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슬쩍, 하나 (4)
서초구에서 하숙 생활하는 기자들은 법원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직감했다.
“공정위랑 검찰이 또 만나고 다녀?”
“국장급 이상 미팅이면 뭐 있는 거 아니야?”
사실 공정위는 뻔질나도록 검찰에 들락거린다.
기소, 압수수색, 영장 등은 검찰의 협조 없이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공정위 국장과 서울지검장이 만났다는 건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우리가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나. 대한전력 건 때문에 만나는 거일 수도 있잖아.”
“맞아. 공정위가 최영석 부회장 처벌 못 해서 이를 갈고 있으니까.”
“아니야. 대한전력은 종합국에서 맡았고, 저 사람은 경쟁 국장이야.”
“그럼 다른 사건이야?”
처음부터 오래갈 수가 없는 비밀이다.
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기자들은 검찰과 공정위를 수없이 들락거리는 하청 사장들을 따라다녔다.
집단 지성의 힘은 무서웠다.
기자들이 서로 주워들었던 사실을 한데 모아 보니 사건의 윤곽이 잡혔다. 공정위가 조사하는 범죄가 일감 몰아주기이며, 최영석 부회장의 비자금이 최종 타깃이란 게 확인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기자들 못 따돌립니다.”
서울지검장 오윤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만 입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네요. 기자들이 하청 사장들까지 따라다녔습니다. 그들도 대충 다 말한 것 같군요.”
“네. 하청 사장들이야 기사를 터트리고 싶겠죠.”
“눈치 빠른 기자들은 이미 PL의 실체까지 파악했을 겁니다.”
“우리가 기소하면 곧 특종이 터지겠군요.”
회의실엔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어색한 침묵을 이기고 지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국장님, 오늘은 좀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주신 자료 보면 PL은 부회장의 비자금 창구가 확실해 보입니다. 문제는 그 비자금을 어디에 썼느냐 하는 건데……. 혹시
원정 도박이나 부회장의 내연녀 같은 흔적이 있었는지요.”
“그렇게 귀여운 이유에 1,200억이 필요하진 않죠.”
끙-.
“혹시 민감한 이름이 있었습니까?”
“아직 단정할 순 없지만, 서울시에서 그린벨트 두 곳을 해제했는데 이 아파트를 한명이 따냈더군요. 40년 동안 인허가가 이뤄지지 않았던 강남구 재개발도 따냈고요. 수해 복구 사업도
있었는데 수의 계약으로 한명이 따갔습니다.”
“정치권으로 돌이 흘러갔단 말씀이시군요.”
“여의도 로비가 아니면 이 큰돈도 필요 없을 겁니다.”
서울지검장도 건설 업계의 생리를 잘 알았다.
그 큰 비자금을 마련했는데 여의도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공공기관 고위직들이 거론될 것이며, 거물급 국회의원들도 등장할 것이다. 어쩌면 엘시티 파문 이후 최고의 부동산 스캔들이 될지도 모른다.
“후우…… 어렵군요.”
당연히 진행시켜야 할 수사이지만 지검장은 주저했다.
국장도 그 고민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정위는 일감 몰아주기와 비자금만 밝혀내면 되지만, 검찰은 그 비자금을 어디에 썼는지까지 추적해야 한다.
“지검장님, 너무 부담스러우면 적당히 눈속임하며 진행해 보시죠.”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저희 쪽에서 원정 도박과 내연녀 의혹 터트리겠습니다. 사실 PL의 자금 내역 조사해 봤는데, 실제로 그중엔 내연녀와 해외 부동산 투자에 쓴 돈도 있습니다.”
침소봉대.
작은 일을 큰일로 만드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언론엔 그 자료를 흘리겠다는 겁니까?”
“네. 대중의 관심은 어차피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훨씬 더 자극적인 내용이니 말이죠.”
“음……. 그건 좀 재밌는 얘기 같군요. 겉으로는 개인 비자금 수사인 척하면서 우리끼리 본수사 하자는 말씀이시죠?”
“네. 그럼 정치권의 경계도 덜 받을 겁니다.”
벌써부터 한명건설과 의원의 유착 관계가 나오면 사건이 피곤해진다.
천하의 한명건설이 외줄만 탔겠나. 양당 의원들이 사이좋게 걸려들 것이며 여의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수사가 잘 풀린다면 다행.
소득 없이 끝나면 국민들의 질타와 더불어 국회의 지독한 보복이 시작된다.
“좋은 방안 같군요. 대중의 관심이 부담인 건 사실이니.”
지검장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서류를 건넸다.
“최영석 부회장. 소환 한번 합시다.”
***
[한명건설, 일감 몰아주기 의혹으로 고발] [해외 법인에 상당한 일감 몰아준 것으로 밝혀져] [국내 시멘트에 포장지만 바꿔 팔았나?] [비자금 약 1,200억대로 알려져]검찰의 영장 발표 이후,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PL시멘트가 어떤 곳이며 지금까지 얼마의 돈이 흘러갔는지 모두 파악된 것이다.
한두 푼 흘러간 게 아니었기에 엄청난 파장이 일었고, 소환 조사만으로도 유죄 선고라도 되는 양 언론이 달아올랐다.
검찰은 약속한 대로 조미료를 쳤다.
건설 유착 대신 부회장의 내연녀와 원정 도박 혐의가 기사의 주를 이뤘다.
부회장의 은밀한 사생활이 계속 폭로되었고, 정점에 이를 즈음 검찰이 소환장을 날렸다.
“을지로펌 박상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놈들은 꿈쩍도 안 하나 보다.
최영석 부회장 대신 온 변호사를 보며 준철이 기분 나쁜 티를 냈다.
“명함은 됐습니다. 우린 분명 최영석 부회장을 소환했는데, 왜 변호사님이 오셨습니까.”
