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리베이트 (2)
준철은 제조업감시과로부터 캐비닛 자료를 넘겨받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건만, 조금은 충격적이다. 한국 의료계는 제약 업체 로비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차병원은 모두 입찰 방식으로 제약 업체를 선정했는데, 의료 재단은 돈세탁 업체들처럼 제약 회사로부터 돈을 받았다. 과연 의료 재단 기부금 중 환자들의 복리 증진에 쓰인 돈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성재단의 리베이트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한성재단은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으로 제약 회사들의 삥을 뜯었다.
준철은 한성재단과 타 재단을 비교해 그중에서도 문제 될 만한 내역들을 가렸다.
한성재단은 확실히 의료 재단으로 볼 수 없는, 차라리 기업에 가까운 재단이었다. 제약 업체들로부터 받는 기부금이 타 재단보다 월등히 높았으며, 그 횟수도 잦았다.
“서 팀장.”
“예.”
“이거 자료 정리해서 한성재단에 소명 요구장 보내.”
“바로 검찰에 고발하는 게 아니라요?”
“내가 그렇게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야. 해명할 기회는 한번 줘 봐야지.”
사실 준철은 경우가 없는 놈이 맞긴 했다.
다만 소명할 기회를 한 번 줬느냐, 아니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법원에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고 어필할 형식적인 절차들이 필요한 것이다.
“어차피 궁색한 변명이나 해 댈 텐데 이게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거대로 의미가 있지. 법원에 제출할 좋은 증거 자료들이 될 텐데.”
“아, 그렇군요.”
“시간 줘 봤자 좋을 게 없어. 오늘 안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두 팀장은 자료를 추합해 바로 한성재단에 소명장을 보냈다.
***
소명 요구장은 이쪽 업계에서 선전포고문이다.
대부분 해명할 수 없는 내용을 해명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니, 사실상 조사를 시작하겠단 엄포와 다름없다.
“이 새끼들이 대체 왜 이래?”
“아무래도 보험사의 투서 내용을 조사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이 자식들은 상도도 없어? 그걸 진행해?”
한성재단 대표 김홍석 이사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지금 한성대병원이 보험사와 분쟁 중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 과정에서 튀어나온 악의적 제보를 조사하겠다는 건 금도를 어기는 것이다.
“알아보니 그 담당자가 보통 정신 나간 놈이 아니더군요.”
“누군데?”
“이준철 과장이라고 합니다.”
재단 본부장이 준철의 이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최근엔 한육원의 닭고기 담합 사건을 조사했는데, 양계 조합의 총파업 예고에도 불구하고 조사를 강행해 버렸다고 합니다.”
“담당자의 성격상 이번 사건도 강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김홍석 이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젊은 놈이 나대는 걸 좋아하는 타입인가 보지?”
“그런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애들이 실속은 없지. 지금 공정위가 걸고넘어진 게 뭐야?”
“법카 회식, 비행기 업그레이드, 명절 떡값 등의 혐의를 다 걸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 제약 업체들의 기부금입니다.”
김홍석은 끙- 앓았다.
단순히 나대는 것 좋아하고 실속 없는 놈이 아닌 것 같다.
걸고넘어진 혐의들이 꽤 뼈아픈 내용들 아닌가.
하지만 서류 검토가 끝났을 땐 다시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멍청한 놈. 이 정도 정황은 다른 의료 재단도 다 있는 건데.”
“맞습니다.”
“보니까 아직 결정적인 건 못 잡았나 봐?”
“네. 제약 회사 기부금이 대가성이란 사실은 입증 못 했습니다. 사실 이건 할 수가 없습니다.”
제약 회사들이 의료 재단에 기부금을 내는 건 외연적으로 보기에 안 좋긴 하다.
하지만 뭐 변명이야 지어내면 그만 아닌가. 의학 발전을 위해 돈 좀 기부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근데 이사장님. 이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지?”
“기부금 내역뿐 아니라 다른 떡값 내역도 걸고넘어졌잖습니까.”
제약 회사들이 병원장에게 명절 때마다 돌린 떡값, 비행기 업그레이드 내역 같은 자잘한 내역을 잡았다.
“기부금은 몰라도 일단 이건 대가성 입증이 쉽습니다. 그리고 병원들 회식할 때 법카를 긁은 내역 또한 걸렸습니다.”
“그거야 잡아떼면 그만이지. 의사들이 제약 회사 직원한테 술 한잔 접대받는 게 죄야?”
물론 술자리 접대가 아니라, 의사들이 노는 자리에 법카만 긁고 간 것이지만 그건 입증 못 할 것이다.
“기부금은 의료 발전 차원에서 낸 기부금이라 둘러대. 그 정도 리베이트야 이 바닥에서 흔하니까 문제없어.”
“그건 그렇습니다.”
“대충 넘어가자고.”
김홍석은 이 사건이 길게 갈 것 같지 않았다.
제약 회사들은 로비 9단들 아닌가. 지금쯤 열심히 회계 자료 조작해서 로비 흔적들을 지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단 이사장이 할 일은 하나다.
그 흔적 다 지워질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는 것.
“그럼 소명 요구엔 뭐라고 할까요?”
***
“과장님. 한성대학병원에서 소명 답장 왔습니다.”
“뭐? 벌써?”
“예.”
뭐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건가?
한바탕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답이 빨리 도착했다.
하지만 그 답장을 확인했을 때 준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무근임을 밝힙니다.]
해명을 하라 했더니 도리어 협박 편지를 보내왔다.
준철은 괘씸해서 치가 다 떨렸지만, 경험이 많지 않은 두 팀장은 이미 겁을 집어먹었다.
