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손절 (2)
성에 안 차는 결과지만 사태는 수습 국면에 들어갔다.
이튿날 주가 공시엔 최영석 부회장의 사퇴 소식이 올랐다. 책임을 통감한다는 진부한 멘트였지만 영원히 은퇴하겠단 언급은 없었다.
검찰과 지루한 법적 공방을 펼치기 전에 신변 정리를 한 것이다.
⌞자진 사퇴 하는 거 보니 무죄 자신은 없나 보네?
⌞얼마나 해 처먹은 거냐? ㅡㅡ
⌞이걸 또 3심까지 끌 거지? 머릿속에서 잊힐 때까지.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그의 사퇴가 사실상 유죄 인정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와- 반장님. 최영석이가 바로 사퇴해 버리네요. 그만큼 재판 자신 없다는 거겠죠?”
“말해 뭐 해. 이미 다 들통난 마당에.”
“여론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어요. 이거 잘만 하면 실형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김 반장은 고개를 저었다.
“저것들은 사람 죽여도 집행유예야. 사퇴도 봐. 주총 열어서 해임을 시켜야지 왜 사퇴를 수리해?”
“하긴. 오너가 아니라 일반 경영인이면 내부감사까지 벌였을 텐데.”
“저건 나중에 돌아오겠단 뜻이야.”
두고 볼 것도 없다. 집유 끝나면 슬그머니 돌아와 있을 것이다.
“억장 무너지네요. 진짜로 힘들게, 힘들게 잡은 건데.”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그래도 쉽게 돌아오진 못해요.”
대화를 듣던 준철이 한마디 거들었다.
“부회장이 저 자리 집어던진 건 사실상 실형이나 다름없어요.”
“그래도 진짜 실형하곤 다르죠. 그리고 그 비자금 분명 정치권에 뿌렸을 텐데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잖아요.”
“맞아요. 이건 완전히 꼬리 자르기야.”
동감하는 바다. 진짜 중요한 건 그 비자금을 왜 만들었는지, 누구에게 뿌렸는지인데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래도 꼬리라고 하기엔 좀 깊게 찌르지 않았나? 머리는 아니어도 최소 뒷다리까진 잘랐다고 생각한다.
“잠시만. 이제 곧 기자회견 하겠다.”
한창 수다 삼매경에 빠졌을 때, 한명그룹이 예고한 3시가 다가왔다.
한명그룹은 그룹 차원에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해당 사태에 대한 첫 입장 발표였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정장을 입은 익숙한 사내가 강단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한명제약의 최영석 상무입니다.
차남 최영석이 처음으로 기자들 앞에 선 것이다.
-먼저 일렬의 사태에 대해 국민 여러분들께 사죄드립니다. 그룹 내부에서 파악한바, 최영석 부회장은 자신의 사적 용도를 위해 허위 법인을 세웠고, 그 법인에 일감을 몰아주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비자금 조성으로 국민 여러분들께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최영석 부회장은 이 일에 책임을 통감하여 그룹 모든 직급에서 사퇴, 남은 재판에서 최선을 다해 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원고가 넘어갔다.
-또한 저희는 부당 계열사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거, 공정위에게 과징금 200억을 부과받았습니다. 저희는 모두 승복했고, 과징금은 최영석 부회장의 사재로 납부할 것임을 알립니다.
그룹 차원에서 돈이 나가지 않는 걸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부회장의 일탈로 이미 주가가 미친 듯 빠졌으니, 주주들에겐 다행이라면 다행인 소식이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참으로 진부한 내용들이지만 이쯤에서 만족해야지 않을까.
그룹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늘 앞장서서 언론 발표를 해 왔던 게 부회장이다. 차남 최기석이 전면에 나선 건 처음 있는 일.
지금 이 순간 가장 피가 마르는 건 부회장일 것이다.
“흐흐. 반장님. 한명건설 주가 보세요. 사퇴 발표하니까 바로 10% 빠지는데요.”
“근데 한명제약은 갑자기 테마주로 등극했어요. 얼레리? 갑자기 상한가 쳤네.”
“한명그룹의 지배 구조가 바뀌게 될 거란 기대감 때문이겠지.”
“이야- 진짜 이러다 경영권 넘어가는 거 아닌가.”
공식 성명이 끝나자 반원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주식이란 참 오묘하다. 부회장의 경영권이 흔들리니 바로 다른 곳으로 줄을 서 버린다. 물론 최영석 부회장은 우호 지분이 탄탄해 이번 한 번으로 경영권이 날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치명상을 입은 건 확실해 보인다.
“반장님, 저희 미팅 언제인가요?”
“아, 이제 다 모이셨겠네요. 지금 가실까요?”
“네.”
준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래도 만족할 만한 조사 결과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게 빠졌다. 바로 이 사건의 진짜 피해자들.
***
국민들의 모든 관심은 비자금이었고, 이를 어디에 뿌렸는지였다.
한명건설의 사과 성명도 비자금을 만들어 죄송하다였지, 다른 입장 표명은 없었다.
그 과정에서 두 번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일감 몰아주기의 피해자인 하청 사장들. 이유 없이 일감을 뺏기고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아무런 사과도 동정도 못 받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결국 이들이 벌어야 할 돈으로 비자금을 만들고, 정치권에 뿌렸는데 말이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못내 미안하고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예상외로 격한 환영이 쏟아졌다.
“최영석이가 완전히 빤스바람으로 도망쳤더군요.”
“그놈 새끼 부회장 물러나게 만든 건 사실상 재판 자신 없단 뜻이죠?”
“혹시 실형도 가능합니까?”
이들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후련해 보였다.
“실형은…… 모르겠지만 유죄는 확실합니다.”
“집유는 몇 년이나 나올까요?”
