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화려한 귀환 (3)
공무원에게 4급 과장은 일반 회사 임원직과 같다.
말단 임원이긴 하나 임명식도 열어 주고, 타 부서에 소개도 시켜 주며 나름 위신을 세워 주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 종합국엔 이런 예우 또한 사치인 듯 보였다.
부임하자마자 첫 사건을 맡아 버렸으니…….
팀·과장 대면식은 정식 회식 자리가 아닌 차담회로 대체되었다.
‘괜히 왔나.’
준철은 헛기침을 하며 명단을 들었다.
공정위 1과엔 총 5개의 팀장이 있었다. 과거 준철이 그러했듯 이들은 주요 현안마다 준철에게 보고해야 하며, 조사의 주요 결정을 자문 받아야 한다.
이는 권위만 앞세운다고 될 게 아니다.
팀-과장간 신뢰감 형성이 필수인데…… 과연.
집무실에 앉아 약속 시간을 기다리니 세 명의 중년인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과장님. 1팀 김기택 팀장입니다. 나머지 두 팀장은 파견 근무 중이라 부득이 저희만 오게 되었습니다.”
“예, 어서 오세요.”
준철은 환히 웃으며 이들을 환대했다.
종합국의 대체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다.
자리에 오지 못한 두 팀장은 행시 출신의 팀장으로 현재 약관심사과에 파견 중이었다.
퍽 아쉬웠다. 행시 직속 후배이기도 하고, 나이도 어려 그나마 상대하기 편한 사람들이었는데.
“나중에 부임턱 제대로 내겠습니다. 오늘은 차나 한잔하시죠.”
집무실엔 찬바람이 불었다.
사실 이 자리는 준철에게도, 그들에게도 매우 불편한 자리였다.
5급 사무관은 행시들에겐 출반선이지만, 9급 출신들에겐 종착점이다.
최소 20년 이상씩 구른 이들이 나이 어린 과장을 모시게 되었으니, 서로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제 집무실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자주 와서 커피라도 한잔해 주세요.”
그런 불편함을 이기고 준철은 최대한 이들을 환대해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세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 말을 꺼냈다.
“과장님, 사실 저희 사정이 여의치가 않습니다. 타국에서 계속 지원 요청해 대지, 민원은 밀려 있지, 할 일이 산더미죠.”
꺼내는 말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사실 과장님 이전 이력은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팀장 때 굵직한 사건들을 소신껏 처리하셨더군요. 한데 사람이 다 능력치라는 게 있으니…….”
“저희 생각도 좀 해 주셨음 합니다.”
에둘러 말했지만 그 뜻은 정확히 이해했다.
과장은 타 부처와 미팅하고 일을 가져오는 사람.
한마디로 이들은 일 좀 열심히 하지 말아 달란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참, 첫날부터 드릴 얘긴 아니었는데.”
“아니요. 귀담아 듣겠습니다. 저도 무얼 염려하시는지 압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그 밖에 또 고충이 생기면 말씀해 주세요. 이 자린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네. 그럼 저흰 이만.”
그렇게 그들이 나갔을 때, 준철은 묘한 회의감이 들었다.
4급 과장…….
이 자리가 얼마나 막중한지 그제야 체감되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저 팀장들을 지휘해야 하는구나.
안타깝지만 오늘 첫날엔 저들의 마음을 얻진 못한 것 같다.
***
“어서 오세요, 이 과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자국 팀장들에겐 굴욕을 당했지만, 두 팔 벌려 준철을 환영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카르텔조사국 회의실에선 팀·과장들 십여 명이 일어나 거의 위원장님 행차하신 듯 일어나 환대해 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항상 종합국이 아쉬운 사람들이었다.
인력 요청할 때마다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종합국 아닌가.
그들에게 준철은 너무나도 훌륭하고 감사한 호구였다.
‘듣자하니 일에 미친놈이라고?’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직진만 하는 놈?’
타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종합국 과장이었다.
물불 안 가리고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진행하는 놈. 이런 부류의 인간이 업무 협조 요청할 때 내빼지 않는다.
‘씁쓸하구먼…….’
준철도 이런 생리를 알았기에 이들의 환대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군침을 잔뜩 흘려 대는 모습이 썩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듣자하니 어제 부임하셨다고요?”
“예.”
“이거 참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부임하시자마자 죄송하게 됐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전 종합국 출신이라 따로 인수인계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사실 공정위에서 종합국 만큼 역할이 큰 곳이 없죠. 저희만 해도 인력 충원 안 되면 일을 진행할 수 없으니 원…….”
어쩐지 압박하는 소리로 들린다.
“괜찮습니다. 시간 바쁘실 텐데 바로 미팅 진행할까요?”
“아, 네.”
과장 한 명이 눈짓을 보내자, 팀장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발표를 준비했다.
회의실이 금세 어두워졌고, 중앙 모니터엔 [닭고기 담합 의혹]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먼저 사건 배경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한국에 있는 양계장들은 모두 한국육계원 가입자로, 모든 생산품을 다 이곳에 납품합니다. 한육원은 이렇게 유통을 독점하여 주요 업체들과 거래를
하는데, 닭고기 시세는 여기서 결정 납니다.”
피피티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시세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오 팀장.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닭고기 시세 그 부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봐.”
‘나를 위해서 재설명해 주겠다는 건가? 너무 극진한데…….’
“예. 정확히 말해 생닭 시세는 상품뿐 아니라 운반비, 염장비, 기타 제비용 등을 더해 결정됩니다. 한데 한육원 측에서 운반비와 염장비 등에 가격 조정을 한 것 같습니다.”
“닭값 하곤 전혀 상관없는 다른 비용을 조작했다?”
