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손절
“돈 받아먹은 놈들이 이럴 땐 꽁무니군.”
“얘기가 잘 안 풀렸습니까?”
“집행유예 보장해 줄 테니 입 다물고 죽으라더군.”
부회장은 권력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한순간에 깨졌다.
꽁무니 빼기 바쁜 권력자들을 보면 허탈함을 넘어 무만감이 들 지경이다.
“비자금은 전부 내 사적 용도로 쓴 걸로 하래.”
“무립니다. 리처드 팍이 다 불어서 계좌에 흔적이 다 잡혔습니다.”
“뒷수습이야 그치들이 알아서 하겠지. 얘기 들어 보니 나만 협조하면 다 된다더구먼.”
“설마 서울시장 하나 보호하자고 그런 무모한 부탁을 한 겁니까?”
“그렇겠지. 서울시장 무너지면 그다음은 공기관장들, 국회의원들이니까.”
언론에 망신 주기 기사가 쏟아지고, 검찰의 반응이 서서히 차가워졌을 때부터 직감하긴 했다. 아군이라 믿었던 놈들이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게.
“오히려 그게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비자금을 정치권에 뿌렸다는 것보단 차라리 내 사적 용도로 흥청망청 써 버렸다는 게 깔끔하잖아.”
별것 아니란 듯 말했지만 부회장이 얼마나 큰 배신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여실히 전해졌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재벌 총수라 해도 1천억대 비자금이 적은 돈인가. 숨겨 둔 애인이 10명에 원정 도박으로 500억 정도 썼다고 거짓말해도 액수를 맞추기 힘들다.
이와 별개로 부회장은 다른 충격도 얻었다.
그는 그룹 내 정상에 있는 자로 늘 자신을 대신해 희생양으로 구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사람이다. 정치권을 대신해 혼자 똥물을 뒤집어써야 할 판이니……. 처음 느껴 보는 굴욕감과
배신감일 것이다.
“공정위 새끼들이 이걸 노렸나? 대한전력 때 내가 한 짓 그대로 당해 보라고?”
“고정하십쇼, 부회장님. 그래도 보석 허가가 난 걸 보면 무조건 집행유예입니다.”
“김 실장, 그 집행유예가 나한테 실형이고 감옥이야. 형 집행 동안엔 이 자리 넘겨줘야 하는데, 내가 지금 그걸 참아야 한다고.”
아뿔싸.
본의 아니게 부회장의 치부를 건드려 버렸다. 한명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건설.
입사 이래 부회장의 목적은 오로지 이 권좌를 차지하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형제들과 왕자의 난을 펼친 게 한두 번 아니다.
어렵게 지켜 온 권좌를 한순간에 내주게 되었으니, 집행유예네 가석방이네 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부회장님, 주주들 반응은 걱정 마십쇼. 되레 이 사건으로 우리 우호 지분이 더 탄탄해졌습니다.”
“뭐?”
“하청을 쥐어짜서 비자금 만들고, 그 비자금을 토대로 공사까지 따냈다. 모두 이 점을 높게 평가하더군요. 어차피 주주들은 회사를 성장시켜 줄 오너를 원하지 도덕적인 사람 원하지
않습니다.”
부회장은 위안이 됐는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다. 주식시장은 냉정하다.
그룹 오너가 회사를 위해 한 위법적인 일은 열정 과다로 이해해 주고 넘어갈 것이다.
“그래 길게 봐야지.”
“1천억대 비자금만 사재 출연해서 회사로 돌려놓으십쇼. 돈만 복구시켜 놓으면 법원의 처벌도 너그러워질 겁니다.”
“일단 오늘은 나가 봐. 내 자산에서 현금화할 수 있는 거 있으면 모조리 다 처분하고. 아, 급하다고 내 지분 건드리면 안 돼.”
“물론이죠. 좀 빠듯하지만 해외 부동산과 안전 자산 처분하면 이 돈 충분히 마련할 수 있습니다.”
김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부회장실을 나갔다.
부회장은 허망한 얼굴로 담배를 지져 껐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고, 이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부담이 앞섰지만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반드시 되갚아 주마.”