“못해도 2년입니다.”
“그럼 최소한 2년 동안은 부회장직 유지 못 한단 뜻이네요?”
“네. 돌아와도 예전 같지는 않을 겁니다.”
하청 사장들은 그래도 현실 파악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불구대천 원수가 집행유예로 빠져나가면 절망하기 마련이건만. 이들은 이미 현실적으로 처벌 수위를 예상하고 있었고, 실망한 기색도 없었다.
준철은 콧잔등을 훔치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먼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명건설이 입장 발표에서 사과 한 번은 할 줄 알았는데, 모른 체하더군요.”
“어휴- 그것들 눈에 우리가 인간으로 보이겠어요. 기대도 안 했습니다.”
“팀장님이 사과하실 거 없습니다.”
준철은 서류를 내밀었다.
“그래도 보상은 받으셔야죠. 오늘 한명건설이 부당 계열사 지원 혐의 인정하고 과징금도 납부하겠다 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사장님들께서 하실 수 있는 민사 절차예요.”
“저희가 소송을 해요?”
“네. 자기들 입으로 부당 계열사 지원했다 밝혔으니 대가도 치러야죠. 물론 피해액에 대해 전액 보상받을 순 없을 겁니다. 그래도 꼭 부분 배상이라도 받아 내세요.”
마음이 아팠다.
한명건설 하나 믿고 생산 설비 늘렸다 파산한 업체들. 직원들 해고한 하청. 이것들을 다 어떻게 보상할까.
일감 몰아주기는 김성균으로 살 때 밥 먹듯이 하던 갑질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이런 미안함이 무색하게, 이들은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팀장님!”
“…….”
“솔직히 어떤 공무원이 우리 같은 놈들한테 이런 거까지 알려 주겠어요.”
“맞아. 딴 놈이었으면 이거 아예 진행도 안 시켰어.”
“저희도 이거 다 배상받을 욕심 없어요. 부분 배상이라도 받으면 많이 건진 거지.”
준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꼭 팀장님 말씀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 사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청 사장들은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 뒤 고맙단 인사가 또 수십 차례 이어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들이 떠나갔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되니 준철의 눈가가 시큰해졌다.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군번이 되는가.
“저도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낮게 읊조리며 서류를 정리했다.
이 죄를 씻으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
“예? 진급요?”
“뭘 그렇게 놀라. 징계가 아니라 진급이야.”
사건을 마무리 짓고 올라간 과장실.
종합 보고를 올리러 가던 참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진급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오 과장은 준철의 반응이 재밌는지 빙긋 웃었다.
“네가 사고만 안 쳤어도 더 빨리 전해 줬을 거야.”
“그럼…… 얘기가 다 끝난 겁니까?”
“응. 국장님께서 특별 추천해 주셔서 무리 없이 심사 통과됐다. 내년 1월에 본청 기획 조정관으로 갈 거다. 알지? 여기 요직인 거. 한 달 남짓 남았으니 미리미리 인사해.”
오 과장이 내민 진급 서류.
그제야 본청 기획관 4급 과장으로 발령 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뭐냐? 방방 뛰면서 좋아할 줄 알았더니. 본청 가기 싫어?”
“아, 아닙니다. 그보단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래 진급은 다 갑작스러운 거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놈은 흔치 않다.
“싫은 건 아니지?”
“네. 물론이죠.”
말은 그리했지만 속내는 복잡했다.
이제 겨우 5급 사무관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 아닌가.
최영석 부회장을 처음 만났고 놈에게 작은 잽도 날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놈과 시작하려던 찰나에 진급이라니…….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표정은 별로 반가운 기색이 아닌데?”
“…….”
“야, 내가 진급 소식 전해 주면서 이렇게 민망한 적은 처음이다. 대체 뭐냐?”
“아니 정말 놀라서 그런 겁니다. 죄송합니다.”
준철은 애써 웃음을 보였다.
하긴 갑작스럽긴 하다만 꼭 필요한 진급 아닌가.
팀장의 역할엔 한계가 있다는 건 진작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사건만 하더라도 만약 내가 과장이나 국장급이었다면, 정치권과의 청탁 관계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도
들었다.
“국장님이 섭섭하시겠군. 신경 많이 써 줬는데.”
“제가 춤이라도 춰 볼까요?”
준철이 어깨를 으쓱하자 오 과장이 만류했다.
“징그럽다. 그 꼴은 나중에 보자. 그나저나 이번 사건, 국장님께서 얼마나 신경 써 주셨는지 알지?”
“넵.”
“여의도 의원들한테 하도 전화가 와서 번호를 바꿨는데, 그 바꾼 번호까지 알아냈더래. 그 정도면 할 수 있는 거 다 해 주셨다.”
말하지 않아도 그 고마움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실로 어버이 은혜 같지 않았나.
금배지들이 줄지어 찾아왔을 때도 국장님은 흔들림 없이 조사를 진행하라 했다. 연루 명단을 언론에 뿌려 망신을 주라고 지시한 것도 국장님이다.
만약 김 국장이 외압을 막아 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이 사건은 진행 못 했을 거다.
“진짜 많은 걸 감수하신 거야. 당신 재임 자료까지 털겠단 협박을 받았는데도 이 사건 진행시킨 거야.”
그건 그만큼이나 자신 있단 뜻이기도 하다.
“나중에 꼭 따로 인사드려라. 내가 본 국장님은 원래 이렇게 정 안 주시는 분이야.”
“네. 좋은 자리에서 꼭 인사드리겠습니다.”
오 과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고생했다, 이 팀장. 아니지, 이제부터 이 과장이라 불러야 하나?”
“그래 주시면 고맙죠. 하하.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준철은 인사하고 자리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