“바꿀 수 없는 해외 일정이 있어 지금 한국에 안 계십니다. 꽤 중요한 바이어라서.”
“자칫하면 콩밥 드실 수도 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까?”
슬쩍 긁어 봤는데 변호사의 얼굴엔 웃음만 가득했다.
“팀장님, 살살 하십쇼. 언론에 천억이네 2천억이네 하는 소리 나가지만, 그거 다 과장해서 우리 망신 주려는 거 압니다.”
“우리가 과장을 했다고요?”
“PL은 부회장님의 회사가 아닙니다. 리처드 팍이라는 혈연 관계도 아닌 타인이 세운 회사지. 이 회사와 우린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10대 로펌이라 그런가.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인정하는 법이 없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리가 왜 PL한테 웃돈 주고 샀느냐 이거지요? 그냥 그럴 만한 성능의 시멘트라 단가 많이 쳐줬던 겁니다.”
툭-.
“성분 대조해 보니, 국내 시멘트 업체 제품이랑 똑같던데.”
“예?”
“국내 업체들한테 납품받고 포장지만 PL로 바꿔 팔았죠? 그 포장지 한번 비쌉디다. 똑같은 성분인데 가격만 20% 높아지다니.”
놈의 얼굴이 굳었다.
바보 같은 놈들. 여기까지 파악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구나.
“그럼 당연히 왜 20%나 높게 샀었나를 추궁할 수밖에 없겠죠? 한명건설은 다른 하청들한텐 단가를 무자비하게 깎은 사람들이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부당 계열사 세웠다는 거, 일감 몰아줬다는 거. 두 가지 인정하세요. 최 부회장이 검찰에 직접 출두해서 자기 입으로.”
변호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걸 인정하면 당연히 그 돈을 어디에 썼느냐가 도마에 오를 것이다.
“이거 참 난감하군요. 한 적도 없는 일인데 하라고 하시니. 그럼 이 PL의 대표는 만나 보셨습니까? 리처드 팍이라는 분.”
“못 만나 봤죠. 그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
“허허, 당사자의 자백도 없이 무작정 몰아가기라. 법조인으로서 이런 유도신문은 사양합니다.”
“그럼 설명해 보세요. 천하의 한명건설이 왜 PL한테는 호구 잡혔습니까.”
“우리도 당했어요. PL이 그런 업체인지 몰랐습니다.”
“그게 말이 돼요?”
“그럼 공정위의 이런 태도는 말이 됩니까. 이렇게 자신 있게 조사할 거면 리처드 팍 소환해서 자백받아 내세요. 부회장 심복이라고.”
리처드 팍은 거의 잡을 수 없다.
이럴 때를 대비해 미국인 사장으로 만들었을 테니 말이다. 이미 잠수 탄 지 오래일 것이며 공정위가 소환장을 날릴 수도 없다.
미 연방거래위원회와 수많은 업무 협조를 해야 하지만 거기엔 수많은 난관이 필요하다.
그자가 미국에 있단 것도 미지수인 것이고.
“결국 증거 더 가져와 봐라 이 말씀이시군.”
대화는 끝났다.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정황을 미친 듯이 우겨 댈 것이다.
“근데 그거 압니까. 우린 그 비자금이 여의도로 흘러갔단 정황도 가지고 있거든요.”
“그게 무슨…….”
“한명건설 참 공사 잘 따던 업체더군요. 이거 다 드러나면 볼만할 겁니다.”
***
“놈들이 공사 입찰 내역을 다 뒤질 모양입니다.”
박 변호사는 검찰에서 있었던 모든 내용을 설명했다.
부회장의 얼굴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얼마나 아는 것 같아?”
“콕 집어서 그린벨트랑, 재개발을 운운하더군요. 이 두 가지만 털어도 민감한 이름 다 나올 겁니다.”
서울시 그린벨트 두 곳.
강남과의 접근성 좋고 수변 시설이 화려해 모든 건설사가 눈독 들이는 임야였다.
한발 빠른 한명건설은 서울 시장과 토지공사 고위직까지 모두 포섭해 아파트 계약 두 곳을 따냈다.
세간에서 유네스코 유산이냐 소리가 나왔던 강남 아파트도 한명건설의 로비 덕분에 일사천리로 인허가가 이뤄졌다. 여기에 관여된 인물이 한둘 아니다.
“그럼 이제 그 사람들이 날 도와줄 때군.”
“도움을 요청하실 겁니까?”
“밥값 해야지. 나한테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부회장님, 지금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득보다 실이 큽니다.”
이제 와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 한명건설이 주는 돈은 안전하단 믿음이 완전히 깨져 버린다.
“그럼 나더러 혼자 뒤집어써라?”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지금 뉴스에서 원정 도박과 내연녀 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있습니다. 대중도 관심은 그쪽으로 더 쏠렸고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룹 오너가 비자금 한번 조성했던 걸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단위가 크지만 어차피 재벌 사람들에겐 집행유예가 최고형이다.
비서실장까지 만류하자 부회장도 고집을 꺾었다.
“2차 소환은 언제지?”
“다음 주입니다. 아무래도 그땐 부회장님께서 직접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구속영장도 신청하겠지?”
“리처드 팍을 수배 중인 모양인데, 아직 못 찾은 것 같군요. 뜻대로 안 풀리면 영장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부회장의 수심이 깊어졌다.
이제 곧 회장 자리가 코앞인데, 여기서 구속 수사라니……. 억울했다.
그렇게 마련한 비자금은 결국 국회의원들한테 쓰고 한명건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공사를 따오지 않았나.
착잡한 얼굴을 지우며 손짓을 했다.
“수고했네, 박 변호사. 나가 봐.”
그가 나가자 바로 비서실장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