바로 공정위에게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것이다.
***
[속보 – 최영석 부회장 자백] [일감 몰아주기 모두 시인, 모든 돈 사적 용도로 사용] [반성 차원에서 개인 자산 매각, 비자금 내역은 사재 출연할 듯.]보석 허가 이튿날. 충격적인 소식이 세간을 강타했다.
부회장이 모든 혐의를 인정하며 공정위의 처분을 받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뜨뜻미지근한 반쪽짜리 자백이었다.
1천억이 넘는 모든 돈을 다 자신의 사적 용도로 사용했다고만 말했다. 이와 관련한 공기관장 및 국회의원 모두 검찰과 공정위의 그물망을 빠져나가 버렸다.
“검사님,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어설프게 꼬였습니다. 이놈들이 전략을 바꾼 것 같네요.”
“뉴스 보니까 최영석 부회장이 사적 용도로 썼다고 우기는 것 같던데…….”
“네. 취조를 아무리 해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합니다. 자기는 돈 준 적 없대요.”
담당 검사는 답답한지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박상수가 돈 오간 흔적까지 다 제출해 줬는데.”
“그거 다 차명으로 주고받아서 깊게 파악할 순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가 끝입니까?”
“애석하게도 법이 그렇습니다. 살인 사건 나도 범행 도구 못 찾으면 증거불충분이에요. 이건 더더욱 죄를 묻기 힘들 겁니다.”
현 상황은 준철에게도 의외였다.
최영석 부회장은 절대로 혼자 죽을 사람이 아닌데, 폭탄을 끌어안고 자폭 스위치를 눌러 버릴 줄이야.
정치권이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지만, 이 정도면 거의 손절을 당한 것 같다.
‘아니지. 이게 서로를 위해 더 깔끔한 거네.’
하긴 현 상황에서 로비 자금까지 밝혀지면 더 큰 풍파가 닥치지 않나.
차라리 그 비자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썼다고 둘러대는 게 더 모범 답안일지도 모른다.
“그럼 부회장 하나만 처벌해야겠군요.”
“그 처벌도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 나올진 모르겠습니다. 부회장이 1천억대 비자금 모두 회사에 돌려놓겠다고 밝혔거든요.”
“……처벌이 많이 가벼워지겠네요.”
“잘해 봤자 집행유예 3년? 저는 딱 그 정도 보고 있습니다.”
준철도 담당 검사를 더 이상 채근할 수 없었다. 다른 놈이 이런 말 했다면 줄 댔냐, 위에서 압력 내려왔냐 따졌겠지만. 같은 나이 또래의 이 젊은 검사는 부회장 앞에서 깽판을 치다
부장검사한테 쪼인트까지 까인 인물이다.
“저도 좀 허무하네요.”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인데요.”
“공정위는 과징금 얼마나 때리실 겁니까?”
“계산해 보니 한 180억이 최대치일 것 같습니다.”
“그럼 그냥 200억 불러 버리세요.”
“예?”
“저것들 지금 상황에서 과징금 거부 절대 못 합니다. 부르는 게 값이죠. 어차피 실형 물 건너간 거 10원 한 장이라도 더 뜯어냅시다.”
모처럼 죽이 잘 맞는 검사를 만나 준철도 기분이 좋았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200억으로 하죠. 근데 검사님, 오늘 부회장 마지막 심문이죠?”
“네. 하도 꾀병을 부려 대서 이제 심문도 더 못 하겠습니다. 못 한 말은 법정에서 해야지.”
“그럼 그거 제가 마지막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 같이 가실까요.”
준철이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부회장과 독대할 수 있을까요?”
“독대요?”
“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카메라랑 녹취 끄고 하겠습니다.”
“무슨 얘기기에 녹취까지…….”
“별 얘긴 아니고 하청 사장님들이 꼭 좀 전해 달란 얘기가 있어서 그럽니다. 솔직히 제일 원통한 건 그분들이잖아요.”
얼마간 생각하던 검사가 입을 열었다.
“까짓것 그럽시다. 어차피 취조실 가 봤자 했던 말 반복하는 수준인데.”