“그렇습니다. 이러면 시세 조작 티가 잘 안 납니다. 뿐 아니라 할인이 가능한 생닭 가격의 할인 폭을 대폭 제한하고 할인 품목을 축소해 버렸습니다.”
뒤이어 등장한 피피티엔 폐기 처리된 닭고기들이 보였다.
“이건 작년에 유통사들이 폐기 처리한 상품들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거의 다 버렸죠.”
“할인을 안 하고 그냥 버린 거네?”
“네. 조사해 보니, 유통사 측에선 할인을 해서 팔려 했답니다. 하지만 한육원의 압박으로 이를 진행하지 못했다 합니다.”
때론 버리는 게 남는 거다.
가격 담합해서 한껏 닭 시세를 끌어 올렸는데, 마트가 할인 상품을 팔아 버리면 담합한 의미가 없어진다.
“이와 같은 징후가 얼마나 됐지?”
“저희가 파악한 것만 3년……. 하지만 담합은 최소 10년 이상 이어졌으리라 추정합니다.
가격만 담합한 게 아니다.
한육원은 생닭의 출하량도 줄여 버렸다. 이 때문에 생닭 시세는 10년 동안 무려 240%나 폭증해 버렸다.
“혹시 수요 때문에 가격이 증가한 요인은 없습니까?”
듣고 있던 준철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물론 수요 문제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겨우 사람들이 치킨 더 시켜 먹는다고 증가할 만한 가격 폭이 아닙니다. 명백한 가격 조작입니다.”
준철은 질문을 이었다.
“지금 증거는 얼마나 잡혔나요?”
“최근 3년 치 자료는 거의 다 잡혔습니다만 한육원은 극구 부정하고 있습니다.”
“무슨 변명을 댔죠?”
“소금값이 올라 염장비가 올랐고, 기름값이 올라 운반비가 올랐다. 그래서 닭값이 올랐다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얘깁니다.”
회의실의 불이 켜지자 준철이 시선을 돌렸다.
“김 과장님, 이 가격 조작을 한육원이 혼자 주도했나요?”
“박수도 양손이 맞아야 치죠. 유통권을 꽉 쥐고 있는 한육원과 국내 10여 개 업체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했을 겁니다.”
“그럼 조사 범위가 굉장히 확대되겠군요.”
“네. 양계장뿐 아니라 주요 업체들을 돌면서 가담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저흰 이 담합액을 최소 2천억대로 추산합니다.”
사실 그것이 오늘 준철을 초대한 이유기도 했다.
담합액만 2천억이라 전망하는 이 조사는 최소 7개 이상의 팀이 붙어야 한다.
이는 카르텔국 인력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고, 부득이 인력 충원 요청으로 이어진 것이다.
“흠…….”
고심이 깊어지는 준철이었다.
“카르텔국에선 몇 팀이나 투입시킬 계획입니까?”
“저희도 쥐어짜 봤는데, 인력이 녹록지 않습니다. 다섯 팀 투입이 전부예요. 종합국에서 두 팀만 충원해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두 팀이라.
불현듯 아까 팀장들이 남기고 간 협박 같은 부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세 사람 중 하나만 데려가는 것도 무리일 것 같은데 두 팀은 절대 불가능이다.
‘아직 내가 그 사람들 휘어잡을 리더십도 없고.’
사실 이건 설득하기도 민망했다.
조사를 성공적으로 끝내도 어차피 카르텔국 실적이 될 사건인데 누가 의욕적으로 와 주겠는가.
준철의 반응이 영 심상치 않자 김 과장이 급히 덧붙였다
“이 과장님, 사실 저희가 시간이 좀 급합니다. 이놈들이 지금 분위기 눈치채고 축소에 들어갔거든요.”
“은폐 시도가 있었습니까?”
“네. 10년 치 담합 다 들킬 것 같으면, 그냥 3년 치로 합의 보자. 하는 첩보가 접수됐습니다.”
“그 첩보는 어디서…….”
“우연히 입수한 정보라 법원에서 증거로 쓸 수는 없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불법적으로 입수했구나.
준철은 그 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런 열의라도 있는 걸 보면 진짜 담합 혐의를 잡고 싶긴 한가 보다.
“만약 인력을 충원해 주시면, 그 TF팀은 제가 직접 진두지휘할 계획입니다.”
김 과장은 준철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 희망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는 것 같았다.
“딱 2개월. 7팀 정도 붙으면 제가 2개월 안에 이 사건 끝내 놓겠습니다.”
하지만 뒤이어서 들리는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그 TF팀 이끌고 2개월 안에 조사 마무리하겠습니다.”
“……예?”
“충원은 괜찮습니다. 다섯 팀 주시면 제가 그 안에서 해결하겠습니다.”
김 과장은 어이가 없었다.
요즘 종합국은 도와주기 싫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나?
“이 과장님, 그건 무리예요. 제가 20년 동안 기업들 담합 사건만 팠는데, 이건 최소 7개 팀이 필요합니다. 2개월도 저니까 약속드릴 수 있는 거고요.”
“저도 비슷한 사건 맡아 봤는데, 더 적은 인력으로도 해 봤습니다.”
“아니, 지금 말이 되는 소릴!”
“철강 비리, 8년 담합이었고. 군납 비리, 10년 담합이었네요. 그거 모두 거의 단독으로 끝냈습니다.”
구체적인 이력이 나오니 무어라 대적할 말이 없었다.
방금 말한 사건들 모두 뉴스에 대서특필 된 사건 아닌가. 그중 군납 비리는 정치권의 모진 핍박에도 불구하고, 진상을 밝혀 낸 사건이었다.
김 과장이 말을 잇지 못하자 준철이 덧붙였다.
“지금 종합국에 남는 인력이 저밖에 없습니다. 마뜩치 않으시면 카르텔국 혼자서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