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재판 (1)
대리점 사장들은 모두 흔들리는 눈빛으로 준철을 바라봤다.
“그럼 간단히 절차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증언해 주시면 저희는 법원에 증인 신청을 미리 해야 해요.”
“잠시만요. 미리 신청한다고요?”
“그럼 본사가 어떤 대리점인지 다 아는 거 아닙니까? 재판 전에?”
“예. 아마 재판 시작하기 전까지 숱한 회유와 협박을 해 올 겁니다.”
여기서 증언을 얻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이들이 법원에 출석해 같은 진술을 ‘직접’ 해 주어야 한다.
한경 그룹은 증인 목록만 보고도 어떤 대리점인지 파악할 것이며, 분명 출석 못 하게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어떤 부분을 우려하시는지 충분히 압니다. 그래서 저희도 한경 그룹의 외압을 막기 위해 부사장 라인을 전부 구속한 거고요.”
구속이란 말에 동요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근원적인 질문이 남았다.
“그럼 저희가 언제까지 외압에 시달려야 하는 겁니까?”
“법원에서 판결이 떨어져도 한경에서 항소할 수 있잖아요?”
“그럼 3심이 진행되는 내내 저희가 외압에 시달려야 하는 겁니까?”
이에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도 재판 오래 끌 생각 없습니다.”
“하면……?”
“어차피 재판은 한 번 해서 그날 판결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1차, 2차, 선고 재판… 최소 세 번은 진행될 겁니다. 일단 저희 목표는 1차 재판에서 죄를 밝히고, 그들에게
협상안을 내미는 겁니다.”
“어떤 협상안인지……?”
“강매를 주도한 임원들 해임하고, 대리점에 손해배상을 해라. 그럼 우리도 과징금을 매기지 않겠다. 딱 여기까지요.”
“……만약 한경에서 그에 응하지 않으면요?”
“저쪽 변호팀은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 전문가들입니다. 저희가 피해자 확보하면 재판 결과가 어떨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이미 주가는 풍비박산 났고 세간에선 한경모비스 불매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런 마당에 피해자까지 확보됐으니, 이젠 무죄 가능성도 사라진 셈이다.
법정에서 다툴 문제는 과징금이 적당하네 마네, 담당자 처벌이 과하네 마네 하는 문제들뿐인데, 한경 그룹이 그걸 3심까지 끌 바보들은 아니다.
“저희도 이 싸움 오래 끌 생각 없습니다. 1차 재판까지만 여러분들이 용기 내 주시면 마무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준철의 거듭된 설명에 대리점들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긴 재판을 거치지 않아도 되고, 사업자단체를 구성하면 본사 보복에도 공동 대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이 부당한 갑질을 근절할 수 있단 희망이었다.
본사가 멋대로 목표 매출을 정하고, 그 할당량만큼 물건을 사 가야 하는 구조.
할당량 못 채우면 본사에 반품도 못 한다.
이게 어떻게 영업인가? 다단계에 가깝지.
“……저희 은평대리점 진술하겠습니다.”
“……저희 서초점도요.”
“전 끼워 팔기 항의하다 당시 담당자한테 욕설까지 들었습니다! 통화 내역 있어요.”
“저희는 반품 처리 안 해 줘서 창고에 아직도 5년 지난 상품이 쌓여 있습니다. 증거 많아요.”
준철은 박 팀장에게 눈짓을 줬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녹음기를 켰다.
장장 5년을 기다려 왔던 증언들이 드디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모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기억 안 납니다.”
선전포고를 한 양측은 그 뒤 철저한 증거 수집과 재판 준비에 들어갔다.
구속 수감된 한지호 부사장은 계속해서 묵비권으로 일관했고, 노민기 회장에 대한 소환장은 ‘병환’을 이유로 번번이 거절되었다.
심리(취조) 단계에선 한마디라도 덜 하는 것이 유리하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전 없는 취조만 이어지다 재판을 일주일 남겼을 쯤, 이변이 생겼다.
“뭐야? 증인 신청을 했어?”
“예. 방금 변호사가 보고 연락을 했습니다.”
노민기 회장은 비서가 가져온 서류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출석하기로 한 사람만 열 명이었고, 50여 개 대리점들이 증언을 보내왔습니다.”
“이놈들이!”
어떻게 감히 개가 주인을 문 단 말인가?
공정위가 신청한 증인 목록엔 10명의 대리점주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분명 유리한 진술을 얻었다는 뜻이다.
“영업관리부 뭐 해?! 얼른 연락 돌려!”
“그게 저…… 연락을 안 받는다 합니다.”
“뭐?”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고, 연락을 해도 받질 않습니다. 아마 자기들끼리 모여 저희랑 접촉하지 말라고 얘기해 놓은 것 같습니다.”
연락을 받지 않는다면 가맹을 끊어 버리겠단 협박도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놈들은 이미 단체 행동까지 벌이고 있는 듯하다.
“그놈들 왜 잠잠하다 이제 와서 난리야?!”
“아무래도 구속 여파가 큰 거 같습니다. 저희가 막상 처벌받을 거 같으니 대리점들이 이탈한 것 같습니다.”
“그 짓거리 못 하게 협박해 놓지 않았어?”
