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새로운 국면 (1)
“자, 이제 모든 걸 다 말해 봅시다.”
취조실로 끌려 온 리처드 팍은 말없이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상수 씨, 대화 안 하실 겁니까?”
한국 이름을 부르자 놈이 흠칫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우린 그 이상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거짓말할 생각 말아요.”
“그럼 댁이 뭘 아는지부터 들어 봅시다.”
“베트남 안가는 부회장 이름으로 되어 있었고, 두 사람은 당연히 유착 관계죠?”
“겨우 그거 물어 보려고 불렀습니까.”
워밍업이라서 짧게 잽을 던졌는데, 놈이 콧방귀를 뀐다.
“그럼 요지를 말씀드리죠. PL컴퍼니로 세탁한 비자금, 전부 어디로 돌렸습니까?”
나불대던 놈의 입이 멈췄다.
부회장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고위 공무원들은 총 6명. 한명그룹은 그중 처벌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전임자들을 물색 중이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다 수습할 순 없다.
그는 지금이 범죄 규모를 축소해야 할 때란 걸 알았다.
“잘 기억이 나질 않네. 당신들이 의심하는 이름부터 말해 보쇼.”
“우리 지금 스무고개 하는 거 아닙니다만.”
“나같이 이름만 빌려준 바지사장이 어디 돈 구경 해 봤겠어? 기억나는 대로 알려 드리리다.”
사안의 심각성을 모르는 게 아니다. 시간을 벌며 범죄를 축소하겠단 뜻이다.
준철은 볼펜을 톡톡 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박상수 씨, 혹시 구치소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뭐?”
“감시가 삼엄한데 매년 10명씩은 구치소에서 죽어 나가. 근데 그중에서 자살을 한 게 아니라 당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쓱.
“김성균, 이름은 들어 봤을 거요. 당신하고 함께 PL컴퍼니 세운 본부장이지.”
“그, 그걸 어떻게.”
“이 사람이 지금 어디 있을까요. 구치소? 아님 감방?”
준철은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부회장은 앞길에 방해된다 싶으면 충성을 다하던 사냥개도 잡아요. 하물며 박상수 씨라고 다를까.”
“……이간질 그만하지? 난 최영석 부회장이 허위 계열사 세울 때 이름만 빌려줬고, 그 뒤론 돈 구경도 못 해 봤어.”
“이름만 빌려준 놈이 왜 베트남에서 잠적을 해. 위험한 놈이니까 부회장이 안가까지 내주지 않았겠어?”
놈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준철이 기세를 올렸다.
“서울시에서 그린벨트 해제하고, 강남 아파트 재개발 들어갔는데, 그걸 한명건설이 똑 따가 버렸네?”
“…….”
“현직 서울시장이 관여됐단 얘기지? 근데 그린벨트 해제를 시장 단독으로 결정했을 리 없고. 중량감 있는 정치인들 다 관여되어 있을 텐데, 당신이 진짜 아는 게 없어?”
“…….”
“자살 당하기 전에 말하쇼. 이제부터 믿을 사람은 우리야.”
리처드 팍은 고개를 들지 못하며 손을 달달 떨었다.
민감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살 소식이 들리는 건 그리 이상한 광경이 아니다. 젊은 놈의 말이 전혀 과장처럼 들리지 않았다.
부회장 협박용으로 작성한 유언장을 죽고 나서야 공개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
같은 시각 다른 취조실.
구속된 최영석은 쓸쓸하게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굵직한 공사들은 전부 한명이 따냈더만. 최영석 씨, 이거 다 로비로 따냈죠.”
젊은 검사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일이요.”
“덮어 놓고 모른다 해서 넘어가질 상황이 아녜요. 지금 옆방에서 리처드 팍 조사하고 있어. 거짓말이 얼마나 갈 것 같아?”
“괜히 강압 수사해서 자백을 불게 할 모양이면 그만두시오.”
“뭐? 강압?”
혈기 넘치는 젊은 검사는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책상이 엎어져 버렸다.
“강압은 염병. 다 드러난 마당에 끝까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그때 취조실 바깥에서 문이 열리며 부장검사가 들어왔다.
부장은 엎어진 책상과 부회장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젊은 검사의 정강이를 깠다.
“너 지금 쌍팔년도 취조하냐?”
“부, 부장님…….”
“피의자도 피의자의 권리라는 게 있다. 한 번만 더 이 꼴 보이면 바로 옷 벗겨 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평소 부장검사는 터프한 취조를 좋아했다.
사람을 때린 것도 아니고 책상 한 번 엎으며 겁 좀 줬는데,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다.
젊은 검사가 낑낑거리며 나간 후엔 부회장과 부장검사 둘만 남게 됐다. 부장검사는 눈치를 살피더니 먼저 입을 뗐다.
“아직 명단은 정리 안 됐습니까.”
“죄송합니다. 최대한 타격 없는 사람들로 추리려 하는데, 마음처럼 안 되는군요.”
“하긴 아무리 전임자만 턴다 해도 반발이 심하지. 근데 서울시장은 못 벗어날 거요.”
“예?”
“그린벨트 해제랑 강남 아파트 재개발은 빼도 박도 못하더군. 그걸 최종 지시한 게 시장이더만.”
갑자기 차가워진 말투.
그리고 단념적인 어조.
부회장은 지금 부장검사가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여실하게 느꼈다.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진 않을 겁니다.”
“물론 하나 있습니다. 혼자서 뒤집어쓰기. 추후 취조가 계속돼도 그 비자금은 무조건 혼자서 먹었다 하시오.”
“리처드 팍이 진술을 해 버리면…….”
“그 정도야 우리 선에서 정리 가능해. 돈 뿌린 정황 없다고 잡아떼면 일단 넘어가질 겁니다.”
