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09
209화
스스로 판 무덤
사장단 중 하나가 말했다.
“말씀 듣기 전에 먼저, 저희들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약간 의외였다. 주가가 만신창이 되어서 숨도 못 쉴 줄 알았는데……. 제법 눈도 똑바로 쳐다볼 줄 안다.
혹시 죄를 뉘우치고 과징금을 깎아 달란 부탁일까?
“네. 말씀하세요.”
“계육은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1위 육류품으로, 닭고기가 안 들어가는 음식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근데 공정위의 무분별한 조사로 인해 수급 불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급 불안이 저희 탓입니까?”
“지금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양계 농장의 사기가 그만큼 저하되었음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문 기사에선 닭이 하늘로 도망갔다고 말할 만큼 대한민국은 현재 생닭 대란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떳떳지 못했던 점이 있었음을 일부 인정합니다. 양계 농장의 수익 보전을 위해 닭고기를 사재기한 정황이 있었죠.”
“담합을 인정하시는군요.”
“하지만! 열악한 축산업계 구조상 어쩔 수 없었던 일들입니다. 이 부분을 감안해 적당한 처벌을 내려 주십쇼.”
“적당한 처벌이 어떤 겁니까?”
“시정 명령으로 끝내 주십쇼. 업계 사정 감안해서 과징금도 최소로 해 주셨음 합니다.”
준철은 허파에 바람 찬 사람처럼 껄껄 웃었다.
“한마디로 형사처벌 없이 돈으로 깔끔하게 끝내자는 거군요. 그 돈도 최소로 부과했으면 싶은 거고.”
날강도가 따로 없다.
이건 그냥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라는 말 아닌가. 그것도 부탁이 아닌 협박조다.
“오늘 저희는 처벌 수위 협상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닙니다. 의심 가는 정황은 10년 치인데, 잡은 증거는 5년 치라 마지막으로 자백할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아, 형사처벌은
오늘 여러분들이 해 주시는 말이 조사에 도움이 되면 불기소로 끝내 드리죠.”
“과장님!”
업계 1위 한태훈 사장은 준철을 노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라곤 공정위의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씀인지.”
“공정위도 지금 안팎에서 질타를 많이 받고 있잖아요? 양계 농장의 시위가 연일 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오호라 약점을 건드시겠다?
“네. 덕분에 달걀마사지 한번 시원하게 했네요.”
“다음 시위는 겨우 마사지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더 큰 화를 당하실까 조언드리는 겁니다. 생닭 시세를 인하하면 그 피해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양계 농장주들은 지금 사즉생의 각오로 정부에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저들의 시위는
더욱 격화될 겁니다.”
한 사장은 득의양양 웃었다.
시위대의 위력은 종사자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양 회장은 또 이런 쪽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한육원이 조직적으로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이 시위 세력은 더 커질 게 자명했다.
‘낯빛이 금방 바뀌는구먼.’
역시 법으로 안 될 땐 드러누워 버리는 게 답인가. 젊은 놈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달걀을 한 번 맞아 봤으니 두 번 맞기엔 무섭겠지.
기업들 형사처벌 안 하겠단 약속만 받아 내도 판정승이다. 과징금 문제야 3심까지 끌면서 최대한 깎아 보면 그만이다.
“제가 저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세요?”
“……예?”
“진짜 접을 거면 1차 시위에서 접었겠죠.”
“지금 시위대 규모가…….”
“100만 명 천만 명이 모인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명백하게 법을 어긴 사실이 확인됐는데, 왜 떼법으로 이기려 들어요.”
사장단 얼굴들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저희가 굉장히 재밌는 자료를 확보했거든요.”
준철은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자료 하나를 들이밀었다.
“여기 계신 기업들이 양 회장 차명 계좌로 돈을 송금하셨더군요.”
“……예?”
“뉴스에 나간 보도 자료들, 그거 전부 저희 쪽에서 흘린 거예요.”
“아, 아니 그게 무슨…….”
“계속 버티시면 몇 날 몇 시에 얼마가 입금됐는지까지 다 나갈 겁니다.”
회의실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바로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계속 리베이트 의혹이 나오기 시작했다.
담합 조사할 때 으레 나오는 얘기들이라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 출처가 공정위였다고?
사실 생닭이 백 원 단위로 오를 때 치킨은 천 원 단위로 올랐다. 기업들은 이를 주도해 준 양 회장에게 꾸준히 대가를 제공해 왔고 이들의 공생 관계는 1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것이다.
“아니 이게 다 양계 농장을 위해서…….”
“그리고 이 마진도표를 보세요. 생닭 시세 까 보니까 다 가공비에서 올랐던데요? 이게 양계 농장을 위한 담합입니까?”
“…….”
“지금 저 불어난 시위 세력한테 당하고 싶지 않으면 어서 이실직고하세요. 계란 한번 맞아 본 입장에서 조언드리는데, 사실 꽤 아팠습니다.”
이들은 공정위가 잡은 송금 내역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의 완벽하게 다 파악하고 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희의 최종 목표는 한육원 10년 독재자 양철기 회장입니다.”
“…….”
“그 사람에게 돈을 보낸 정황, 그리고 모든 얘길 해 주십쇼. 숨긴다면 함께 처벌당할 겁니다.”
이쯤 되니 회의실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자수하고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이들도 바보가 아니다. 무려 10년 동안 해 왔던 담합의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는 안다. 엄청난 양의 과징금이 부과될 것이고, 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 주가를 더 끌어내릴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끝이겠나.
진짜로 무서운 건 소비자들의 민심이다.