“그 일을 주도한 한지호 부사장이 구속되다 보니… 솔직히 공정위가 무더기로 구속을 시켜 버린 게 너무 치명적이었습니다.”
강경파들을 모두 구속했으니, 이는 대리점들에게 희망으로 보였을 것이다.
노 회장은 하늘이 노래졌다.
자신들의 수족은 잘려 나가고, 내부에선 배신도 나왔다.
그리 생각하니 돌연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향했다.
“참 이상하구먼.”
“예?”
“공정위가 우리 회의 내용을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부사장 쪽들만 조목조목 골라서 구속을 강행했는지 말이야.”
“…….”
“누가 저쪽에 정보를 팔지 않았다면 가능이나 하겠어?”
비서는 회장님의 의중을 알아챘다.
내부의 협조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수사다. 대리점들이 배신한 게 아니라 사내 임원 중 누군가 먼저 배신한 게 틀림없다.
“김 사장 지금 어디 있어?”
“방금 출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방으로 불러. 괜한 오해 살 일 없게 이상한 말 하진 말고.”
오해를 바라지 않는다 말했지만 회장님은 이미 김 사장을 의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비서가 나가고 나자 회장이 한숨을 쉬었다.
피해자만 확보 못 하면 이기는데, 이젠 패배가 명백해졌다. 하지만 증인 신청은 말 그대로 증인 신청일 뿐이다.
놈들을 재판에 출석 못 하게만 하면 아직은 해 볼 만하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이윽고 들어온 김 사장은 낯빛이 어두웠다.
지금 이 자리에 왜 소환된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강 돌아가는 얘긴 알지?”
“예…… 저도 오늘 아침에 들었습니다.”
“대리점들이 우리 연락도 안 받는다는군. 그리고 갑자기 무더기로 증인 명단에 올랐어. 뭐 공정위 쪽에서 신청한 증인이니 당연히 우리한텐 불리할 거야.”
김 사장은 듣고 있다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먼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뭐가?”
“핵심 임원들 구속한 거 말입니다. 저도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 압니다. 부사장 쪽 사람들 모두 구속되니 다들 절 의심하더군요.”
“나도 자네가 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근데 만약 내부 고발자가 없었다면 저들이 어떻게 이리 필요한 사람만 구속했을꼬?”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아닙니다.”
회장님의 은근한 말투는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말해 주었다.
“김 사장.”
“……예.”
“아니라면 증명을 해 봐. 부사장 공백 없게끔 자네가 그 일 하면 되잖아?”
노 회장은 표정을 바꿔 말했다.
“대리점들 재판에 출석하면 안 돼. 증언 번복시키면 더 좋고.”
막으라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안 하겠다는 건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공정위가 구속 강행했을 때부터 저희한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그간 대리점들이 나서지 않았던 건, 저희가 처벌 안 받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으니까요. 근데 이젠 나서 버렸으니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희망을 절망으로 바꿔! 우리가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이 한둘이야? 가맹을 취소하든, 계약을 끊든 밥줄 가지고 협박하란 말이야.”
가맹을 끊어 버리겠다, 그거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내년부터 제품 가격을 올릴 수도 있다.
할인 행사를 강요하고 지원비를 안 줄 수도 있다.
이 모두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지금 상황에선 그래도 소용없을 텐데요.”
“지금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따질 때야? 재판 일주일 남았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
“그게 안 되면 지랄 맞은 모습이라도 보여 줘. 우리 이 재판 3심까지 갈 거야. 그때까지 우리한테 당하고 싶지 않으면, 재판에 절대 출석하지 말라 그래.”
대리점들은 결속력이 약하다.
지금은 의기투합해도 사건이 장기화되면 분명 이탈자가 생기기 마련.
본사에서 이런 엄포를 하는 것 자체가 놈들의 사기를 꺾어 놓을 것이다.
“외람되지만 회장님…… 그보단 차라리 회유를 하시지요.”
“뭐?”
“지금 상황에서 피해자 등장해 버리면 재판은 필히 저희가 집니다. 대리점들도 그걸 잘 알 테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이라도 공정위 시정안에 동의하는 게 낫습니다.”
김 사장이 애원하듯 말해 봤지만 노민기 회장의 얼굴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 회장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재판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타협하라? 그럼 공정위가 퍽이나 우릴 용서해 주겠네?”
“지금이라도 선처를 바라면 아무래도…….”
“이미 언론 기사로 피 터지게 싸워 댔는데 뭔 놈의 선처? 부사장이 놈들 앞에서 권한 남용으로 소송 걸겠다는 말까지 했어. 자넨 지금 그쪽에서 선처해 줄 것 같아?”
“…….”
“공정위나 우리나 이제 서로 못 물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상황에서 이거라도 해 보는 거야!”
재판은 무를 수가 없다.
처벌 수위도 처음 공정위가 제시한 안보다 더욱 세질 것이다. 결국 지금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얘기.
김 사장 입에선 결국 회장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대리점들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이 아니라 명령이야. 우리 지시 어기면 가맹 계약 바로 끊어 버릴 거라고. 이거 분명히 전달해.”
“……알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김 사장은 막막한 심정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미 대리점들이 단체 행동에 나섰는데 그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만큼이나 회사 입장이 절박하단 뜻이겠지.
몇 달 새 30%나 폭락한 회사 주가가, 꼭 침몰하는 타이타닉호를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