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무혐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흰 그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변협의 만행에 대해 폭로하고자 합니다.
협회라는 울타리 안엔 골품제보다 혹독한 변시와 사시라는 계급이 있었습니다. 너무 만연해 어느새 당연하다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를 타파해야 할 고석춘 협회장은 신음을 외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입에 재갈까지 물렸습니다.
법톡에 가입한 변호사를 무더기로 징계시키는 게 과연 상식적인 행동입니까?
변협은 법조인으로서 품위를 저버린 자에게만 징계를 내릴 수 있습니다. 변협이란 울타리가 저희 변시들에겐 멍에이자 족쇄였습니다.
……(중략)…….
이러한 독단적 결정으로 고석춘 협회장 이하 8인의 간부들은 공정위로부터 시정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근 제기된 김태석 국장과 기업의 유착 관계는 검찰 수사에 맡겨야 할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법톡이란 플랫폼 자체가 잘못되었단 지적은 부당합니다.
변협이 주장하는 ‘수임 질서’는 몸값 경쟁하지 말자는 일종의 카르텔입니다. 수임료 경쟁이 없다면 변시보다 경쟁력 있는 사시가 득세하게 될 테니까요.
하여 저희 일동은 검찰에 엄정 수사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유착 의혹과 별개로, 공정위가 내린 결정은 엄정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
변시 출신들의 규탄 성명이 끝나자 주변에서 플래시 세례가 펼쳐졌다.
특종이다.
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집회 신고도 없이 검찰청 앞을 장악했다. 메시지도 파격적이다.
변시가 사시 출신들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건 뉴스거리도 안 될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국민들도 이 차별에 대해선 어느 정도 당연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수임 질서’ 유지라는 명목하에 변시들을 학살하는 건 공감해 줄 수 없다.
“그러니까 사시 출신들은 법톡에 반감이 심하다는 거지? 몸값 경쟁하기 싫으니까?”
“황 선배, 오늘은 이거야말로 특종인데요.”
“결국 변호사들끼리의 밥그릇 싸움이잖아.”
김 국장의 영장 얘기는 이미 기자들 사이에서 한물간 뉴스가 됐다.
[변시의 반란] 발 빠른 기자들은 이미 헤드라인까지 뽑아서 보도국에 송고했다.
변시 집회를 주도한 사내는 뒤이어 300인 성명을 기자들 앞에서 공개했다. 이에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이 300인 모두 변협에 불만을 가진 변호사들입니까?
“예. 이것도 빙산의 일각입니다. 법톡 가입자를 무더기로 징계할 때부터 내부에서 극심한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왜 지금까진 침묵했습니까? 이 사건은 이미 3심까지 간 걸로 알고 있는데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시와 변시. 국민들이 어떤 눈높이로 저희를 평가하는지 아니까요.”
-이제 와 나서는 이유는요?
“저희는 법톡 같은 플랫폼이 변시 출신 변호사뿐 아니라 의뢰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확신합니다. 수임료가 낮아지는 만큼 국민들도 법에 더 가까워질 수 있죠. 하지만
변협은 기업 청탁 건으로 본질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태석 국장과 법톡의 유착 관계를 부정하는 겁니까.
“두둔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변협을 징계했던 공정위 결정이 결코 청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장 질서 수호를 위해서도 변협의 무모한 작태를 징계했어야 함이 맞습니다.”
***
예고되지 않은 시위는 검찰 경비대에게 금방 진압되었다.
“변협의 일원이자 반대 의견을 가진 변호사로 현 변협 간부들을 강력히 규탄합니다!”
대표자는 호송차로 끌려가면서도 변협 비판을 쉬지 않았다.
발버둥 치는 시위자들과 이를 진압하는 경비대.
이는 변시를 탄압하는 변협 간부들의 단면을 보여 주는 듯했다. 변시와 사시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준철은 그 역사적인 광경을 담당 검사, 지검장과 함께 감상했다.
‘……다행이다.’
10분 남짓한 시위가 끝나자 손에 힘이 다 풀려 버렸다.
담당 검사 찾아가서 항의하고, 법적 근거를 대며 따지고……. 다 필요 없는 일이다. 기자들 불러다 놓고 이판사판 나가는 게 장땡인 것 같다.
“저것들 뭐야!”
지검장이 꽥 소리를 질렀다.
“법조인이란 놈들이 집회 신고도 안 하고 집회를 해?!”
“지, 지검장님…….”
“저것들 싹 다 집어넣어. 그리고 서명에 동참한 변호사들 명단 파악해서 나한테 가져와.”
충격이 그렇게 컸나?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저러는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 방 먹으니 이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왜요, 명단 입수하면 군기 한번 싹 잡으시게요?”
준철은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하긴. 법조계가 다 한 다리 건너 한 다리지. 앞으로 그 명단에 있는 변호사들 만나면 형량을 더 세게 부르시려나.”
“깝죽거리지 마. 이 어린놈의 새꺄.”
“아이고……. 무슨 심정인진 알겠는데 말씀은 좀 가려 하세요.”
“네가 시켰냐, 저놈들?”
“명단 입수해서 내 이름 찾아보세요. 이준철이가 있나 없나.”
빈정거리는 건 그쯤 하기로 했다.
욕지거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걸로 보아 곧 멱살까지 잡을 기세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표적 수사 하지 마세요. 김태석 국장과 법톡의 유착 관계 확인된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리하게 기소, 영장 강행하시면…….”