그간 생닭 시세를 핑계로 가공품 가격들도 덩달아 올렸는데, 그 생닭 시세를 끌어 올린 게 이들이란 게 들켰으니. 가격 인하 요구가 빗발칠지도 모른다.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불매운동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라면 닭고기 취급 업체 모두가 다 사이좋게 걸렸다는 것.
준철은 이들의 결심이 서기까지 기다려 주었다.
‘머리가 아프긴 하지.’
준철도 이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과징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의 후속 조치가 문제다.
소비자들의 빗발치는 요구는 물론, 추후 대책도 내놔야 한다.
근데 어쩌겠나. 지금까지 쉽게 먹은 담합 이익 뱉어 낸다 생각해야지.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 주었지만 이들의 침묵은 끝이 없었다.
“역시 판사님 앞에서 얘길 나누는 게 빠르겠군요.”
“자, 잠깐만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단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인정하겠습니다.”
“10년 치 담합 모두요?”
“네.”
“양 회장에게 수상한 돈 보낸 내역도 포함입니다.”
“그건…….”
“법정에서 뵙죠.”
“아, 아닙니다! 저희는 이걸 대가로 양 회장에게 돈을 수차례 입금했습니다.”
“그리고 순번을 정해서 사재기도 했습니다. 제발 선처해 주십쇼.”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오자 준철이 씩 웃었다.
“그 얘기 아주 흥미롭네요. 좀 더 자세하게 해 주세요. 혹시 남은 증거가 있다면 제출도 좀 해 주시고요.”
***
준철과 TF팀은 마지막 조사를 위해 한육원 건물로 향했다.
이젠 이 모든 원흉인 양 회장에게 자백을 받아 내야 할 때다.
-저기다! 저놈이다!
하지만 여기엔 험란한 과정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연락을 받고 온 것인지 시위대가 이미 한육원 본사 건물을 에워싸 철통 방어에 들어간 것이다.
보나마나 양 회장이 조사를 지연시키고, 세를 과시하려고 부른 모습이었다.
“비켜 주십쇼. 공무집행 중입니다.”
-닥쳐! 양계 농장 등골 빨아 먹는 게 공무집행이냐?
-닭고기값 인하하면 대체 우린 우야라꼬!
-어디 한번 짓밟고 가 봐라, 이 처죽일 놈들아.
천하의 준철도 드러누운 사람들을 짓밟고 갈 만한 위인은 못 됐다.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며 전 국민이 카메라맨이 된 시대다. 조금이라도 오해의 빌미를 남기면 안 된다.
꼭 그것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딱한 마음이 들었다.
이들은 정말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 아닌가.
유통상들이 거머리처럼 피를 빨아 먹었는데, 아직도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닭값을 끌어 올렸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여러분, 닭값이 인하되어도 여러분들에게 가는 피해는 얼마 없을 겁니다. 현 구조는 가공비만 비대하게 붙어서…….”
-닥쳐!
그렇게 본사 앞에서 옥신각신 대치하는데, 고맙게도 양 회장이 자진해서 나왔다.
“여러분,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양 회장님!
-아이고, 울 회장님 살 빠진 것 좀 봐라이. 맘고생 단단히 했데이.
-회장님은 잘못 없습니다! 열악한 양계 농장을 위해 그 정도 담합한 게 어디 대수예요?
-공무원 놈들이 우리나라 축산업 말아 먹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어!
양 회장은 자신을 추종하는 광신도들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는 부분은 제가 공정위에게 착실히 소명하겠습니다.”
-양 회장님!
“여러분들은 협회보다 생업에 더 우선 종사하십쇼.”
양 회장은 손수건까지 꺼내 눈을 훔쳤다. 소환할 때 왜 한 번도 안 오나 했더니, 신파극 연습하느라 한창 바빴나 보다.
어쨌거나 이 드라마의 효과는 대단해서 준철을 향한 살기가 다시 거세졌다.
“갑시다, 과장님.”
“가기 전에 먼저, 우리 사람들 앞에서 공개 토론 한번 할까요?”
예기치 못한 말에 양 회장이 눈썹을 치켜떴다.
“네?”
“TF조사팀. 우리가 준비한 닭고기 마진도표, 여기 모이신 분들에게 전해 주세요.”
TF조사단이 흩어지자 그가 귓속말을 해 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생닭 시세는 천정부지로 솟았는데, 왜 양계 농장 환경은 여전히 열악할까. 저희가 이 설명을 좀 드려 보려고요.”
“뭐?”
준철은 씩 웃으며 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저희 TF가 조사한 마진도표입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현재 닭값은 원가보다 가공비가 더 들죠.”
-……뭐야, 이건?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속고 계셨던 겁니다. 아무리 닭값이 올라도 양계 농장에 떨어지는 마진은 그리 크지 않았죠? 그게 다 유통 상인들이 중간에서 가공비만 높여서 그런 겁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양 회장이 뒤늦게 팸플릿을 찢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상황은 어째 미묘해져 버렸다.
“……잠깐, 이게 어느 정도 맞는 말 같은데? 우리 마진 정말 없었잖아.”
“이게 다 기업들이 가공비만 올려서 그렇다고?”
양 회장이 펄쩍 뛰었다.
“여러분, 속지 마십쇼. 이건 우릴 음해하기 위한 유언비업니다.”
그때 한 사내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그럼 공정위 마진도표가 다 거짓이란 겁니까?”
준철은 양 회장에게 귓속말을 했다.
“잘 대답하셔야 할 겁니다. 여기서 거짓말하면 더 큰일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