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보복, 시작 (2)
한국변협 고석춘 회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김 실장을 맞았다.
천하의 한명 그룹도 변협에겐 바이어일 뿐이다. 재계엔 수많은 기업이 있고 한명 그룹과 소송을 펼쳐 본 변호사도 많다.
저자세를 보일 이유가 없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고 대법관님.”
“허허. 개업한 지가 언젠데. 고 변호사라 불러 주시오.”
“그래도 어찌 감히. 일반 변호사와 전관 변호사가 같을 순 없죠.”
“김 실장. 나 오늘 접대받으러 온 거 아니요. 우리 변협과 관련한 용건이라 해서 나왔지. 깔끔하게 그냥 고 회장이라 불러 주시구려.”
고 회장은 대화가 감상적으로 흘러가자 단칼에 잘라 버렸다.
그는 사실 이 자리가 마뜩지 않았다. 한명건설이 공정위에게 한 방 먹었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아닌가.
그런 놈들이 대뜸 연락해 법톡 사건을 운운한다. 불순한 목적이 훤히 보이니 고운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본론 꺼내기 힘들면 내가 먼저 말해도 되겠소?”
“네. 말씀하시죠.”
“우리한테 그 자료 보내 준 의도가 뭐요.”
직설적인 물음에 김 실장이 목을 축였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공정위가 법톡의 청탁을 받고 편을 들어줬다, 이게 전부죠. 저희가 드린 자료엔 김태석 국장의 자산 내역도 있습니다. 급격하게 불어난 흔적도 보셨습니까?”
“허허. 우리라곤 그자의 뒷조사를 안 해 봤겠나. 근데 그 돈은 김 국장 장인이 돌아가시며 남긴 유산이야.”
“몇 개 더 있습니다. 모친이 돌아가셔서 남긴 유산, 그리고 아파트를 두 채 가지고 있었는데 집값이 올라서 생긴 재산.”
고 회장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건 너무 치사한 거 아니오. 우리도 그자에게 감정이 좋진 않지만 무리한 의혹 제기하고 싶진 않아. 요즘 세상에 집값 올라서 떼부자 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핵심은 그게 아니라 그런 것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음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먼지 터는 이유가 뭐요. 우리 분노를 이용하겠다 아닌가.”
김 실장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네. 한배 타 봅시다.”
“뭐?”
“우린 그자에게 감정이 많고, 변협도 그자에게 감정이 많아요. 손을 안 잡을 이유가 있습니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그자는 우리만 적으로 돌린 게 아니에요.”
“그건 무슨 말이지?”
“정치권에서도 그자를 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제사상만 차려 놓으면 정치권이 기다렸다는 듯 사망선고 내려 줄 겁니다.”
위험한 소리가 계속되자 고 회장은 약간 위축이 되었다.
한명 그룹의 로비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정치권과 연계해 없는 죄 뒤집어씌우는 건 그들에게 일도 아니다.
“협회장님. 솔직히 이대로 당하실 겁니까? 청탁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싸움에 끼어들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요.”
“……없는 죄 뒤집어씌우려다 실패하면?”
“그러니까 뒤탈 걱정 없는 ‘의혹’제기로 시작하자는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이는 재산 내역. 또 모르죠, 김 국장이 정말 기업의 청탁을 받고 조사를 했던 걸지도.”
갑자기 구미가 확 당겼다.
공정위가 나서지 않았다면 재판이 3심 전패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모든 문제의 원흉이 김 국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만약 이걸 청탁 사건으로 몰면?
불구대천의 원수를 파멸시키는 것은 물론, 다시 법리를 다툴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된다. 다만 없는 죄를 씌워야 한다는 부담에 섣불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법관님. 솔직히 있는 죄를 덮는 거나, 없는 죄를 씌우는 거나 뭐가 그리 다르겠습니까.”
변호사는 모두 있는 죄를 덮는 직업. 이번엔 그 반대로만 해 보면 된다.
슬쩍 대법관이라 불러 봤는데 이젠 딱히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해당 사건을 비리로 만들면 공정위에서 다시 심리를 열 겁니다. 근데 전임자가 그 꼴 당하고 날아갔는데, 누가 법톡 편을 들 수 있겠어요?”
“흠…….”
“사실 이건 정치권이 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협회에서 바람 잡아 주면 감사원에서 김 국장을 털 거예요. 그럼 결과도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고 회장은 고민에 잠겼다.
“의혹 제기는 누가 할 거요?”
“당연히 저희가 해야죠.”
“그럼 우린 확성기 틀고 억울하다 떼쓰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일이 안 풀렸을 때의 책임도 저희가 지겠습니다.”
어떻게 언론에 터트릴진 모르겠지만 변협이 할 일은 하나다. 광화문에서 확성기 틀고 엄정 수사를 요청하면 끝이다.
생각을 끝낸 고 회장 입에선 희미한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한명 그룹은 참 못된 일 잘해. 흐흐.”
“협력해 주실 겁니까.”
“뭐 우리가 손해 볼 건 없겠군. 기왕 하는 거 김 국장 뼈도 못 추리게 해 줘. 그놈은 여기저기 적을 너무 만들었어.”
휘어지지 않으면 부러져야지 별수 있나.
포토라인에 서게 될 김 국장 얼굴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놈은 당해도 싸다.
***
갑작스런 준철의 진급 소식에 다들 헛기침만 해 댔다.
본디 동료가 진급하면 함께 기뻐하며 진급턱 내라고 하는 게 관례이건만 지금은 그런 축하가 나오지 않는다.
대성중공업부터 현 사건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달려왔는가.
종합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장르 불문, 다양하고 많은 사건을 다뤘다.
매사 열정적이고 성과가 확실했던 팀장, 그 사람과 더는 함께할 수 없다 사실이 섭섭하기만 했다.
