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당사자 나와 (3)
최기석 상무는 급작스레 성사된 공정위와의 미팅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한명 그룹을 두고 안팎에서 많은 말이 오가는 시국이다. 상관도 없는 자신을 불렀지만, 그리 유쾌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 거란 것쯤은 예상했다.
준철은 예의 진중한 얼굴로 인사하며 명함을 건넸다.
“이준철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과거 부회장 밑에 있을 땐 가장 치고 박고 싸웠던 게 그 아닌가.
부회장은 하청을 쥐어짜 영업이익만 올렸지만, 이쪽은 꽤 경영 실적이 좋았다. 제약회사를 맡아 취임 5년 만에 매출을 두 배나 신장 시킨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다 떳떳했다면
건설은 놈에게 넘어갔겠지.
대학병원들에게 로비를 펼친 정황이 발견돼 사장에서 해임당하고 2년 만에 상무로 다시 들어온 놈이다.
놈의 비리를 검찰에 제보한 게 김성균과 부회장이었다.
그렇게 얽힌 악연인데 이제 와 협조를 바라다니,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최기석 상무요. 한데 날 만나자 한 이유가 뭡니까?”
“차 한잔하면서 말씀하시죠.”
“그쪽하곤 물도 마시고 싶지 않아요. 용건만 말해 주세요.”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놈이 경계심을 잔뜩 보였지만 준철은 예의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찌 됐건 놈은 지금 관련자나 참고인이 아니다.
협조를 부탁해 봐야 한다.
“혹시 한명건설 비자금 때문에 보자고 한 거면 가쇼. 난 아는 거 일절 없으니까.”
“리처드 팍을 찾고 있는데, 정말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모릅니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공정위가 칼춤 추다 괜히 옆에 있는 나까지 피해 볼까 나온 거요. 그리고 내가 형을 배신할 생각이라면 오산이요.”
‘형’이라는 호칭에 피식 웃음이 났다.
“우애가 깊군요. 보통 그 새끼, 저 새끼라 부르는 걸로 아는데.”
“뭐?”
“한명 그룹은 경영권 다툼이 치열한 걸로 압니다. 상무님도 호시탐탐 왕좌만 노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더러 형제를 팔아먹으라고?”
“팔지 말고 당한 만큼만 갚아 주세요. 5년 전 대학병원 리베이트 때 큰 곤욕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놈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그때 내부자고발로 둔갑시켜 검찰에 언질 준 게 누구였을까요.”
“이간질시키지 마! 설사 그게 형이었다 해도 내가 당신들을 왜 도와?”
다시 한번 발끈하려던 찰나.
“시작은 한명건설 비자금이지만, 곧 한명 그룹 비자금 수사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확대? 치사하게 이런 게 어디 있어! 당신도 알겠지만 이건 간판만 ‘한명’을 같이 쓸 뿐 각 계열사는 전혀 다른 회사라고.”
불똥이 튈 수도 있단 말을 전하니 말투가 좀 공손해졌다.
억울할 것이다.
한명 그룹 계열사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들이다. 형 때문에 자기 자신까지 수사받아야 하는 게 당연히 억울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간판만 같이 쓰는 회사 때문에 왜 동생이 피해를 봅니까. 형에게 당했던 일 복수하고, 새 인생 사세요.”
준철은 쓱 서류를 넘겼다.
“그리고 이건 저희가 제보를 받은 내용입니다. 상무님께서도 그리 깔끔한 편은 아니더군요.”
서류를 든 최 상무 얼굴이 실시간으로 굳어졌다. 짧은 종이였지만 그 안엔 자신이 비자금을 만들었던 내역들이 대략적으로 다 나와 있었다.
“이, 이건…….”
놀랄 만도 하다. 이건 김성균으로 살 때 추후에 있을 경영권 분쟁을 대비해 전부 준비해 놨던 자료이니까.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거렸지만, 서류를 검토를 다 마쳤을 땐 한결 차분한 모습이었다.
“나한테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뭐요.”
“리처드 팍. 어디에 있습니까. 누군지 아십니까.”
최기석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막장 가족이라 한들 형제를 팔아먹은 동생으로 남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놈이 제시한 서류는 위험한 자료다.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형과 함께 순장당할 것이다.
근데 과연 그럴 이유가 있을까?
단지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건설을 가져간 형이다. 늘 그것이 불만이었고, 별로 특별하지 않은 능력 발휘하는데 마치 자기 것인 양 행세하는 형이 싫기도 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습니다. 리처드 팍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 말해 주세요.”
준철이 재차 묻자 그가 입을 열었다.
“베트남에 있을 거요.”
“베트남?”
“형이 해외에 유령 회사 세우고 문제 터질 때마다 숨겨 놓는 안가가 있거든. 나도 형의 약점 찾느라 조금 뒷조사를 해 놨습니다.”
“하면 이미 알고 있었습니까?”
“PL을 싱가폴에서 세운 놈까지 알고 있습니다. 김성균 본부장이라고 형의 오랜 심복이었지.”
가슴이 욱신거렸다.
“근데 그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 뒤를 캐 봐야 별수 없을 겁니다.”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처드는 우리 법률 팀에서도 일했어요. 나도 모든 정보통을 다 동원해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베트남 안가에 숨어 있소. 아마 절대 안 나올 거요.”
됐다.
