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보복, 시작
최영석은 한명 그룹의 사과 성명을 시청한 뒤 한동안 곡기를 끊었다.
그룹의 대소사는 모두 자신의 입을 통해 발표되지 않았나. 명실상부 한명 그룹의 후계자였던 그는 이제 사옥에 얼씬도 못 하는 불청객이 되고 말았다.
“최 상무가 인사 발령을 냈다고?”
“네. 부사장과 이사 두 명을 교체했습니다.”
“당연히 그놈 똘마니겠지?”
“그렇습니다.”
부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권한대행으로 부임한 둘째가 임원 세 명을 자기 사람으로 앉혔다. 후계 구도를 노리고 있단 뜻이며, 이 싸움은 꽤 길게 이어질지도 모른다.
“너무 염려 마십쇼. 부사장은 어차피 은퇴할 사람이었고, 나머진 한직입니다.”
“그게 시작이겠지. 난 기석이 놈의 야망을 알아. 이젠 저 집무실을 나한테 안 주고 싶을걸.”
“그렇다고 제집 안방처럼 활개 칠 순 없을 겁니다. 우호 지분은 아직 우리에게 유리하죠. 사태를 얼른 수습하는 게 급선무 같습니다.”
부회장은 어지러운 생각을 떨쳐냈다.
이 지옥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려면 재판을 먼저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
옆에 앉아 있던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게 저희 공판 전략입니다.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말 길게 오가서 좋을 거 없죠.”
“2, 3심까지 끌지 말라는 건가?”
“네. 1심에서 모든 죄 자백하고 선처를 부탁하겠습니다. 형량은 집유 2년에 사회봉사 60시간 정도로 끝날 겁니다.”
“사회봉사라. 내가 보육원에서 똥 기저귀 몇 번 간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질까.”
“진부하지만 늘 먹히는 방법이죠. 그런 모습이라도 보여야 국민들도 안쓰럽게 봐줄 겁니다.”
쪽팔리지만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물의를 일으킨 재벌들의 필수 코스 아닌가.
“보육원이 마음에 안 들면 노숙자 무료 급식 봉사도 있습니다.”
“기왕 할 거면 사진 가장 잘 나오는 걸로 해 보지.”
“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자금을 돌려놓는 건데…….”
“그건 약속대로 내 사재 출연 할 거야. 김 비서, 일주일 안으로 정리할 수 있지?”
우길 것도 없고, 따질 것도 없었기에 재판 전략은 쉽게 마무리되었다.
판사 앞에서 가장 불쌍한 얼굴로 선처를 바라는 게 전략의 전부다. 자필 서명이 필요한 몇 가지 서류만 작성했고 변호사가 자리를 일어났다.
“아, 근데 김 변호사.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말씀하십쇼.”
“집유 2년 끝나고 나면 나 무조건 저 자리 복귀해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주총을 열어 정식 해임된 것도 아니고 자진 사퇴 하셨으니 복귀는 아무도 딴지 걸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최 상무가 미친 짓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우회적으로 경고 한번 하겠습니다. 더 이상 인사 발령 가지고 장난질 못 할 겁니다.”
우회적인 경고, 이건 최 상무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하겠단 뜻이다.
더러운 짓은 서로 많이 하고 살았으니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변호사가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부회장이 김 실장에게 눈을 돌렸다.
“김 실장. 난 속이 좁아 그런지 이 굴욕이 잘 안 잊히네?”
“최 상무도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약점을 쥐고 있는지 잘 알 겁니다.”
“기석이 얘기가 아니야. 공정위 그것들이 한 짓은 되갚아 줘야 성미가 풀리겠다고.”
“……부회장님. 심정은 알지만 당분간은 자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희번덕 돌아간 눈.
김 실장은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부회장은 이렇게 눈이 돌아갈 때마다 꼭 피를 보는 인간이다.
“참고만 있다간 내가 화병으로 돌아가시겠는데.”
젠장. 왜 불운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을까.
초점 없는 부회장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준다. 놈들에게 복수하기로 이미 결심이 섰다는 것을.
“풋내기 팀장 놈이 설치고 다니는 것까진 이해할 수도 있어. 정의감 넘치는 초임 검사, 기수마다 있잖아?”
“…….”
“그럼 적당히 세상 물정 아는 놈이 말렸어야지…… 왜 윗놈들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까.”
부회장의 분노는 자신을 칼질한 준철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중간에서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는데 그 조치를 취하지 않은 놈, 바로 김태석 국장인 것이다.
“김 실장, 그놈 한 번 털어 봐. 김태석 국장이라는 놈.”
“……재임 자료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자리까지 올라가면서 먼지 한 올 안 붙었겠어? 흔적 다 뒤져.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는지 보자.”
“부회장님. 전략실에서도 그 얘길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한데 그자는 정말 나오는 게 없더군요. 오히려 과잉 조사로 역공을 당했으면 당했지, 불미스럽게 덮은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럼 불미스러운 자료라도 가져와.”
김 실장은 무릎을 꿇어서라도 만류하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이미 복수심에 불타 이성을 잃은 부회장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성을 잃은 상관을 만류하는 건 신뢰만 잃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김태석 국장.
부임 4년 차로, 종합국에서만 16년의 경력을 쌓아 온 인물.
진급을 위해 잠깐 본청에서 일한 경력 말곤 모두 종합국에서 지냈다.
본디 공정위에서 종합국은 한직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김 국장의 약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출세 욕심이 없으니 딱히 줄을 댄 흔적도 없고, 외압에서도 자유로웠던 것이다.