“아, 뭣들 해. 초상집 온 것도 아니고. 축하합니다, 팀장님. 아니 이젠 과장님이라 불러야 하나.”
김 반장이 나선 후에야 반원들도 엉거주춤 축하 인사를 해 줬다.
“충분한 실력을 보여 줬습니다.”
“당연히 가셨어야 할 자리예요.”
“모두 감사합니다.”
정들었던 기분 때문일까. 축하를 받는데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 발령은 언제 나는 겁니까.”
“1월요. 아마 시무식 끝나고 임명장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럼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네.”
“아쉬운 대로 오늘 소주 한잔 어때요. 우리 솔직히 일 끝나면 또 일이라 제대로 된 단합대회도 못 연 거 같은데.”
분위기가 금세 달아올랐다.
“아- 좋지. 오늘부터 매일 한잔씩 해도 되겠다.”
“팀장님이 쏘시는 겁니다. 흐흐.”
준철도 기쁜 마음으로 반겼다.
“물론이죠.”
“좋아- 그럼 오늘 일 끝나고 한잔들 하자고.”
하지만 그런 여유로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
느닷없이 들이닥친 감사원은 국장실부터 쑥대밭을 만들었다.
“오늘부로 김태석 국장님은 특별감사 대상이 됐습니다. 재임 자료 모두 저희 감사원에 제출해 주세요.”
“내 재임 자료를 제출하라고?”
“네. 그리고 이번 주 안으로 본인에 대한 직무정지 심사가 열릴 겁니다. 해당 사건에 제대로 소명해 주십쇼.”
놈들이 내민 서류는 법톡과 관련한 자료였고, 김 국장이 해마다 신고한 고위공직자 재산 내역이 나와 있었다.
“감사가 아니라 감찰이구만. 내가 기업한테 돈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시기가 절묘하잖아요. 법톡 사건 맡은 이후 우리 국장님께서 부자 되셨습니다.”
“처가와 친가의 유산이라고 해명했을 텐데.”
“그렇게 자신 있으면 다시 한번 더 말씀해 주세요.”
김 국장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비아냥조로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자신을 청탁 사건이라 결론 내린 것 같다.
“한 가지만 물읍시다. 이거 대체 어디서 들어온 제보요.”
“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서 나왔죠.”
믿을 만한 소식통…….
이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권력자한테 나왔단 뜻이다. 출처가 한명건설인가, 여의도 의원인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보복성 조사임이 명백해진 순간이다.
김 국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어, 난데. 오늘부터 우리 종합감시국은 특별감사를 당한다. 아니, 내부 감사 말고 감사원에서. 어차피 표적은 난 거 같으니 어지간한 건 다 내 책임으로 돌려. 다른 과장에게도
알려 줘.”
***
“이렇게 털어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이건 우리랑 관계없는 자료라니까.”
“다른 국이랑 협력한 사안을 왜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는 겁니까.”
국장실을 초토화시킨 감사원은 한 계단씩 내려와 실무팀까지 박살 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그들은 진공청소기처럼 서류를 빨아들였다. 그중에는 과잉 조사도 있고, 미심쩍긴 하지만 혐의라고 단정할 수 없어 덮어 둔 사건도 있었다.
“아니, 신고당한 걸 어떻게 모두 조사합니까. 우리 재량하에 아니다 싶어서 진행 안 했소.”
하지만 이는 이대로 흠이 되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재량으로 덮었다?”
“말이 어떻게 그렇게 돼요?”
“당신들도 정치권 털 때 이렇게 털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이…….”
“책임지고 싶지 않으면 한마디만 하세요. 이거 다 본인이 덮었습니까, 아님 국장의 지시가 있었습니까.”
김 국장을 아무리 따르는 사람이라 해도 이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오롯이 자기 잘못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내 재량으로 덮었소.”
물론 그중에는 깡다구가 월등히 센 과장도 있었다.
“이보세요, 오 과장님.”
“같은 말 계속 두 번씩 하게 할 거요. 내가 했다니까.”
“허, 참. 충견이라더니.”
“뭐?”
“딴 놈들 다 도망가는데 아주 사이가 돈독하셨나 봐.”
오 과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만한 분이니까.”
“과연 그럴까. 지금 김태석 국장 기업 청탁 의혹 받고 있어요. 법톡에 청탁을 받고 유리하게 지시를 내린 겁니다.”
“그것도 나랑 상의하고 결정한 일이구먼.”
“자칫하면 본인도 쇠고랑 찰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 내 선에서 끝난다면.”
오 과장은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며 문 앞으로 갔다.
“서랍 세 번째 칸은 내 빤스랑 난닝구 있으니까 되도록 건들지 말아 주시고. 이 과장실 안에 있는 모든 자료는 알아서 빼 가쇼.”
그렇게 과장실을 나설 때.
멀리서 준철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과장님.”
“다음 달이 발령이야. 인사하고 다니기도 부족할 텐데 뭐 하러 왔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별일 아니야. 먼지 털이 하는 모양인데 일이 잘 안 풀리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복잡한 얼굴마저 숨길 순 없다.
준철은 이 사태에 굉장히 큰 책임감을 느꼈다. 갑작스런 감사원의 감사 그리고 먼지털이식 수사. 이 모두 정치권에서 보복할 때 쓰는 아주 저질적인 방법들이다.
“이거…… 한명건설 때문입니까.”
“굳이 그거뿐이겠어. 그간 정치권에 밉보인 거 한 번에 다 털리는 거지.”
“……과장님.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미력하겠지만 저도 돕겠습니다.”
“그럼 신경 끄고 진급 준비나 해. 네가 뭘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 과장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일그러진 얼굴을 녀석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