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슬쩍, 하나 (3)
외국계 회사는 꼬리를 감추기 쉬웠고, 어느 때보다 보안이 생명인 조사가 됐다.
공정위는 숨소리를 죽여 가며 PL의 실체를 파악했다.
입단속을 철저히 한 만큼 언론엔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지만, 한명건설의 정보통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부회장님…… 단순한 회계 내역 감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홍 사장이 구속되며 이미 내부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터였다.
임원들이 초조한 눈빛을 보내자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시멘트 하청사들을 전부 다 모았다고?”
“예. PL시멘트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 알아낸 것 같아?”
“공정위에서 제품 대조까지 해 본 모양입니다. 싱가폴 당국에 연락해 생산 공장도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PL의 물량은 다른 하청사들이 납품한 시멘트들이다. 포장지만 갈아 끼웠다는 것도 적발됐으며, 이걸 한명건설이 웃돈 주고 샀다는 것도 파악된 것이다.
“갑자기 이걸 왜 한다는 거야?”
“지난 대한전력 사건으로 압수한 자료 중에 수상한 자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상도도 없나. 그걸 가지고 별건 사건을 쳐?”
“아무래도 부회장님께서 직접 처벌을 받지 않으니 다른 사건까지 거론하는 것 같습니다.”
보고자가 말끝을 흐리자, 임원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부회장님 이건 저희로서도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명백한 비자금 정황이니…….”
“김 이사, 누가 너더러 총대 메래? 나 자네들한테 책임지라고 할 생각 없어. 이제 됐냐?”
부회장이 격분했지만 임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제2의 홍 사장을 선발하는 자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하청들은 얼마나 모였지?”
“저희랑 연이 끊어진 놈들은 전부 모였습니다. 아마 저희에 대한 앙금이 깊어 조사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까 합니다.”
부회장도 차마 그들을 설득해 보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청사들이 자택까지 찾아와 살려 달라고 빌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부회장은 예외 없이 그들의 절규를 외면했고, 이젠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다.
“김 이사, 그것들 다시 찾아가서 말해. 조용히만 있어 주면 다시 거래 트겠다고.”
“……예?”
“돈을 줘서라도 입 막아. 업체 부도났으면 우리가 다 변제해 준다고 해.”
무식하고 뻔뻔하지만 효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차피 한 푼이 아쉬운 그들이니.
“그것도 안 되면 시간이라도 벌어. 두 달만 버텨 주면 변호사들이 이거 그럴듯한 회사로 만들어 줄 거야.”
아주 완벽한 변명은 못 해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은 받아 낼 만하다.
부회장은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회의를 헤쳤다.
-쾅,쾅,쾅!
한동안 회의실에선 골프채 휘두르는 소리만 들렸다.
***
한자리에 모인 하청사 중엔 아는 얼굴이 더 많았다.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살려 달라 애원했던 사람들……. 죄책감이 머리를 찔렀다.
부회장 대신한 일이라지만 어찌 됐건 그들을 매몰차게 걷어찬 건 김성균이다.
“안녕하십니까. 공정위 이준철 팀장…….”
“서로 인사치레 됐습니다. 우린 왜 부른 겁니까.”
이들은 딱히 공정위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먼저 죄송하단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 번 제보를 보내 주셨는데 저희가 부족해 이제야 조사하게 됐습니다.”
“부족한 게 아니라 덮은 거겠지.”
“당신들한테 우린 그냥 불만 많은 악성 제보자잖아!”
이들도 정관계 인사를 꽉 쥐고 있는 한명그룹의 로비 실력을 안다.
억울할 것이다.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었는데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공무원들은 눈감기 바빴으니.
“다들 그만.”
모두들 격앙된 반응을 보일 때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내도 있었다.
“일단 얘기는 들어 봅시다. 그래도 우리 도와주시러 온 분들 아니오.”
“도와줘? 이미 내 회사는 부도 났고, 난 애 엄마랑 이혼까지 했는데 뭘 도와줘?”
“그게 공정위 책임은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공정위 책임이야! 한명건설이 일감 몰아주기 한다, PL시멘트는 우리가 납품한 물품에서 포장지만 바꿔 판다. 이거 내가 다 제보서에 밝힌 내용이라고.”
“그래서 지나간 일 계속 붙잡고 늘어질 겁니까. 한명건설 처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횐데 놓칠 거예요?”
마루시멘트의 도형석 사장.
과거 부회장의 자택까지 찾아가 한 번만 봐달라고 읍소했던 인물이다. 3년 만에 일감이 90%나 줄며 거의 부도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자에게 변호를 받으니 준철도 낯이 뜨거웠다.
“그건 도 사장님 말이 맞아.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지.”
“도울 건 돕고, 따질 건 따집시다. 지금은 도울 땝니다.”
분위기가 진정되자 겨우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말씀해 주십쇼. 경청하겠습니다.”
“나부터 말하겠습니다! 우린 한명건설한테 10년이나 시멘트를 납품했고, 생산 설비도 늘렸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물량을 줄인대요. 나중에 들어 보니 무슨 업계에서 들어 보지도
못한 곳이랑 한명건설이 거래 텄답디다.”
“우리도 비슷했어. 아니, 내가 알 만한 경쟁사한테 밀려서 물량 줄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아. 듣도 보도 못한 놈한테 일감이 가는데 눈 안 뒤집어집니까?”
“그게 PL입니다!”
그들은 치를 떨며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PL이 납품했다는 상품, 우리 제품에 포장지만 바꿔 납품했어. 그것도 천하의 한명건설한테 웃돈까지 받았더만.”