재임 시절 문제 된 몇 가지 자료도 수사를 덮은 흔적이 아니라, 과하게 조사해서 역공을 당한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털어서 먼지 안 나오면, 먼지를 뿌려 버릴 수도 있다.
김 실장은 밤낮으로 조사해 그나마 문제 될 만한 사건 하나를 부회장에게 가져왔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력은 깔끔했습니다. 청탁이나 사건 무마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게 끝?”
“다만 사안에 따라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드려선 안 될 집단을 건든 적도 있더군요.”
건드려선 안 될 놈?
서류를 받아 든 부회장 눈에 생동감이 돌았다.
“뭐야? 이놈이 대한변협을 건드렸어?”
“네. 1년 전에 대한변협과 공정위가 크게 한 번 싸운 적이 있더군요.”
“뭔 사건이지?”
“법톡이라고 변호사를 중개해 주는 어플 하나가 있었습니다. 사이트 특성상 변호사끼리의 경쟁을 촉진할 수밖에 없는데, 대한변협이 여기에 제동을 걸고 나섰습니다.”
법톡은 ‘의뢰인과 변호사를 더 가깝게’라는 모토로 출발한 신생 기업이었다. ‘법’이란 게 끼어 있어 거창한 회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형적인 중개 사이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해당 기업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맞게 됐다. 그간 변호인과 의뢰인이 가까울 수 없었던 이유의 90%가 돈 때문이었는데, 수임료 경쟁이 시작되며
몸값이 떨어진 것이다.
변호사 몸값이 하루아침에 떨어지자, 한국변협도 더 이상 눈 뜨고 당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공정한 수임 질서를 무너뜨린단 이유로, 법톡에 가입한 변호사들을 무더기로 징계시켰다.
“3심까지 간 걸 보니 치열하게 싸웠구먼?”
“네. 근데 그 판을 깬 게 공정위였습니다.”
서류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공정위가 법톡 편을 들어줬거든요. 한국변협의 징계는 시장 질서를 제한하는 행위로 판단, 모두 경고를 때렸습니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법톡과 변협의 싸움은 변협의 완벽한 패배로 끝났다.
공정위는 변협의 징계가 시장 질서 저해 행위로 판단했고, 이를 법무부에 전달한 것이다. 이는 3심 판결에서도 반영되어 결국 법원도 법톡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걸 주도한 게 바로 김태석 국장이었다.
“흐하핫. 이 미친놈.”
부회장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판검사도 옷 벗으면 변호산데, 세상에 건드릴 놈들이 없어 변협을 건드려? 그래도 일관성은 있구만.”
“……부회장님. 근데 3심에서도 법톡 승리로 끝났습니다.”
“됐어, 그러니까 변협이 공정위한테 이를 갈고 있다는 거잖아? 우린 그 분노만 이용하면 돼.”
없는 죄야 만들면 되는 일.
부회장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건 청탁이야. 그치?”
“……예?”
“김태석이가 기업한테 청탁받고 손을 들어준 거라고.”
부회장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얘기, 그거면 된다.
“어이구야. 난 단순히 옷만 벗기고 끝내려 했는데 잘하면 콩밥까지 먹일 수 있겠어. 하긴 내가 당한 거 다 갚아 주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어쩌실 계획인지…….”
“의혹 하나만 제기해. 공정위가 기업 청탁을 받고 편을 들어줬다고.”
의혹. 이럴 땐 참 편리한 단어다.
아니면 말고라는 기적의 논리가 통용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김 국장은 고위 공직자라 1년마다 재산 등록을 했습니다. 저희도 한 차례 봤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습니다.”
“없으면 됐어. 근데 누구나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하잖아.”
“…….”
“어차피 그놈 정치권에 미운털 잔뜩 박혀 있다. 우리가 군불 좀 때 주면 어련히 다 알아서 정리될 거야.”
여의도와 청와대는 열렬히 환영해 줄 것이다. 제멋대로인 망아지 새끼 버릇 고쳐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유죄 입증? 그딴 건 사실 바라지도 않는다.
의혹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놈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이건 의혹이 해소돼도 복구할 수 없다.
김 실장은 보고를 올린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식음을 전폐하며 생기 하나 없던 얼굴에 만연한 웃음이 걸렸다. 구체적인 계획까지 말하는 걸로 보아 막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직감했다.
“아무래도 조력자가 많이 필요하겠군.”
부회장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애인 양 웃었다.
“정치권 인사는 내가 만난다. 이 사건 들어가면 감사원에서 바로 김태석이 칼질 할 거야.”
“……네.”
“감사원이 움직이면 바로 김태석이 직무정지 시킬 수 있어.”
부회장은 이렇게 올곧은 캐릭터에 대해 잘 알았다.
이런 부류는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의혹을 받고 있단 사실, 그것 때문에 조직 전체가 위태롭단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보통 놈이라면 그 상태에서 사직서를 제출할 것이다.
“……딱 거기까지만 하실 생각인지요.”
“그럴 거면 뭐 하려고 칼을 드나. 난 해임으로 끝낼 생각 없다. 콩밥은 아니어도 내가 당한 집행유예는 이놈도 받아야 돼.”
무시무시한 생각이 든다.
국회의원들이 나서 주면 없는 죄도 만들 수 있으니.
“김 실장, 내일 변협 가서 얘기 좀 나눠 봐.”
“무슨 말씀을 전할까요.”
“이거 아무래도 수상쩍어 보이는데, 공론화 한번 시켜 보라고. 돈 필요하면 말해. 내가 사재를 대서라도 이거 크게 키워 준다.”
변협도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공정위 때문에 몸값이 반토막 났는데, 누구보다 이를 갈지 않겠나. 아마 수임받은 사건도 제쳐 놓고 달려와 줄 것이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