“……과장님 이 쪽 말도 일리가 있는데요.”
“자칫하면 우리가 월권으로 걸릴 것 같습니다.”
준철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담이 작아서 어디 큰 사건 맡을 수 있겠어?”
“예?”
“이게 월권이면 그놈들은 사형이야. 이건 재단 기부금 소명 못 하니, 월권으로 걸고넘어지겠다고 협박하는 거라고.”
준철은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겼다.
“됐다. 소명 요구야 어차피 형식적인 절차였으니.”
“하면…….”
“바로 다음 단계로 돌입해. 어차피 이놈들은 우리랑 대화 안 해.”
다음 단계는 바로 기업들에 대한 압수수색.
조사에서 수사로 넘어가는 단계다.
“그럼 바로 영장 작업할까요?”
“그 보단 메디신제약에 먼저 한번 가 보자. 아, 거기엔 소명 요구장 보냈나?”
“네. 근데 아직까지 답신 도착 안 한 걸 보면 소명 요구에 응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 대장 격인 한성재단이 이 따위로 소명을 했는데, 그놈들은 더하겠지.”
준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디신 본사 어디야? 바로 가자.”
***
“안녕하세요, 이준철 과장입니다.”
공정위 조사팀은 바로 문제의 메디신제약으로 갔다.
분위기는 역시나 살벌했다. 경영진은 조사팀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뒤통수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제가 메디신제약 김성득 대표입니다. 한데 어인 일로?”
“소명 요구에 답장이 없으셔서요. 오늘 대답 좀 들으러 왔습니다.”
김성득이 고개를 돌렸다.
“김 이사. 우리 언제 공정위한테 소명 요구 받았어?”
“예? 아…… 예. 일주일 전에 받은 걸로…….”
“이 사람아. 그런 게 있으면 재깍 답장을 드려야지. 자네 때문에 이게 뭐야?”
꼴값을 떤다.
이미 다 보고 받고 임원들끼리 머리 싸매고 있었을 텐데 모른 척은.
“이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 임원이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괜찮습니다.”
“소명장은 빠른 시일 내로 보내겠습니다.”
“아니요. 기왕 온 김에 대답 듣고 가죠. 저희가 입수한 제보 자료가 이런 내용들이거든요? 하나하나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김성득의 여유로운 척했던 얼굴이 단번에 무너졌다.
이 젊은 놈은 좋게 말로 해선 안 될 것 같다.
“과장님. 거참 공정위가 꼭두각시 노릇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꼭두각시?”
“보험사가 넣은 악의적 제보로 이렇게 조사하는 게 맞느냐 이 말씀입니다. 지금 업계 사람 모두가 다 이 조사를 비웃는 건 아십니까?”
준철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저희도 그 점은 압니다. 근데 내용이 너무 자세해서요.”
“보험사가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지껄여서 그럴듯한 제보 하나 만든 겁니다. 공무에 바쁘실 텐데 이런 거에 놀아나지 마세요.”
“그럼 저희가 그 무고를 밝혀 드리죠. 메디신 회계 자료 좀 볼 수 있습니까.”
김 대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회계 자료 봐서 해서 뭘 하시게요?”
“그건 저희가 자료 보고 판단하죠.”
“먼저 말씀해 주세요. 뭐 저희가 협조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럴 때마다 공정위의 권한이 한계가 한스럽다.
검찰처럼 압수수색장, 구속영장 팍팍 칠 수 있어야 되는데.
“꼭 저희가 압수영장 받아 와야 주시겠어요?”
“네.”
“잘 생각하세요. 저희는 영장 청구할 때 압수수색만 치지 않습니다. 구속도 함께 칠 거예요.”
구속이란 말에 움찔거렸다.
켕기는 게 아주 없지는 않다. 이 정신 나간 놈이라면 구속영장도 진짜로 받아올 거란 생각이 든다.
“김 이사, 자료 줘!”
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근데 치사한 걸로 건들지 맙시다. 우리가 병원한테 좋은 의도로 낸 기부금 같은 거 말이에요. 그런 거까지 건들면 반발이 만만치 않을 거요.”
“저희가 지금 하는 일이 그게 좋은 의도였는지, 대가성이었는지 파악하는 겁니다.”
준철은 여유롭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죄가 없다면 저희가 앞장서서 무고를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
“저놈들은 절대 무고가 아니야. 자료 제대로 파악해.”
사무실로 돌아온 준철은 바로 돌변했다.
“서 팀장. 회계 자료 뜯어 봐서 이상한 거 잡히면 말해. 특히나 기부금 위주로.”
“알겠습니다.”
“배 팀장은 메디신 판촉비를 검토해. 병원장한테 백화점 상품권 돌렸으면 법카로 상품권 산 내역 있을 거야. 회식비 내역에도 비정상적인 게 분명 있을 거고.”
“네. 알겠습니다.”
오랜 회사 생활과, 팀장 생활로 다져진 직감이 말해 준다. 분명히 죄가 있는 놈들이란 걸.
지시를 받은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가 지시에 집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과장님. 한발 늦은 것 같습니다. 벌써 많이 흔적들을 지웠네요.”
“뭐?”
“그냥 낸 기부금은 많지만 이걸 대가성으로 연결 짓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직접적 연관이 없다고 잡아뗄 수 있습니다.”
“젠장. 그냥 소명 요구장 보낼 때 바로 영장도 신청했어야 했는데.”
그리 말할 때 배명수가 말을 이었다.
“근데 과장님. 법카 내역 쪽에서 좀 이상한 게 잡혔습니다. 이걸 한번 봐 주세요.”
배 팀장이 가져온 자료를 본 준철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