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최후통첩
한성대병원에 납품하는 제약 업체는 총 48곳.
감기약부터 암 치료제까지 모두 의약품 심의 기구를 거쳐 단독 납품권을 보장받는다. 여느 입찰 심사였다면 약효와 가격이 주요 쟁점이 됐겠지만, 의약품 심사는 달랐다. 의약품의 효능은
대동소이했고, 가격은 모두가 다 1원 입찰로 응모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납품 당락을 갈랐을까?
김성득 대표의 진술에 의하면 재단 기부금이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다. 제약 회사들이 낸 기부금에 따라 해당사의 납품 규모가 정해진 것이다.
이 밖에도 해외에서 큰 학회가 열리거나 명절이 되면 알아서 병원장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고, 이는 곧 법카 로비로까지 이어졌다.
“하…….”
“허…….”
한자리에 모인 탑10 제약 회사들은 땅만 바라봤다.
업계가 요즘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정위는 한성대의 약점을 잡기 위해 메디신제약을 치지 않았나. 모두들 김성득 대표가 혼자 폭탄을 떠안고 죽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한자리에 집합 당한 걸 보니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냉기가 감돌 때 한 사내가 작은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공정위가 우릴 왜 불렀을까요.”
“아무래도 메디신제약이 무너진 것 같소.”
얼굴이 어두워지는 이들이다.
메디신제약에 비해 액수만 적었지 다들 비슷하게 한성대병원의 밑을 닦았던 회사들이다.
“설마, 이번 조사가 확대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우릴 한자리에 집합시킬 이유가 없지.”
“아, 이건 아니지. 세상에 그 정도 접대도 안 하고 사는 기업이 어디 있다고.”
“아무렴 국내 3차 병원 싹 다 조사해 봐. 안 걸리는 놈이 없을 거라고.”
죄는 지었지만 당당한 이들이었다.
제약 업계의 리베이트는 관행이 아니라 전통이다. 한국 의료계 발전을 위해 병원‘기부금’을 낸 것이 어떻게 악습이란 말인가? 물론 대가성이긴 했지만 아무튼 기부금은 기부금이다.
“됐어. 우리 사서 걱정하지 맙시다. 순수한 의도로 낸 기부금까지 건들면 공정위 역풍이라고.”
“최 원장님 말이 맞아요. 이걸 법리적으로 대가성인지 아닌지 밝히는 건 아무도 못 해.”
“근데 우리 중에 자백이 나와 버리면…….”
“아, 그러니까 절대 자백하면 안 되지! 다들 각오 단단히 합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원청은 한성대병원이에요.”
“그래요. 우린 운명의 공동체예요.
모두들 비장한 표정으로 도원결의를 맺을 때, 문이 열리며 젊은 사내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준철 과장입니다.”
이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준철을 훑었다.
“먼저 모인 이유는 잘 아실 거라 봅니다. 한성재단 기부금 내역을 살펴봤는데, 여기 계신 업체가 톱10으로 기부금을 냈더군요.”
여기저기서 헛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준철은 현 조사 상황과, 얼마만큼의 증언을 확보했는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이제 진실을 좀 들어 볼까요?”
“과장님,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습니다. 메디신제약이 그랬다는 것과 저희가 무슨 상관인지…….”
“어쩐지 메디신제약이 알짜배기 약품만 골라 따낸다 싶었습니다. 덕분에 다음 입찰은 좀 공정해질 것 같군요.”
영업직 임원들이라 그런지 넉살들이 좋다. 이 와중에도 딴청을 피울 줄이야.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말을 해야 알아듣는 부류들인 것 같다.
“여러분들도 대가를 받고 리베이트를 하셨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부정하시면 회계 자료 다 뒤져 봐도 되겠습니까?”
더 이상 볼멘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메디신제약이 고강도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건 업계에서 파다한 일이었다. 과연 자신들은 같은 조사를 견딜 수 있을까?
“…….”
아무도 자신할 수 없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희는 이 썩은 관행을 뿌리 뽑고 싶습니다.”
준철이 힘주어 강조하자 그들이 되물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
“공정한 약품 심사인 척하면서 뒤로는 기부금을 강요하는 썩은 관행요. 한성대병원이 이러한 것을 강요했다면 모두 말씀해 주십쇼.”
그래도 말이 안 나오자 준철이 직접 한 사내를 지목했다.
“동우제약 최 사장님.”
“……예?”
