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당사자 나와
“리처드 팍은 어디 있지?”
“동남아 안가에 거처를 옮겨 뒀습니다. 자진해서 나오지 않는 한 절대 못 찾을 겁니다.”
PL컴퍼니의 바지 사장 리처드 팍.
만약 놈이 당국에 잡혀 버리면 모든 상황이 끝난다. 당사자의 자백만 나오면 부회장이 세운 허위 계열사라는 게 들키지 않나.
그룹 임원들과 달리 충심도 없고, 돈 몇 푼이 아쉽지도 않은 놈이다. 공정위가 정상참작 얘기만 꺼내도 술술 불 것이다.
“부회장님, 너무 염려 마십쇼. 어차피 리처드 팍은 못 찾습니다.”
걱정을 읽은 김 실장이 재차 위로했다.
“김 실장은 어떻게 봐. 이거 가망 있어 보여?”
“……설사 비리가 드러난다 해도 집행유예로 끝날 겁니다.”
“가망 없단 뜻이군.”
김명호 실장은 쓴침을 삼켰다.
지금은 나약한 소리를 할 상황이 아니다. 이제 와 뒷돈 받은 공무원들 찾아가는 건 상황을 더 최악으로 만드는 일이다.
“설사 들킨다 해도 집행유예 아닙니까. 돈 뿌렸던 사람들 찾아가는 건 재고하시죠.”
“김 실장, 내가 지금 집유가 무서워서 이래? 주가 공시 뜨자마자 차남 승계, 삼남 승계 나오고 있어. 내가 이 자리 차지하려고 무슨 일까지 했는데.”
부회장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검찰도 공정위도 아닌 바로 주주들의 민심이었다.
둘째와 셋째는 욕심도 많아 늘 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이다. 여론이 괜찮다 싶으면 한명건설 자리를 놓고 왕좌의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그놈들한테 건설이 넘어가는 건 절대 용납 못 해.”
“그래도 주주들은 부회장님에 대한 신망이 큽니다. 방만 경영 때려잡는다고 회사 이익도 높였고, 이 비리도 결국 회사를 위해 로비를 펼친 겁니다.”
“처벌당하면 얘기가 또 다르지.”
“주주들은 도덕적인 사람 안 좋아합니다. 어떻게든 회사 키워 줄 사람 원하지.”
김 실장의 설득에 조금은 위안을 얻은 부회장이다.
“그래도 내 선택은 못 바꿔. 나한테 돈 받아먹은 놈들, 이제 밥값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결코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공정위 저놈들 지금 내 사생활 자료 슬쩍 흘리면서 여론몰이 하고 있는데, 짙은 구린내가 나. 뒤에선 딴짓거리 하고 있는 게.”
그건 부회장의 추측이 맞았다.
김명호 실장은 고집을 꺾을 수 없으리라 단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울 시장부터 연락하죠.”
***
고급 일식집에서 만난 최선호 서울 시장은 언짢은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렇게 보는 건 좀 조심해야 할 때 아닌가.”
차갑게 쏘아 대는 말투에 씁쓸함이 들었다.
돈 받아 갈 땐 동거동락 하자더니 이제 와 선을 긋는다.
“시장님, 제가 급한 일이 있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 좀 도와주십쇼.”
“자네도 알다시피 내 코가 석자야. 언론에서 계속 그 얘기 나와서 나도 감사원에 불려 가야 하겠다고.”
“어차피 다 지나갈 일 아닙니까.”
“뭔 말인진 알지만 내 손으론 못 덮어. 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최 시장은 술잔을 멀찌감치 치웠다.
“이 정도는 수습하실 수 있을 텐데요. 당에 부탁해서 공정위 한번 막아 주십쇼. 청와대 전화 한 통이면 됩니다.”
“이 사람이 어디 그런 말을! 지금 그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몰라?”
“아니면 다 밝혀지고 함께 죽든가요.”
최 시장은 그린벨트 해제 때 최종 사인을 박은 사람이다. 문화유산 같았던 강남 아파트 재개발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비단 그뿐일까.
토지공사, 교통공사 고위직들은 모두 한명건설에게 장학금을 받았다. 터지면 다 함께 죽는 거다.
최 시장은 멀찌감치 제쳐 뒀던 술잔을 벌컥 들이켰다.
“나도 하나만 물음세. 받아먹은 놈들이 대체 얼마나 돼?”
“건설관련 공기관장은 모두 뿌렸습니다. 족히 20명은 넘을 겁니다.”
고위직 20명. 다 드러나면 특검이 열릴지도 모른다.
“방도를 알려 주십쇼.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방도랄 게 없네. 그 사건 맡은 놈이 이준철인가 하는 놈이라고?”
“예. 해서 저희는 그자에게 자리라도 제안을…….”
“꿈 깨. 우리도 호되게 당했어. 군납비리 때 한번 들쑤시더니 초토화를 만들어 놨다고.”
군납비리 사건은 최영서도 알고 있었다.
양당 의원들이 기 싸움 하느라 미친 듯이 싸우지 않았나.
“그거 쌈 붙인 게 그놈이야.”
젠장.
진짜 막 나가는 놈이구나.
“그럼 그놈 말고 그 위엣 놈 찾아가겠습니다. 국장급으로.”
“한다고 되겠어?”
“안 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만약 전부 잘못되면 저의 개인 비자금으로 자폭하겠습니다. 전부 우릴 위한 일이니 모쪼록 도와주십쇼.”
최 시장은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술잔을 다시 채웠다.
하지만 혼자 자폭하겠단 얘기에 결정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안녕하십니까, 한명건설 최영석 부회장입니다.”
“종합국 김태석이요.”