분기탱천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한명건설은 늘 하청사들을 집합시켜 단가를 한 푼이라도 더 깎아 보려고 덤비던 놈들이다. 그랬던 놈들이 유난히 PL한테만 관대했다.
“그에 대한 증거 자료 가지고 계십니까?”
“한명건설이 바보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하게 넘기진 않았지. 뭐 업체들 여러 개 껴서 꽈배기처럼 꼬더만.”
“일단 주십쇼. 저희가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거래 날짜와 물품 인수인계 시점이 담긴 증거 자료들을 모조리 주었다.
“근데 이거 드린다고 되는 겁니까? 한명건설에 차고 넘치는 게 변호사일 텐데.”
“그놈들은 지저분한 흔적들 지우는 게 일 아니오.”
“우리가 이렇게 넘긴 정보, 다 과대망상으로 매도할 것 같은데.”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미 제품 대조 끝났습니다. 여기 계신 하청사들 물품과 다 일치하더군요.”
“뭐, 뭐예요? 진짜?”
“네. 저희 사실 이미 많은 걸 준비하고 오늘 찾아뵌 겁니다. 검찰에 기소되면 곧 언론에도 떠들썩하게 날 겁니다.”
생각해 보면 뻔했다.
이걸 지금까지 당국이 모르고 있었단 게 바보 같은 일이지.
“아니, 이게 어떻게 일사천리로 돼?”
“제보 자료 보다가 저희 말 믿어 주기로 한 겁니까?”
피식 웃음이 난다.
그걸 설계한 게 김성균 본인이었으니 말이다.
“네. 실력 좋은 팀장님께서 껍데기만 갈았다는 거 알아채고 조사 진행한 겁니다.”
“하……. 허탈하네. 그 사람 없었으면 영영 못 밝혀졌던 겁니까?”
“언제든 임자 만나서 다 드러났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얘기도 있어요.”
모든 이목이 준철에게 쏠렸다.
“리처드 팍. PL시멘트의 바지사장을 소환해야 하거든요.”
“그건 왜?”
“이 사람이 부회장의 회사였단 걸 자백해 줘야 상황이 가장 빨리 끝납니다.”
“아니, 그럼 빨리 잡아들여 주세요.”
“이름 들으면 알다시피 미국인입니다. 회사 국적은 싱가폴이고.”
한탄이 나왔다. 결국 한국 법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뜻이다.
“그럼 이거 글렀네.”
“아니요. 그래도 여러분들의 증언이 있으면 풀릴 수도 있어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한명건설의 시나리오는 이겁니다. 문제 생기면 바로 바지사장 잠수시키고, 영원히 발뺌하기. 말씀대로 실력 좋은 변호사들은 이런 거 무죄 만드는 거 선수죠.”
결정적인 증거 딱 하나 못 찾게 만들어서 증거불충분으로 기각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법원도 공통된 진술이 계속되면 증거로 인정을 해주거든요.”
준철이 서류를 내밀었다.
“한명건설이 기소되면 법정에서 일관된 진술을 계속해 주세요.”
“우리 억울함을 말하면 된다고?”
“네. 그거면 됩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하청 사장들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하청사들의 전폭적인 협조하에 PL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청사가 PL 해외 계좌에 직접 입금한 정황도 잡혔고, 거기엔 공정위가 놓치던 부분도 있었다.
“이거 대체 얼마나 세탁한 거야?”
“해외 계좌가 이렇게 많아?”
범죄 수익금을 계산하던 팀장들은 혀를 내둘렀다. 파면 팔수록 불명의 해외 계좌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0원 한 장 놓치지 말라는 구 과장 때문에 팀장들은 밤잠까지 설쳐 가며 일해야 했다.
그렇게 총 비자금 액수가 정리됐을 때. 다들 다크서클 짙은 얼굴로 회의에 참석했다.
“3년 동안 1,200억. 이게 진짜 끝인가?”
“예, 맞습니다. 더 나올지도 모르지만 당장에 보이는 건 이 돈입니다.”
회의실엔 히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구 과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1천억대 비자금은 재벌한테도 적은 돈이 아닌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모두들 침묵을 지키자 구 과장이 재촉했다.
“허심탄회하게 말해. 어차피 다 아는 문제 같으니.”
“아무래도 정치권 로비에 쓰인 것 같습니다. 한명건설 수주 자료를 보면 60년 동안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곳이 갑자기 해제되고 아파트 입찰을 따낸 이력이 있더군요.”
“수해 복구 사업 같은 경우 수의 계약을 통해 따낸 공사도 많았습니다.”
수의 계약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 지자체가 사업권을 주는 것을 뜻한다.
당연히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문제인데, 이런 방식의 공사가 한두 건이 아니다.
“만약 한다면 주택 공사의 입찰 자료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놈들이 다른 경쟁이라곤 정당하게 했을까.
타 건설사가 월등히 더 높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한명건설이 따낸 공사가 있다면 거기서도 청탁을 의심해 볼 법하다.
“좋아. 근데 리처드 팍은 누구냐?”
“예. 그 사람 조사 끝났습니다. 미국계 한국인 변호사더군요. M&A 전문이고 회계 자료에 능합니다.”
“당연히 한국에 없겠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곳곳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한명건설의 시나리오는 명백하다. 바지 사장 무조건 잠수시키고 아니라고 발뺌할 것이다. 만약 최영석의 혈연이 세운 회사라면 정황상 특수 계열사가 성립되는데, 이건 그것도 벗어나
있다.
“결국 놈들한테 자백을 권유해 볼 수밖에 없겠군.”
“네. 저희도 지금 상황에서 결정적인 게 없습니다.”
당연히 먹히지 않을 거다.
“일단 최영석이한테 소환장 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