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슬쩍, 하나 (2)
경쟁정책국 구성길 과장은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대체 가만히 있는 한명건설을 왜 털겠대.”
“편견 없이 자료만 봐 봐. 구린내 술술 나지 않아?”
“대기업 중에 이 정도 구린내 안 나는 놈 없어.”
“그럼 다 잡아 넣자고. 우리도 인력 파견해서 돕지.”
천연덕스런 반응에 구 과장이 끙 앓았다.
한명건설의 수십 개나 되는 납품 업체 중 수상한 거래 흔적이 발견됐고, 20년의 경험상 이건 일감 몰아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이 범죄의 동기다.
“자네들은 지금 최영석 부회장 놈의 비자금 의심하는 거지?”
“그래.”
“그럼 내가 왜 하기 싫다는 건지도 알지?”
“나도 사람인지라 별생각 다 들어. 비자금 빼돌려서 어디다 뿌렸을까, 뒷돈 받아먹은 정치인은 누굴까.”
경험상 이렇게 마련한 돈은 예외 없이 여의도로 흘러갔다. 특히나 건설업계는 모든 인허가권을 정치권이 쥐고 있으니 로비가 빈번하게 이뤄진다.
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고, 머잖아 민감한 이름도 거론될 것이다. 일감 몰아주기로 시작한 의혹이 특검으로 끝날 수도 있다.
“알면 그냥 검찰에 토스해. 같은 비리라도 건설 비리는 스케일이 무지막지하다는 거 몰라?”
“우리가 발을 뺄 수 없는 이유도 가져 왔어.”
“뭐?”
쓱-.
“한명건설이 PL에 일감 몰아주면서 기존 하청들이 다 물갈이 됐나 봐. 우리한테 이미 제보를 다 날렸더군.”
“한데 왜…….”
“무시한 거지. 우리한텐 구질구질해 보이니까.”
특정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면 그 피해는 기존 하청들에게 전가된다. 멀쩡히 잘 납품하다 갑자기 계약 해지를 당하는 건, 죽으란 소리와 진배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공정위 평가는 ‘악의적 제보’.
원청이 하청을 바꿔 보복성 제보를 넣은 것이라 나와 있었다.
“큰 걱정은 하지 마. 위에서 의도적으로 덮은 건 아니니까.”
“……대체 이런 것까지 어떻게 다 조사한 거야?”
“그 친구가 가져왔어.”
갑자기 그 젊은 놈이 감찰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숱한 제보가 들어왔는데 모두 다 덮었다? 악의적 제보가 악의적 유기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구 과장, 우리 진짜 편견 없이 자료만 보자. 국내 시멘트 업체한테도 충분히 납품 받을 수 있는 걸, 무슨 싱가폴 회사한테 받았어. 20%나 웃돈까지 주면서.”
“혹시 품질이…….”
“개뿔. 시멘트에 무슨 특허가 있나, 건설공법이 들어가나. 샘플 확보해서 대조하면 아무런 차이도 없을걸? 이 팀장은 국내 시멘트 업체가 PL에 납품하고, PL이 포장지만 바꿔서
한명건설에 납품한 것 같다더군.”
오 과장은 슬며시 서류를 들이밀었다.
“자네들이 샘플 확보해서 무슨 차이였는지 밝혀 줘. 솔직히 관세청에 전화 한 통만 해도 견적 나오잖아. 싱가폴에서 정말 시멘트 넘어 왔을까?”
“우리가 그거 하면, 자네들이 하청 돌 거야?”
“그래. 어려운 일은 우리가 하지.”
다행인 제안이다. 하청들의 원망과 원성을 다 맞아 주겠다니.
“근데 PL이 부회장 소유의 회사라는 건 어떻게 입증할 거야? 딱 보니 일가친척이나 직계가족 쓴 건 아닌 것 같은데.”
“우리도 믿을 만한 바지사장이라 생각하고 있어. 리처드 팍. 누군진 몰라도 이름부터가 한국인이잖아.”