“참 오해 사기 좋은 시국인데, 이렇게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김태석 국장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불쑥이라뇨. 온갖 국회의원들한테 전화가 와서 아주 혼났습니다.”
“…….”
“부회장님을 만나 보지 않았으면 오늘도 시달렸겠지요. 사람이란 염치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부회장은 미간에 힘을 꾹 주었다.
이 자리까지 올라오며 숱한 수치를 받아 봤지만 오늘만 한 굴욕이 없다.
“그럼 기왕 염치 잃은 거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PL시멘트. 일감 몰아주기, 하청사 바꾸기 모두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니 그쯤 해 주시지요.”
“그쯤 하라니 무슨 말인지.”
“그 비자금을 어디에 썼는지까지 추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범죄 수익금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만.”
“언론에 나간 대로 내연녀에게 줬고, 해외 부동산에 투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한명그룹은 아버지 돌아가시면 형제들끼리 경영권 다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예요. 그때를 대비해서
현금 두둑이 쥐고 있었습니다.”
김태석 국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가 아는 사실과 많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이건 어찌 설명하실 거요.”
쓱-.
“그린벨트 해제, 강남 아파트 재개발, 수해 복구 사업 수의 계약. 이거 전부 다 한명건설이 공짜로 얻어 간 공사네요.”
“국장님, 그건 정상적인 경쟁을 통해 따낸 공사들입니다.”
“해서 당시 입찰 자료도 입수했습니다. 근데 아무리 검토해도 한명이 타 건설사보다 조건이 좋지 않아요.”
툭-.
“한명건설이 산재 사고가 없는 곳도 아니고, 하청을 안 쓰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사비가 싼 것도 아니고. 이런 기업에 일감 주는 건 당연히 썸씽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은 겁니까?”
“다 알고 싶어. 비자금 빼돌려서 어디까지 뒷돈을 넣었지? 여기에 관여된 인물들은 누구야?”
국장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그거 알면 당신들 다쳐.”
부회장도 더 이상의 발뺌은 의미 없다 생각했다. 깊게 들어가면 다 들킬 수밖에 없는 문제다.
“뭐 알겠지. 우리가 로비 많이 뿌렸다는 거.”
“여의도 의원들이 많나?”
“많다 뿐이겠어. 여야 가리지 않고 우리한테 돈 안 받아먹은 금배지 없어. 심화 수사? 이거 계속하다 보면 당신들만 피 볼걸.”
김 국장이 피식 웃었다.
“피는 이미 봤어. 뒷돈을 얼마나 뿌려 댔던지 아주 안 오는 전화가 없더만.”
“그거 알면 그냥 이제 좋게 말 합시다.”
“근데 안 돼. 설사 내가 덮더라도 내 밑에 놈이 절대 안 덮을 거거든.”
부회장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이준철 팀장?”
“그래. 그놈은 절대 안 덮어.”
“그러니까 국장님께 부탁하는 거 아닙니까. 일감 몰아주기 인정합니다. 과징금이 얼마나 많이 떨어지든 승복합니다. 그러니 내 비자금의 행방과 기소만 막아 주십쇼.”
“잘못을 인정한다면 죗값을 받아요. 같은 얘기 계속 반복 될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납니다.”
김 국장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자 부회장이 소리쳤다.
“김 국장님,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뭐?”
“군납비리 사건 드러내며 여야 여기저기서 적을 많이 졌다지? 좀만 돌아보니 당신 하나 잡겠다고 난리더만.”
부회장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
“정치권이 합심하면 겨우 공정위 국장쯤 하나 못 죽일까. 당신의 재임 자료 모두 털릴 겁니다. 수상한 점이 하나라도 나오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요.”
“웃기는군. 이 자리서 협박이라니.”
“협박이 아니라 이게 현실이에요. 누구나 다 자기 재임 자료엔 떳떳치 못한 자료가 있어. 난 그게 이거였을 뿐이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한 번 할 때 적당히 넘어가란 거예요. 선을 넘지 말라고.”
김 국장도 그 말은 무서웠다.
방금 이 전화만 봐도 그렇다. 절대로 주변에 휘둘리지 않으려 마음먹었는데, 온갖 정치인들이 연줄을 동원해 자신에게 연락해 왔다.
그중엔 살살 봐달라는 부류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너도 똑같이 당할 것이라 협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 국장이 주저하자 그가 다시 회유했다.
“우리 쉽게 갑시다. 은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말년에 연금에만 의지하면서 사실 겁니까. 좋은 자리 마련해 놓겠습니다. 성에 안 차시면 없는 자리라도 만들어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
“여의도에서도 이걸 원하고 있어요. 국장님이 그 꼴통 조사관 한번 막아 주십쇼.”
사건 청탁을 대가로 뒷돈을 받는 건 명백한 범죄다.
하지만 은퇴 이후 자리를 약속한다면? 딱히 위법적인 일이 아니며, 범죄라고 할 만한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모든 공무원들이 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넘어왔다.
이자도 다르지 않으리라.
긴 침묵이 흐르자 부회장에게도 희망의 빛이 보였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그의 기대를 무참히 부숴 버렸다.
“이런. 내 생각이 진짜 짧았구먼. 이런 제안 해 올 줄 알았다면 녹음기라도 켜 둘 걸 말이야.”
“뭐요?”
“정치인과 공공기관 고위직들은 다 이렇게 구워삶은 모양이지? 참 좋은 전략 같수다. 재임 자료 협박과 회유라.”
김 국장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재임 자료 털 거면 마음대로 하시오. 과잉 조사로 처벌 받았으면 받았지, 사건 축소·은폐했다 소리는 안 나올 거거든. 법대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