소재지 파악됐으니 이제 소환만 하면 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도 아시겠군요.”
“그 전에 먼저. 당신이 나한테 들고 온 자료부터 마무리 지어야지?”
“걱정 마십쇼. 본인 찌르려고 준비한 게 아니라 협박용으로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건 진심이다. 어차피 지금 이놈까지 상대해선 안 된다.
“단, 그자에 대한 정보를 다 넘겨준다는 전제하에요. 도와줄 수 있습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는 만큼 알려 드리죠. 비서실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
하노이에서 멀리 떨어진 베트남 안가(安家).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호화 저택에선 매일같이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나 언제까지 짱 박혀 있어야 돼요?”
벌써 한 달째나 이어지고 있는 도피 생활.
가족은커녕 뉴스도 함부로 볼 수 없다.
“이 정도면 사실상 나 징역살이 아닌가.”
“곧 잠잠해질 겁니다.”
“물어볼 때마다 그 소리군.”
“조금만 참아 주세요. 부회장님이 지금 비자금 인정했습니다. 그 비자금을 어디에 뿌렸는지만 막으면 모든 게 다 끝날 겁니다.”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바로 리처드 팍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나 가족이랑 통화한 지 너무 오래됐어.”
“당국의 추적이 심해 당분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그때 돈 뿌렸던 금배지들한테 수사 막으라 그래! 이 짓거리 막자고 돈 뿌려 놓은 건데 왜 계속 당하고 있어!”
답답할 노릇이다. 건설 관련 공기업은 물론, 검찰과 국회의원들한테 돌린 보험비가 얼만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다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허튼 생각 마.”
“그건 무슨 말이요.”
“내 입 하나 막으면 모든 게 다 끝날 거란 생각. 참고로 내가 죽으면 몰래 써 놓은 유언장이 대중에 공개될 거야. 그 파장은 나도 감당 못 해.”
“그건 걱정 마요. 우리가 법조인 상대하는데 그 정도 예상 못 할까.”
경호원이 달래듯 말했지만 전혀 안심은 되지 않았다.
이 안가는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좋은 만큼, 사람이 죽는 소리도 바깥에 들리지 않는 곳이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불안감이 치솟는 탓에 이젠 신경쇠약까지 걸린 지경이었다.
“괜한 걱정 그만하고. 오늘은 이만 들어갑시다. 요새 이 근방까지 계속 경찰이 나돌아 다녀…….”
-삐용 삐용
그때, 이 괴로운 도피 생활을 끝내 줄 구원의 종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한적한 안가에 갑자기 경찰차가 들이닥치며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놀랄 새도 없이 무장 경찰이 우르르 내려 안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
“뭐? 리처드 팍이 잡혀?”
“예. 안가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분명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지나가게 통제하던 곳인데.”
“아무래도 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최기석 상무가 저희 뒷조사를 했는데, 그걸 당국에 흘린 모양입니다.”
더 이상 득의양양하던 부회장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처드 팍이 잡혔다는 건 모든 걸 다 들켰다는 얘기. 비자금이 어떻게 한국으로 유입됐으며, 누구에게 뿌려졌는지 단숨에 파악할 것이다.
“송환은 언제야.”
“늦어도 이번 주입니다.”
그놈에게 입을 다물란 부탁을 해도 될까, 이 미련한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회사에 소속된 놈도 아니었고, 충성심도 기대할 수 없는 놈이다.
“……어떻게 할까요.”
“덜 민감한 이름들 꺼내 봐.”
“현직 시장까지 다치는 건 타격이 큽니다. 이미 은퇴한 의원이나 공무원들 위주로 알아보겠습니다.”
현직자들을 건드리는 건 정치권의 후폭풍 또한 상당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은퇴한 공무원들을 건드는 건 상대적으로 해 볼 만한 일. 김 실장 머릿속엔 들켜도 타격 없을 명단이 스쳤다.
하지만 이런 대화가 더 지속되기 전.
바깥에서 쾅쾅 소리가 나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경찰이 못 들어갈 데가 어디 있어? 당신들 안 비키면 공무집행방해야.
소란은 곧 부회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끝났다.
“여기 계셨군.”
경찰들은 좌우를 물리치며 부회장에게 다가갔다.
“최영석 씨. 당신을 비자금 조성 혐의 및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합니다.”
“뭐?”
“영장이 신청한 지 2시간 만에 나왔어요. 웬만하면 자백하는 게 좋을 겁니다.”
최영석은 아뿔싸 싶었다.
보통 영장 신청 같은 경우 검찰 빨대들이 다 알아서 일러바쳐 주는 문제다.
한데 아무런 통보도 없이 바로 영장 신청? 이건 이미 검찰 내부 조직도 이 문제에서 선을 긋고 있단 뜻이다.
“아주 증인을 꼭꼭 숨겨 놓으셨더군. 덕분에 휴양지에서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경찰들은 비웃음을 흘리며 수갑을 채웠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한명건설 바깥에서부터 시작이었다.
-한 말씀만 해 주세요. 리처드 팍과 어떤 관계입니까?
-비자금이 국내로 유입된 경로가 밝혀졌습니다. 이건 모두 여의도에게 건넨 로비 자금입니까.
냄새 맡고 모인 기자들이 건물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부회장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호송 차량에 올랐다.
어쩌면 한명건설 부회장 자리를 놓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