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무혐의 (4)
-답변해 주십쇼! 지금 표적 수사 의혹을 제기하시는 겁니까?
너무 티가 나게 말을 흘렸나. 눈치 빠른 기자들은 이미 저의를 간파한 듯 보인다. 그걸 시작으로 기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그렇다면 의심 가는 출처가 있습니까?
-양당 의원들도 가세했는데 여기와도 연관이 있다 보시는지요?
-혹시 한명그룹 아닙니까? 대한전력 사태부터 비자금까지…….
더 위험한 질문이 나오면 곤란하다.
“책임질 수 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태가 어떻게 이리 커졌는지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하고 있죠. 모쪼록 검찰이 납득 가능한 설명을 해 주길
바랍니다.”
홀연히 사라지자 기자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아니 잘 나가다가 또 왜 밀당이야?”
“표적 수사 같다는 말 한 마디가 그리 어렵나?”
“어렵긴 어렵지……. 그러다 또 표적 수사가 아니면 공수 교대되니까.”
불쌍한 기자들이다. 양측은 서로 의혹만 제기할 뿐 이렇다 할 증거 하나 내놓지 않는다. 빈 퍼즐을 찾으러 다니는 건 기자들의 몫.
“이거 또 우리가 기사 내면 나중에 가서 추측성 기사였다고 발뺌할 거지?”
한두 번 당해 보는 일도 아니다. 막상 그렇게 기사 써서 시끌시끌해지면 기자들이 추측성 기사를 썼다고 매도할 놈들이다.
하지만 세월 좋게 엉덩이만 붙이고 있을 순 없다. 발 빠른 기자들은 이미 속보를 타전했고, ‘표적 수사 의혹’이란 말만 뺀 아슬아슬한 기사 제목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김 선배, 보도국에서 연락 왔습니다! 이미 영성일보가 속보 터트렸다는데요.”
“우린 기사 타이틀도 못 뽑았습니다.”
발표는 끝났다. 이젠 언론사 간의 속보 경쟁.
우후죽순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며 선임 기자 한 명이 결단을 내렸다.
“……공정위 관계자, 명백한 표적 수사. 이걸로 헤드라인 따자.”
“예? 하지만 저 사람은 표적 수사란 말을 직접 꺼내진 않았는데…….”
“본새를 봐라. 저게 표적 수사 의혹 아니면 뭐냐? 그리고 사건이 이렇게 커지는 건 표적 수사가 아닐 수가 없어.”
“……결국 추측성 기사를 써야겠군요.”
“일단은 터트려. 나중에 문제되면 그때 가서 수습하면 되는 거고. 막말로 지들이 말을 애매하게 한 게 잘못이지.”
선임 기자는 혀를 끌끌 차다 불현듯 돌아섰다.
“아니다, 어차피 표적 수사 의혹 다 쓸 텐데 좀 더 자극적인 거 없나? 김 기자, 이거 수사 사주한 거 한명그룹이 가장 유력해 보이지?”
***
[재심의 결과 발표, 아무런 단서 없어] [변협에 대한 공정위 징계는 정당] [공정위 관계자, 명백한 표적 수사 주장] [사태의 파장은?]치열한 보도 경쟁 덕분에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뉴스를 탔다.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다는 건 그날 9시 뉴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김 국장 의혹 일색이던 뉴스가 순식간에 검찰 표적 수사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기특한 언론사 몇 곳은 한술 더 떠 한명그룹까지 거론했다.
사실 한명그룹이 거론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태가 있기 바로 직전에 두 번 연속 공정위에 당하지 않았나.
김 국장 커리어가 조명되며 그가 어떤 기업에 원한을 샀는지도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돼.”
“그러게요. 한명그룹 이제 아차 싶겠습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반원들은 쏟아지는 의혹 기사들을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선 언론사에 익명 제보를 해 버리고 싶다. 최영석이가 시킨 일이라고. 아주 사소한 근거라도 하나 있었으면 당연히 그리했을 거다.