준철은 끌려가는 이들을 가리켰다.
“본인도 옷 벗고 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해요. 부디 현명하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 뒤 육두문자가 터져 나오고 담당 검사가 지검장을 만류하는 촌극이 펼쳐졌지만, 준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불쌍한 놈. 이성이 돌아오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
[변시의 반란, 결국 밥그릇 싸움?] [변협, 정말 변호사를 대표하는 협회인가] [고석춘 회장, 일렬의 사태에 묵묵부답]이슈는 이슈로 덮였다.
변시의 예고 없는 시위 속에 김 국장의 기소, 영장 소식은 토막 뉴스로 전락했다. 국민들의 관심도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변협의 내부 차별로 옮겨 갔다.
-그럼 사시랑 변시랑 같은 취급해 주는 게 맞냐?
누군 합격자 천 명 시절에 쎄빠지게 공부해서 들어가고, 누군 대학원만 진학했는데?
⌞그럼 그다음부턴 실력으로 겨뤄야지. 법톡이 변시들한테 특혜 준 것도 없는데 왜 징계함?
⌞공정위가 그 싸움에 참전 안 했으면 뒷말 안 나옴. ㅡㅡ^
⌞ㅋㅋㅋ 공정위가 시장 질서 저해 행위를 처벌 안 하면 직무유긴데?
⌞법원에서 판결 다 떨어지고 나서 처벌해도 늦은 건 아님. 괜히 섣불리 나섰고 재판에 영향 줬으니까 이 사달 난 거.
설왕설래가 이어졌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변협의 대표성이 크게 훼손됐다는 것.
-다 필요 없고 쟁점은 그냥 하나잖아.
김태석이 법톡한테 돈 받았어? 그럼 그 내역 까면 되잖아.
⌞ㅋㅋㅋ 증거는 없는데 의혹만 무성.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뭘 받긴 받았겠지. ㅇ.ㅇ
⌞그러니까 뭘 받았냐고~ 검찰아, 제발 증거 나온 거 있으면 좀 까 봐.
“어떻게 됐어?”
“집시법 위반이긴 하지만……. 그냥 훈방 조치 했답니다. 청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셨답니다.”
“뭐? 청장님이?”
“네. 더 이상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겠다고…….”
9시 뉴스가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수사팀은 퇴근할 수 없었다.
뉴스를 기점으로 여론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본래 의혹만 제기해도 유죄로 인정해 주던 국민들이 점점 증거를 내놓으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하셨습니다. 이 사건에 다른 혐의 엮지 말라고요.”
가뜩이나 불안한데 청장님이 쐐기를 박는다. 별건 사건 만들지 말라는 엄명 아닌가.
원래 본수사 안 풀리면 별건 수사라도 쳐서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게 검찰의 숙명이다.
이걸 청장님이 직접 차단해 버렸으니……. 오로지 이 사건만 가지고 승부 봐야 한다. 한데 눈 씻고 찾아봐도 증거는 없다.
지검장이 한숨만 푹푹 내쉴 때 용기 있는 검사가 입을 열었다.
“지검장님. 아무래도 영장 청구가 악수가 된 것 같습니다. 증거라도 하나 잡아야 명분이 생기는 건데……. 너무 무모했어요.”
“…….”
“솔직히 벌써부터 표적 수사란 얘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만약 영장이 허가 난다면 그대로 역풍이 불 것 같습니다.”
그자의 말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역풍은 이미 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태석 국장이 주목받기 시작하며 그의 이력도 함께 조명됐다.
군납 비리 때 양당 의원들을 쥐 잡듯 잡았고. 대한전력 사건 때는 공공기관장 첫 처벌이란 기념비적 판례도 만들었다.
두 가지 사건 모두 정치권에게 미움받기 좋은 소재들이다. 아무리 국민들이 문외한이어도 이 정도로 구린 냄새를 맡지 못할 바보들은 아니다.
“…….”
지검장이 머뭇거리자 다른 검사들이 가세했다.
“지금 당장 영장 철회해야 합니다. 아니, 영장이 아니라 기소도 무리예요.”
“현재 여론을 보면 김 국장과 법톡을 의심하는 사람보다, 변협과 우릴 의심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평검사들도 불안감을 토로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지금은 여론이 살짝 기울었지만, 곧 변협과 검찰의 유착 관계를 의심할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해관계가 너무 잘 맞아떨어지니.
“솔직히 이미 3심까지 다 결과 나온 거 아닙니까? 변협의 징계가 부당했다고.”
“고석춘 회장. 대법관 출신입니다. 재판한 사람들 다 자기 선후배들일 텐데, 이런 결정 내렸다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더 나가면 검찰도 무사하지 못한다.
물론 더 나가서 명확한 증거라도 잡으면 모르겠지만. 증거 못 잡으면 변협과 한통속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지검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영장 철회가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사실상 우리 입으로 무혐의라 발표하는 거야. 정말 그래도 될 만큼 김태석이 재산 깨끗해?”
모두들 눈을 맞추지 못할 때, 처음 총대를 멨던 눈치 없는 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강행해도 어차피 영장 판사가 기각시킬 겁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 손으로 철회하는 게 낫죠.”
“…….”
“그리고 전 김태석 국장 재산 내역 깨끗해 보입니다. 다른 재임 자료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법톡한테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