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무혐의 (5)
똑똑.
“누구?”
“종합국 이준철 팀장입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구먼. 들어와.”
제발 그 직감이 아니길 빌었다. 이 사태의 피해자가 물러나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땐, 이미 휑하게 빈 국장실이 눈에 들어왔다.
김 국장은 주섬주섬 책상 정리를 하며 싱긋 웃었다.
“마침 일손이 부족했는데 잘됐다.”
“국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됐다. 오늘 나한테 할 말 있다고 덤빈 놈이 몇 명인 줄 알아? 일단 이 침대나 옮겨 봐.”
김 국장은 라꾸라꾸 침대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중얼거렸다.
“아니다, 어차피 후임자도 여기서 노상 자고 다닐 텐데 두고 갈까.”
“…….”
“아, 뭐 해? 안 거들고. 설마 구경만 하러 온 거야?”
계속해서 대화 주제를 돌리려 했기에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국장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검찰이 무혐의 발표하고 지검장이 사퇴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봐도 명백한 표적 수사였습니다.”
피해자가 왜 물러나야 하는가.
“좀만 더 견디시면 실추된 명예도 곧…….”
“나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이 나이 먹으니까 이젠 책상에 앉아 있어도 골프 생각만 나. 나도 여생 편안하게 보내야지.”
“하지만…….”
“이미 위원장님께 내 사직서 전달했다. 수리됐고 다음 정기 인사 때 발표 날 거야.”
한발 늦었다. 아니 많이 늦었다. 위원장이 사직서를 단번에 수리하진 않았을 터.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많은 얘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자넨 아주 머리를 시원하게 밀었구먼.”
김 국장은 준철의 반삭 머리를 보며 웃었다.
“젊은 친구가 그렇게 외모에 신경 안 써도 되나? 듣자 하니 애인도 없다더구만.”
“한 달이면 곧 자랄 텐데요. 국장님 괴로움에 비하면 별것도 아닙니다.”
“왜 자꾸 얘기가 그쪽으로 쏠리냐. 그냥 좀 덕담이나 나눴으면 싶은데.”
“감사하단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준철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김 국장도 더는 웃지 않았다.
“만약 국장님께서 외압을 막아 주시지 않았다면 여기까지도 오지 못했을 겁니다.”
“크허허. 아는 놈이 그리 사고를 치고 다녀? 뭐 죄책감 자극하려 하는 말은 아니지만, 네가 사고를 좀 덜 치고 다녔으면 한 1년 더 이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김 국장이 슬쩍 어깨를 쳤다.
“근데 또 그렇게 재미없게 은퇴하는 건 내 성미가 아니거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아니야. 위원장님이 그러시더군. 이번 사태로 내가 전 국민들에게 PR을 제대로 했대. 하긴 검찰, 감사원이 그렇게 깠는데 하나도 안 나왔으면 내가 깨끗하다는 건 증명됐잖아.”
“그럼 좀만 더 있어 주십쇼.”
김 국장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계속 붙어 있으면 놈들은 계속 공정위를 흔들어 댈 걸? 난 딱 여기서 물러나는 게 맞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지만 사실 큰 트라우마가 생겼다.
재임 자료가 모든 국민들에게 까발려지고, 감사원이 들이닥치는 경험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으면 놈들도 가만있지 않겠지.
“떠나는 사람 걱정 말고, 남아 있는 자신이나 걱정해. 이 팀장도 이젠 혼자 서야지.”
“예…….”
“자네 진급 소식은 들었나?”
“네. 본청 기획실 쪽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국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거라고…….”
“오 과장이 별 소릴 다 했군. 솔직히 기획실은 뭐 때려잡고 판 벌이는 곳은 아니다. 각 지방 사무소에 조사 좀 해 보라고 지시하는 곳이지. 설명하자면 컨트롤 타워 정도?”
“네, 알고 있습니다. 저도 금방 돌아올 생각입니다.”
과연 그럴까.
요직을 거쳤으면 욕심이 나는 것도 사람인 법인데.
“과장이란 자리, 생각보다 막중한 자리다.”
“네.”
“자네가 보고할 사람 하나가 없어지는 거야. 그리고 밑의 사람도 부릴 수 있고.”
공정위 과장. 4급.
지휘부 말단인 자리이며, 이 라인부터 수사를 직접 기획할 수 있다.
다른 과와의 협조가 필요하면 협조 요청도 할 수 있다.
김 국장은 책상에 있는 자료들을 서류 박스에 넣었다.
“나중에 돌아오면 팀장들 너무 들들 볶지 마. 사람이 다 자기 같을 순 없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김 국장은 흐뭇하게 웃더니 책상에 있는 서류를 들었다.
“아, 이걸 내가 전달하게 됐구먼. 받아. 자네 발령장이야.”
서류를 받아 드니 문득 실감이 났다.
세종으로 떠나는구나.
“회포는 나중에 풀자. 그간 고생 많았다. 이 팀장, 아니 이준철 과장.”
그 문구를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다음 소식입니다. 한명그룹이 삼형제 동반 은퇴를 한 가운데, 차기 경영진이 발표되었습니다. 주요 멤버들은 모두 사장급들로, 당분간은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갈 전망입니다. 불확실성이
해소되며 주가가 안정세를 찾아가는 모양새지만, 이 체제가 오래갈 것 같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입니다.
-최영석 회장이 병환 중에 있어, 유고 시 다시 경영권 싸움이 치열해질 수 있단 관측인데요. 그룹 주요 계열사인 건설을 놓고 삼형제의 지분 전쟁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한편 일감 몰아주기 등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던 최영석 전 부회장의 공판이 어제 처음 열렸습니다. 검찰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2년을 구형…….
한명그룹의 집안 문제는 심심한 연말을 뜨겁게 달궈 주었다.