“한국 사람 같은 거랑, 한국 사람인 거랑 천지 차이다. 이놈한텐 소환장, 영장 아무것도 안 먹힌다.”
오 과장의 입이 처음으로 다물어졌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한국에 있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을 놈한테 영장, 소환장이 무슨 소용 있겠나.
바지사장을 외국 놈으로 세운 것도 이때를 대비한 처사일 것이다.
“바지사장 소환해서 자백 못 받아 내면 사건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럼 좀 돌아가지. 부회장 놈 소환하고, 영장 치고 할 수 있는 망신 다 줄 거야.”
그렇게 불만 지펴 주면 주주들이 알아서 타오를 것이다.
물론 혐의를 다 드러내지 못하면 그 원성이 공정위에 향할 것이고.
“어떻게 할래? 폭탄 스위치는 우리가 누른다. 실패해도 결과는 우리가 책임져.”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구먼. 단, 조건이 있다.”
“말해.”
“우리가 할 일은 부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했다, 딱 거기까지만 밝혀내는 거야. 그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우리 소관 아니다.”
“민감한 이름 나오기 전에 손 떼겠단 뜻이군. 그래, 나머지는 검찰에 넘기자.”
“피해 입은 하청들 구제하는 것도 못 해.”
“걱정 마. 그건 민사로 해결하라 할 거야. 우리야 뭐 과징금만 세게 물리면 그만인 거지.”
말은 쉽게 했지만 오 과장은 확실할 수 없었다.
법조계를 꽉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명건설이다. 그가 아는 이준철은 오만 똥물을 다 밝혀내 검찰이 처벌을 안 할 수 없게끔 만들 놈이다.
“그 약속 꼭 지켜.”
구 과장은 재차 확인한 후 서류를 들었다.
***
조사가 결정되고 난 후.
종합국과 경쟁국의 태스크포스가 즉각 꾸려졌다. 각자 맡은 업무에 따라 종합국은 피해 입은 하청들을 조사했고, 정책국은 PL이란 회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외국계 회사에, 외국 놈 대표라 꽤 오랜 시일이 필요한 일이었다.
“과장님, 이거 보고서가 굉장히 디테일한데요?”
“그 친구가 올린 보고서가 다 들어맞았습니다.”
하지만 정챙국 사람들은 조사 사흘 만에 혀를 내둘렀다.
“PL은 시멘트 업체가 아니라 중개 업소예요. 한국 시멘트회사가 PL에 납품하고, PL이 웃돈 받아서 한명건설에 납품하는 겁니다.”
“그럼 PL이랑 국내 업체 제품이랑 똑같다는 거야?”
“네. 포장지만 바꿔 끼고 그대로 납품한 거죠.”
이렇게 허술할 줄이야.
최소한 싱가폴에 생산 공장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시멘트 재료에 보강재라도 더 넣어 웃돈 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중개업소. 국내 업체에 납품 받아서 포장지만 바꾼 것이다. 최소한의 거짓말도 필요 없다는 한명건설의 위엄일까.
“혹시 그 친구 내부자 고발 받은 거 아닙니까?”
“이 팀장이 처음 제출한 보고서랑, 현재 저희가 추가적으로 알아낸 자료랑 별반 차이 없습니다.”
“이 자료 그대로 검찰에 주면 영장도 바로 나올 것 같습니다.”
구 과장은 긴 상념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혹시 비자금이 어디로 갔는지도 파악했나?”
“그건 못 했습니다. 검찰에 기소하고, 리처드 팍인지 뭔지도 소환해 봐야 아는 문제라…….”
“어찌 됐건 기소는 해야 한단 소리군.”
“네. 근데 한명건설 수주 자료를 보면 수상한 자료가 좀 많습니다.”
“그 얘긴 나중에 다시 하자. 기소만 쳐도 기자들 들러붙을 거야.”
