령 회사 세우고, 거기다 일감을 몰아줬다?”
“네. 처음부터 비자금 조성이 목적인 회사였습니다.”
오 과장은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무리 들어도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한명건설에 납품하는 시멘트 업체는 모두 중소기업으로 한명건설이 갑 대우 톡톡히 받으며 부려 먹을 수 있는 머슴들이었다.
하지만 싱가폴계 회사 PL에는 유난히 관대했다. 가격을 너무 비싸게 납품받는다. 협상 한 번만 해도 반타작 만들 수 있겠건만, 가격을 깎으려는 시도조차 없다.
심심하면 하청들 집합시키고, 납품 단가 꼬투리 잡는 것들이 왜 갑자기?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이건 베테랑들이 현미경 들고 완전 다 까 봐야 알 만한 내용들인데, 넌 어떻게 그걸 알지?”
“조사하다 알게 된…….”
“시답잖은 변명하지 말고.”
“정말 그게 전부입니다.
오 과장은 혀를 찼다.
어차피 이 이상 추궁한다고 대답을 해 줄 놈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놈 주장대로 자료만 놓고 보면 당장 검찰에 기소해도 손색없었다.
“만약 재가해 주시면 당장 검찰에 기소를…….”
“기다려 인마. 아직 안 끝났어.”
오 과장은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네가 대기업들 장부 한두 번 털어 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다른 대기업도 지저분한 내역 건드렸으면 다 털었을 텐데.”
“……억하심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이번 사태, 반드시 책임져야 할 놈이 빠져나갔으니…….”
“그럼 이번엔 당연히 타깃이 부회장이겠네?”
“네. 사내 비자금 조성은 부회장이 임원들 대타로 내보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맡겨 주시면 제가 제대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과장님이 호의적으로 나와 주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일단 가 봐라.”
“과장님…….”
“아니, 이건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맞아. 사망 사고로 대한전력이랑 한명건설 처벌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딴 놈 치는 건 누가 봐도 표적 수사야.”
준철도 욕심 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놈이 꾸벅 인사하며 물러가자 오 과장이 구시렁거렸다.
“옌장. 진급 소식은 이번에도 못 전했네.”
***
건설 업계에서 한명만큼 단가 후려치기가 심한 곳이 있을까?
기자재 부장 자리를 처음 맡았을 때, 가장 먼저 한 건 원·하청 간담회였다. 물론 이름만 간담회였던 하청들 줄 집합이었지만.
“납품 단가가 이렇게 높은데 어디 공사판 돌아가겠소? 우리 지금 아파트 만드는 거지 벙커 만드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 했는데, 자꾸 누가 시멘트랑 철근
빼돌린단 소문 돕니다. 계속 이렇게 뒷말 나오면 하청 안 쓰고 우리가 직접 할 거요.”
하지만 효과는 늘 좋아서 다음 날 철근, 시멘트 가격이 몇 십 프로씩 떨어지곤 했다. 하청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시멘트 배합을 줄이거나 철근을 줄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공사 하다 무너지지만 않으면.
한명건설은 대량 납품 등을 이유로 이 가격을 하청에게서 무자비하게 깎았다. 하청사에선 인건비만 거의 건져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 시멘트였는데, 한날 부회장이 이상한 말을 해 왔다.
“그러니까……. 유령 회사를 세우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싱가폴에 회사 하나 세울 거야. 다 정리된 얘기니까 이 번호로 연락해서 물량 돌려 봐. 가격은 이걸로 납품 받고.”
숫자를 보자마자 무슨 지시인지 알 수 있었다.
시중 가격보다 20%나 비싼 매입.
이건 부회장의 비자금이란 뜻이다.
“표정이 왜 그래?”
좋을 리가 있나.
기존 하청사들이 납품하는 물품을 서서히 줄이면서 특정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야 하는 일이다.
“……부회장님, 어제까지 하청들 집합시켜서 납품 단가 내리라고 협박했습니다. 근데 비자금 때문에 웃돈 주고 사는 건.”
“이 친구야, 나 좋자고 이 돈 만드는 줄 알아? 내년 아파트 입찰 따내려면 부지런히 정치인들 쫓아다니면서 기름칠해 줘야 돼. 아님 굶어 죽을 거야?”
모두 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는 변명, 전혀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도 한두 푼이지 400억가량 되는 돈은 필요 없다.
부회장은 방만 경영 바로잡기로 주주들의 환심을 샀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나중에 아주 거하게 해 먹었다.
“부회장님……. 시멘트 시세야 어차피 업계 가격이 빤히 있는 건데, 이럼 당국의 의심을 못 피할 겁니다. 그리고 저희 하청사들은 저희 믿고 생산 설비 늘렸습니다. 갑자기 물량을
줄이기 시작하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 반발 줄여 보라는 거 아니야. 서서히 물량 줄이면서.”
하청 사장들의 비명이 들렸다.
원청 하나 믿고 억지로 늘린 생산 설비를 모조리 다 줄여야 한다.
“성균아, 일단 되게만 하자. 어차피 나 이렇게 아낀 돈 다 회사 위해 쓸 거야. 건설이 좀 험하냐? 공사 따내고, 입찰 받아 내려면 여기저기 기름칠 많이 해야 한다. 어차피
들키면 다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어. 나 믿고 해 봐.”
그것이 이 사건을 꺼낸 계기였다. 이건 부회장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횡령이다.
과연 그 약점을 드러냈을 때 놈의 얼굴이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