“팀장님, 기자들이 냄새 다 맡은 거 같습니다.”
“그러네요.”
하지만 이를 전해 듣는 준철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무혐의 발표 때문에 그러시죠?”
“…….”
“검찰이 심통을 좀 심하게 부리네요.”
그도 그럴 것이 검찰이 아직까지 강짜를 부린다.
사실상 끝난 수사이건만 계속해서 무혐의 발표를 미루고 있지 않은가.
준철은 그 무엇보다 이것이 걸렸다. 김 국장의 누명이 바로 자신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솔직히 팀장님이 할 수 있는 거 다 하셨습니다.”
“맞아요. 삭발 시위 현장에서 맞삭발 해 버리는 게 어디 흔한 일입니까?”
준철은 휑해진 머리를 어루만졌다.
고마운 마음이 국장님께 조금 전달됐으려나.
이까짓 머리는 솔직히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한 달이면 다 자라나는 머리……. 명예가 실추된 김 국장의 괴로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준철은 감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서류를 들었다.
“재심의 결과 검찰에 다시 한 통 보내 주세요. 만약 이번 주 안으로도 무혐의 발표 안 하면……. 진짜 끝장 봅시다.”
***
“난 아무래도 이번 생에 지은 죄가 많나 봐. 말년을 편하게 보낼 팔자가 아닌가 보이-.”
“…….”
“우리 한명그룹 임원들에게 특별히 고맙지 뭐야. 내가 밥숟갈도 못 들 정도로 기력이 쇠했는데, 뉴스를 보니 눈이 번쩍 떠지더군.”
한명그룹 꼭대기 층에선 진풍경이 펼쳐졌다.
최영호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지 벌써 5년. 2세 체제로 돌입하며 남이나 다름없던 전(全) 계열사 사장들이 한 자리에 집합당한 것이다.
“내 장례식을 좀 일찍 했다 쳐. 오랜만에 얼굴들 보니 반갑지?”
한때 그룹을 호령했던 최 회장은 몰라보리만치 노쇠해져 있었다.
팔에 꽂은 링거와 밑에 단 오줌주머니는 그가 살날이 많지 않다는 걸 말해 주었다.
“왜들 말이 없어?”
“죄, 죄송합니다.”
“자네들이 왜 죄송해. 자식새끼 망나니로 키운 내가 죄송해야지.”
세 아들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네. 임원들, 더 이상 줄 서지 마.”
“…….”
“그룹 내 수상한 자금 흐름이나 비리가 있으면 감사과로 달려가. 내부 고발 적극적으로 하란 말이야. 만약 알면서도 묵인하는 임원이 있으면 공범으로 알겠네. 내 손으로 모가지를 직접
칠 게야.”
기력 없는 목소리였지만 눈빛만큼은 총기를 잃지 않았다. 자기가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사람이다.
“아직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겠지?”
“예…… 알겠습니다.”
“자네들한테 할 말은 다 끝났으니 이만 물러가. 최 이사와 최 상무도.”
두 아들과 임원들이 부리나케 물러가자 최 회장의 시선이 이 문제의 원흉에게 향했다.
“부회장, 아니. 장남.”
“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일감 몰아주기 의혹이 아직 재판 중이라지? 선택해라. 실형을 살래, 아님 경영일선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대주주로 살래.”
“예?”
“검찰을 그렇게 부추겨서 이 사달이 났잖아. 이젠 네놈에게 우호적인 검사도 없을걸.”
“아, 아버지!”
“검사가 집행유예를 구형할 거란 생각은 집어치워라. 최소가 3년이다.”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하지만 이제 아들도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
“둘 다 포기 못 합니다.”
“뭬야?”
“형량은 이미 집유 2년으로 합의됐습니다, 그리고 제 비자금은 다 여의도로 상납해 공사 따낸 겁니다.”
“회사를 위해 썼다고 더럽게 만든 돈이 깨끗해지진 않는다.”
“그래도 만회할 자격은 있는 거 아닙니까.”