부회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돈 먹은 놈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더러 뒤집어쓰란 뜻이다.
“하면 저에 대한 처벌은…….”
“1,200억대 돈 모두 환수한다는 가정하에 집행유예 3년. 이게 최선입니다.”
일반인들에게 집유는 무죄지만, 재벌 총수들에겐 명예형이다.
출장이 많은 이들은 출입국에서 짐 수색을 당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참아 줄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집유면……. 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딱하구려. 부회장 지금 자리가 중요한 때라 봅니까? 자칫하면 줄줄이 엮여서 다 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저도…….”
“이게 살생부 명단이죠. 돈 받아먹은 나랏님들? 이거 다 드러나면 어찌 될지는 아실 겁니다.”
한명건설은 더 이상 공사를 따내지 못할 것이다. 이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들에게 일감을 줄 공공기관은 없다.
“그 자리 계속 차지하려다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어요. 안 되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시오.”
부장검사는 그리 말하며 일어났다.
***
부장검사의 제안은 현 상황을 타개할 최상책이었지만, 타이밍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람은 역시 ‘죽음’을 가지고 협박하는 게 가장 빠르다.
리처드 팍이 자신의 유언장을 다 공개하며 누가 얼마나 받았는지까지 다 입수한 것이다.
“과장님, 진술 다 나왔습니다.”
그 내용은 곧 오 과장에게 보고되었다. 공기관 수십 명, 국회의원 수 명이 연루된 비리에 오 과장도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역시나 서울시장은 빼박이네. 이거 진짜 특검이 열릴 수도 있겠는걸.”
과장이 아니다. 특검을 만약 대통령이 거부하면 청와대도 공범으로 몰릴 판이다.
“어떡할까요?”
“이 명단 그대로 소환해. 일단 얘기는 들어 봐야지.”
“어차피 할 말 있겠습니까. 모른다가 전부일 텐데.”
“빤한 거짓말 들어 보는 것도 절차다. 넌 가만 보면 무조건 영장부터 치려 그래.”
핀잔투로 말했지만 서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풋풋한 기분을 만끽할 새 없이 오 과장의 인터폰이 울렸다.
“예? 아, 예. 지금 명단 받았습니다. 아……. 지금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오 과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팀장, 이거 가지고 위로 올라와라. 국장실.”
***
국장실에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울시장부터 중진 의원, 그리고 공기관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던 것이다.
“실무자들이 왔네요. 앉지.”
김 국장은 대수롭지 않게 준철과 오 과장을 맞이했다.
“이 팀장.”
“예.”
“현 조사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 모양이야. 한번 브리핑해 줄 수 있나?”
준철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현재 이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당사자 앞에서 보고하라니. 불안했다. 혹시 이미 국장님께선 이들에게 포섭된 걸까?
그런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 국장이 눈을 찡긋거렸다.
“예……. 그럼 현 조사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믿어 보자. 절대로 그러실 분은 아니니.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처드 팍의 유언장에 대해 설명했다.
“피의자도 목숨의 위협을 느껴 보험조로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내용을 보면 돈을 어떻게 세탁해 어떻게 쐈는지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린벨트 해제와 재개발은 이에 대한 대가성으로
파악됩니다.”
“그만.”
보고가 미처 끝나기 전.
서울시장이 손짓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뭐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걸 몰라서 왔겠소.”
“김 국장, 일단 실무자들 보내고 우리끼리 진중한 얘기 좀 합시다.”
김 국장은 망부석처럼 고개를 저었다.
“실무자가 못 들을 말이면 저한테도 하지 마십쇼. 무슨 말씀을 하는지 함께 들어야죠.”
젠장.
“좋소.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어차피 이 사건은 최영석 부회장이 혼자 다 떠안겠다고 한 사건 아니요.”
“그 사람 처벌하는 데 우리가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겠습니다. 집행유예든 실형이든 책임자 처벌하고 끝내세요.”
이제 와 혼자만 살겠다?
김 국장은 익히 예상했던 용건이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방금 못 들었습니까. 비자금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도 다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가 받은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찾아오셨습니까.”
“하도 언론에서 들쑤셔서 불안해서 그럽니다. 보통 이렇게 무자비하게 수사하다가 꼭 엄한 사람까지 돌 맞기 마련이거든. 실적 한번 챙기겠다고 일 크게 벌이지 않길 빕니다.”
김 국장은 비웃음을 흘렸다.
“은퇴가 코앞인데 실적 챙겨 뭐 하겠습니까. 한달음에 달려오신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하긴 한가 봅니다.”
“김 국장!”
“돌아들 가십쇼. 오늘 만남은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김 국장이 등을 돌리자 서울시장이 소리쳤다.
“당신 악명이 이 바닥에서 자자합니다. 출세욕 때문에 남의 재임 자료를 턴다고?”
“당신은 그 위치까지 가면서 모든 게 다 떳떳했을 것 같소?”
“작정하고 까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씩씩거리며 원성을 토해 냈지만 김 국장은 미동도 없었다.
“잘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무리는 줄지어 국장실을 나갔다.
“저것들은 협박 멘트도 진부해. 걸핏하면 내 재임 자료를 털겠대.”
“……국장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저 미친것들 다 처넣지 않으면 제 명에 못 살겠어.”
김 국장은 여유롭게 웃으며 서류를 건네받았다.
“이 팀장, 이거 바로 언론에 뿌려 버려서 쐐기 박아 버려.”
“……예?”
“그래야 수습을 못 하지. 사람 마음 다 똑같다. 저렇게 계속 회유하고 협박하면 우리도 결국 꾐에 넘어가게 돼 있어.”
“아, 예.”
“무조건 정석대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