구 과장은 팀장들을 모두 내보낸 뒤 인터폰을 들었다.
“종합국 이준철 팀장 연결해 줘. 아니, 그냥 내 방으로 올라오라 그래.”
수화기를 내려놓자 무수한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리처드 팍은 대체 누굴까. 로비스트일까? 아님 그냥 바지사장일까? 어떤 정당에 얼마만큼의 돈을 가져다 바쳤는지도 문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의아한 건 바로 첫 보고서의 디테일이다.
팀장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정보들. 딱히 관련 경험도 없는, 신입 팀장이 해낸 일이라곤 믿기지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어린 놈 얼굴을 보는데 황당함만 느껴졌다.
“다른 팀장들한테 얘기는 다 들었지?”
“네.”
“먼저 묻자. 자네 이거 혹시 정보원 있나?”
“무슨 말씀인지…….”
“PL제품이 국내 시멘트 업체에서 납품 받았단 건 어떻게 알았지? 자세한 범행 정황은 내부자 아님 알 수 없는데.”
준철은 난감한 얼굴을 보였다.
“그냥 그래 보였습니다.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격이죠.”
“오 과장 말이 사실이군. 그렇게 잡은 쥐가 한 트럭이라고?”
중요한 얘기는 아니라 구 과장의 추궁도 그쯤에서 멈췄다.
“그 좋은 직감을 한 번만 더 써 봐. 리처드 팍이 누굴까?”
“최영석 부회장의 믿을 만한…….”
“뻔한 얘기 그만하고. 자료 세탁한 솜씨가 훌륭하더만, 얘 변호산가?”
리처드 팍, 한국계 미국인 변호사. 건설업계 인수합병 전문가다.
특히나 적대적 인수합병 전문가인 그는 헐값에 건설사를 인수하는 부회장의 취미와도 맞아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다.
“아무리 뒤져도 안 나와. 그놈이랑 부회장이랑 혈연관계는 아닐 것 같아서.”
“예. 미국인 변호사 같습니다.”
“혹시 PL에 대해 더 아는 바 있나?”
“모르겠습니다.”
이 말만큼은 진심이다.
유령 회사를 세우고 일감을 몰아줬지만 김성균이 한 일은, 하청들한테 물량 줄이면서 욕받이 하는 게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돈을 어떻게 세탁했는지, 그리고 그 비자금이 누구에게 흘러갔는지는 부회장도 얘길 꺼내지 않았다.
구 과장은 슬쩍 눈치를 보다 운을 뗐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회장이 비자금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게 한국으로 들어온 것 같거든? 차명 계좌도 몇 건 적발했고.”
해외에서 돈세탁하고 국내로 들여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근데 그 돈 중에 정치인들 기름칠한 돈도 있을 거 같다. 혹시 아는 거 있나?”
“아무래도 건설업과 관련한 공공 기관들이지 않을까요?”
“토지 공사나 지방 시청 말고. 진짜 거물급 말이야.”
“거물급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휘유- 구 과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하청사들 동향은 어때?”
“저희들한테 적개심이 많아 협조 요청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내일이 첫 면담입니다.”
“옌장. 그래도 협조는 해?”
“한명건설과 아직 거래 트고 있는 하청들한텐 거절당했죠. 대부분 다 연 끊어진 하청사들입니다.”
구 과장이 짧게 한숨 쉬었다.
그들은 한명건설에도 감정이 좋지 않지만, 공정위에도 딱히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살살 좀 달래서 얘기해 봐.”
“염려 마십쇼. 이번 사건 잘 해결해서 적당한 배상 받을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좋아. 잘 부탁하네.”
과장실에서 나온 준철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오 과장이 자청하지 않았다면 하청들 상대하는 건 무조건 피했을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호소와 절규를 단칼에 끊은 게 김성균 아닌가.
아마 만나면 다 아는 얼굴들이겠지.
다시 태어난 이후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첫 자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