***
취조실에 들어서니 부회장이 싸늘한 얼굴로 노려봤다.
“오늘은 왜 검사님이 안 오시고 본인이 오셨습니까?”
“최영석 씨가 앵무새처럼 했던 말만 반복한대요. 하나 마나 한 심문이라고 제게 시간을 양보해 주셨습니다.”
“그럼 아픈 사람 그냥 보내 주시죠. 어차피 이젠 법정에서 가릴 일만 남았는데.”
부회장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들끓는 분노를 다 숨길 순 없었다.
“아픈 사람? 그 다발성 어쩌고저쩌고 하는 병 말입니까?”
“경우 없이 행동하지 마세요. 병은 병이고, 죄는 죕니다. 내 병환까지 웃음거리로 삼지 마시죠.”
“검찰에 출석할 때만 휠체어 타는 총수가 어디 한둘이에요? 그러지 말고 우리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시죠.”
준철은 취조실 거울과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녹취는 모두 껐습니다. 진짜 단둘이 얘기해 볼까요?”
“이보세요! 왜 자꾸 의뢰인과 변호사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 거요. 당신 수상해.”
“이런 분위기 싫으니까 둘이서 보자는 겁니다. 어때요?”
준철이 재차 묻자 부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나가 봐. 단둘이 얘기하지.”
“하지만…….”
“이쪽도 불법 녹취가 효력 없다는 건 알겠지. 만약 알면서도 그런다면 김 변호사가 이 사람 옷 벗길 수 있잖아.”
이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변호사가 무거운 궁둥이를 들고 나가자 그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꼭 두 사람이서 해야만 할 오붓한 얘기가 뭐요?”
“당신의 반쪽짜리 진술은 아무도 안 믿어. 천억대 비자금을 여의도에 한 푼도 안 뿌렸다는 걸 누가 믿겠어.”
“그래서? 나랑 단둘이 얘기하면 거기에 대한 자백이 나올까 봐?”
“아니, 무덤까지 묻어 둬. 어차피 다 밝혀 낼 생각도 없었으니까. 다만 손절당한 기분이 어떤가 싶어서 물어보려 왔어.”
“뭐?”
“돈 받을 땐 발 벗고 나서 줄 것 같은 의원들이 나 몰라라 하는 기분. 무척 비참할 것 같거든. 당한 기분이 어때?”
쾅-!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거 보쇼. 휠체어 타도 소용없다니까. 혼자서도 잘 일어나는 분이 왜 불편한 거 타고 다녀요.”
“오냐, 잘 아는구나. 그럼 한 가지 더 말해 줄까? 네들 아무리 용써 봤자, 나 어차피 집행유예로 풀려나.”
뼈아픈 사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유효한 말이다.
“나도 실형까진 안 바라. 근데 당신 집유 기간 동안엔 부회장 자리 유지 못 하잖아. 그거면 충분한 처벌이 되지 않을까?”
놈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 기간 동안 누가 한명건설을 차지하게 될까. 아, 어제 보니까 한명제약이 갑자기 테마주로 등극했던데. 주주들은 벌써부터 오너 바뀐다고 기대하나 봐.”
“그럼 나도 하나 말해 주지. 공정위가 안 그래도 미운털이 많이 박혔더군. 게다가 이번 사태로 적잖은 사람들이 너희한테 위기감을 느끼고 있어. 하나같이 권력자들이지.”
부회장은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근데 과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을까? 너뿐 아니라 미친 망아지 새끼 다루지 못했던 위에 놈까지 탈탈 털어 줄 거다.”
부회장은 비스듬히 웃었다.
“그때 가서 아무리 후회한들 소용없어. 네들이 이렇게 만든 거니까. 나는 당한 거 이상으로 갚아 줄 거야.”
대놓고 하는 협박에 준철도 마냥 웃을 순 없었다.
“기대가 되는군.”
준철은 그리 말하며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부당 계열사 지원. 한명건설에 대한 과징금은 200억으로 떨어질 거요. 불만 있으면 행정소송 해 봐요.”
겨우 200억 과징금으로 이놈과의 악연을 끝낼 생각 없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라는 걸 오늘 다시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