아들놈의 말대꾸에 최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이내 맥이 풀렸다.
“……네놈이 이젠 내 말도 듣지 않는구나. 근데 어쩔꼬? 내가 아무리 오줌주머니를 차고 있어도 의사가 1년은 더 살 거라던데.”
“그럼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만회하겠습니다. 이대로 불효자 되긴 싫습니다.”
최 회장은 문득 인생무상을 느꼈다.
자식이 처음 드는 반기다. 하지만 이미 지분 이전은 상당부분 끝났으며, 자신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고얀 놈.”
“…….”
“한 마디만 한다. 이 사태 쉽게 수습할 생각 마. 수사팀장이었던 지검장 정도는 사퇴시켜야 할 거다. 그리고 무혐의 발표 미루지 마라. 지금 공정위를 약 올리는 건 독이다.”
“그 말씀은 꼭 따르겠습니다.”
할 말이 끝나자 최 회장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최영석 부회장이 나갔을 때 그의 옆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인생무상허이. 저놈이 이젠 이 아비 말도 안 들어.”
“회장님, 오늘 너무 무리하신 것 같습니다.”
“알아는 봤나?”
“네. 표적 수사 의혹이 계속되고 있지만 지검장 사퇴하면 곧 잦아질 듯합니다. 혹시 몰라 메이저 언론사에 광고도 넣어 놨습니다.”
큰 사건이 아니니 곧 잊힐 것이다. 언론만 잠잠해진다면.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한 대 맞으면 꼭 두 대로 갚아 줘야 하는 저 철딱서니에게 그룹을 맡겨야 하다니.
“이번 주 내로 주총 열어. 안건은 부회장 징계 건.”
“예?”
“저놈이 실형을 안 산다면 내가 살게 해야지. 자격 정지 최소 3년 이상으로 부과해.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내 아들놈들 다 자리에서 사퇴시켜. 당분간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간다.”
이미 사퇴한 부회장을 주총에 다시 소환하는 건 부관참시나 다름없다. 회장님의 징계 의사는 명백하다.
“하지만 회장님…….”
“나도 알아. 어차피 나 죽고 나면 말짱 황이라는 거. 그래도 경각심은 줘야지? 자식에게 드는 내 마지막 회초리일세.”
“알겠습니다. 그럼 곧 주총 열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물러나자 최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그룹을 물려주면 과연 아들들이 잘 지켜 낼 수 있을까?
그룹의 앞날이 벌써부터 까마득해지는 것 같다.
***
최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난 이후. 검찰은 곧 김 국장에 대한 무혐의를 발표했다.
아울러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을 지고 서울지검장이 자리에서 사퇴하였다. 표적 수사 의혹이 계속 커지는 시국이었지만 지검장 사퇴로 모두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뉴스는 바로 한명그룹 삼형제 동반 퇴진이었다.
주가 공시를 통해 주총이 소집되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최영석 전 부회장의 해임이 결정 났다. 전임자를 심판대에 다시 올리는 건 흔하지 않는 일이다. 그들의 이런 결정은
간접적으로나마 표적 수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전문 경영인 체제? 참, 나 이거 얼마나 간다고.”
“그러게요. 어차피 최 회장이 죽고 나면 다시 자식들 간의 삼파전 아닌가요.”
죽을 때가 되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그렇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행여나 있을 논란을 싹 잠재워 버렸다.
그렇다 보니 반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태반이 최 회장에 대한 욕이었지만, 그중에도 축하할 만한 소식이 껴 있었다.
“팀장님, 드디어 무혐의 발표 나왔네요. 김 국장님 바로 복귀하셨다 합니다.”
“아, 그래요?”
“네, 과장들을 소집해서 회의하신다고 하네요.”
이럴 때가 아니다.
얼른 가 보고 싶다. 가서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전 그럼 잠시.”
“근데 오늘 중요한 얘기를 하신다고 다른 사람은 오지 말라 했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좀 분위기가 심심찮다고 하던데.”
순간 불운한 직감이 들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