시총 1위 기업의 지각변동은 주주들에게 예민한 문제다. 이번 사태로 거의 승계가 확실했던 최영석 체제가 흔들거렸으니, 주가가 작전 세력을 만난 듯 요동쳤다.
혼란을 틈타, 검찰은 비자금 1천억대에 집유 2년이라는 사상 초유의 솜방망이 구형을 신청했다. 딱히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검찰은 자존심도 없나? 그렇게 농락당해 놓고서 어떻게 집유를 구형하냐?”
“누가 아니래요, 떡검들 아니랄까 봐.”
“저렇게 쇼하는 걸 보면 집유 2년으로 그냥 확정된 것 같습니다.”
이 사태의 주역이었던 반원들은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래도 최 회장이 마지막에 큰 결단을 내리고 갔습니다. 주총을 열어서 바로 최영석한테 자격정지를 때려 버렸어요.”
“그러게. 자격정지 3년은 최영석한테 징역이나 다름없을 텐데.”
“다 쇼다. 최 회장이 죽고 나면 뭐 이사회가 가만있을 거 같아? 비상 경영이다 뭐다 핑계 대면서 얼른 모셔 올걸.”
비관적인 전망이 아니었다.
주총이 내린 징계는 최 회장이 죽기 전까지만 유효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오히려 죽고 나면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 펼쳐질걸.”
“그럼 더 좋은 거 아닙니까. 서로 견제하느라 비리 같은 걸 저지르기 쉽지 않을 텐데.”
“재벌 2세들 생리를 모르냐? 서로 덮어 줬음 덮어 줬지 비리를 안 저지를 놈들이 아냐.”
“쉿. 시무식 시작합니다.”
반원들은 낄낄거리길 멈추고 단상을 바라봤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지나고 어느새 새해다. 오늘은 공식적인 업무에 들어가는 첫날인 시무식이다.
‘공정위 가족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위원장님의 신년 연설이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아이고…… 벌써부터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네.”
동고동락했던 준철이 오늘은 이들과 함께 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명장 발표 언제야?”
“올해의 공정인상 끝나고요.”
“격세지감이네. 저걸 우리가 작년에 탔나, 재작년에 탔나…….”
“재작년이요.”
뒤돌아보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흘렀다.
젊은 팀장과 함께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능력과 별개로 팀장이 확실히 어리긴 한 모양. 젊은 팀장이 진급하고 본청으로 간다는데 꼭 장성한 자식을 출가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올해의 공정인들이 자리를 비켜 줬고, 인사 발령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내년 인사 발령자들을 발표합니다. 종합국의 이준철 팀장, 카르텔국의…….
보통 9급 출신들이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5급 사무관이 한계다.
무대에 오른 예비 서기관(4급)들은 대부분 행시 출신인 젊은 사무관들이었다.
10여 명 남짓한 진급 대상자 중에서도 까까머리 준철은 유난히 튀었다.
“여러분들처럼 유능한 사무관들이 있어 나라의 미래가 밝습니다. 공정위를 대표해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과장은 지휘부 말단이자, 실무 최선단으로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처럼 여러분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십쇼.”
“기업 간의 건전한 거래문화, 시장 질서는 모두 여러분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짧은 축사를 끝낸 위원장이 임명장을 건넸다.
“이준철 사무관 이하 10인을 과장에 임명함.”
객석에선 축하의 박수가 흘렀다.
***
“축하드립니다, 팀장…… 아니 과장님. 이제 얼굴도 잘 못 보겠군요.”
“아니에요. 2년 채우고 금방 돌아올 겁니다.”
“에이~ 기획실에 가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일합니다. 현장 생각은 하나도 안 날걸요.”
“박 조사관, 뭔 쓸데없는 소릴 해? 본청 기획실은 놀면서 일하냐?”
“우리처럼 현장을 뛰어다니진 않잖아요.”
반원들이 섭섭한지 객쩍은 농담을 건넸다.
준철도 웃음으로 응대했다.
“제가 현장에서 날아다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2년 뒤에 다시 뵙죠.”
“오더라도 종합국은 오지 마세요. 카르텔국 같은 데 가셔서 국장도 다셔야죠.”
“꼭 종합국으로 오겠습니다.”
“하하, 참.”
“짐 정리는 다 끝내셨죠?”
“네, 택배로 다 부쳤습니다.”
“그럼 오늘 소주나 한잔하죠.”
“그럴까요? 제가 사겠습니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불쑥 침투했다.
“나한테 사기로 한 술은 언제 사?”
“어, 과장님.”
“많이들 바쁜가?”
“아닙니다.”
과장님이 끼자 반원들이 슬며시 빠졌다.
“얘기들 나누십쇼. 먼저 가 있겠습니다.”
오 과장은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말했다.
“아쉽지?”
“네, 아주 조금요. 근데 어차피 금방 돌아올 겁니다.”
“아까 하는 얘기 들었다. 꼭 종합국으로 돌아온다는 약속 지켜.”
“흐흐, 저 오실 때쯤이면 과장님 안 계시지 않습니까.”
“갈 때 가더라도 믿을 만한 놈한테 자리를 넘기고 가야지.”
“평소에 저 별로 안 믿으시지…….”
“이 자식이!”
오 과장은 등짝을 때렸다.
“내가 안 믿었으면 네가 이렇게 사고 치고 다닐 수 있었을 것 같냐?”
“흐흐, 농담입니다. 과장님도 회식 함께하시죠.”
“내가 거기에 가면 분위기가 살겠냐? 흐흐. 오늘은 됐고, 나중에 한잔하자.”
“아, 예. 근사한 곳에서 모시겠습니다.”
“흐흐, 기대하지.”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축하한다, 이준철 과장.”
《공정거래위원회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