“메디신제약 다음으로 기부금을 상납하셨더군요. 납품하는 의약품이 총 12개. 뒤에서 무슨 리베이트를 했습니까.”
“…….”
“말씀 안 하실 거면 그만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단 뒷일은 책임 못 집니다.”
“……!”
최 사장은 애써 준철의 시선을 외면하려 했지만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메디신제약과 같은 고강도 조사가 뒤따르면 필시 동우제약도 풍비박살 날 터였다.
“……예.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저희의 경우 리베이트 요구가 더 노골적이었습니다. 주로 물리치료 약 제품을 납품했는데, 여긴 비급여 약품이 많아서……. 거의 달라는 돈 다 줬습니다.”
“관련 자료를 제출해 주실 수 있습니까.”
“……통화 기록과 메일 자료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KP제약은 리베이트 요구를 받은 적 있습니까?”
준철의 날선 질문은 납품 3위, 4위 업체 순으로 내려갔다.
자백하는 분위기는 금세 전염되어서 이들의 실토가 잇따랐다.
“해외 학회에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외국 저명한 교수를 초빙할 때, 저희가 숙소와 비행기 티켓값을 댔습니다.”
“기부금 모두 엉뚱한 곳에 쓰인다는 걸 알았지만 저희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돈은 둘째 치고, 의사들의 행패가 갈수록 심해져 영업사원들의 퇴직률이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특히 홍선명 교수 같은 경우엔…….”
현금을 요구하는 교수들.
접대를 요구하는 교수들.
병원들이 원하는 접대 방식은 가지각색이었다.
이들의 진술이 계속될수록 서 팀장과 배 팀장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납품 톱10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 정도 증거를 가져가면 천하의 한성대 병원도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준철은 이들의 증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마지막에 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해당 리베이트 요구가 타 대학 병원에서도 있었습니까?”
***
이튿날.
뉴스가 쏟아지며 한국 의료계의 썩은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이 어떤 리베이트를 받았는지, 얼마만큼의 기부금을 요구했는지 모두 드러난 것이다.
보도가 쏟아지자 한성대병원은 일찌감치 연락이 두절되었다.
언론과 접촉을 피하는 것 자체가 죄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관심은 조금 줄어들었다.
같은 관행은 타 대학에서도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공정위의 기소 요청을 받아들여 주요 인사 5명을 모조리 입건시켰다.
병원 사람 3명과 재단 사람 2명으로 모두 형사처벌 대상자들이었다.
그렇게 여론이 시끌벅적할 때, 준철은 보건복지부 강현석 2차관을 만났다.
지난번 만남과 달리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중재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먼저 사과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강 차관님께서 잘못하신 일도 아닌데요.”
“그래도 저희가 일선에서 관리 감독을 못 한 탓이죠.”
강현석 2차관은 준철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쏟아지는 언론 보도로 보건복지부도 파편상을 입고 있었다. 대학 병원의 이러한 실태를 왜 보건복직부가 감독하지 못했냐 하는 여론의 질타였다.
단순히 감독만 못 하면 다행이지.
그는 이러한 관행을 뿌리 뽑지 않고 중간에 중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만약 공정위가 이러한 사실까지 모두 언론에 퍼트렸다면? 대중의 십자포화가 병원에서 바로 보건부로 옮겨 올 터였다.
그걸 참아 준 공정위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희 보건부가 도울 일이 있다면 최대한 돕겠습니다. 혹시 저희가 도울 일이 있나요?”
처음부터 이 말을 들으려 나왔기에, 준철은 사양 않고 바로 서류를 건넸다.
“이 썩은 관행 뿌리 뽑아야지 않겠습니까. 이게 저희가 입수한 한성대병원 리베이트 내역입니다.”
“예.”
“병원 기부금을 엉뚱하게 쓴 것은 물론, 제약 업체들에게 노골적으로 기부금을 강요한 내역도 잡았습니다. 하여 저희는 한성병원 및 재단 관계자 5명을 기소했습니다.
형사처벌을 반드시 진행하겠단 의사였다.
여기까진 강 차관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가장 중요한 건 타 대학 기부금인데요.”
“……네.”
“저흰 한성대병원의 기부금이 유독 과했을 뿐, 타 대학도 마찬가지일 거라 봅니다.”
“진상을 모두 파악하시려는 계획이군요.”
올 것이 왔다. 업계 전수조사!
한국 3차 병원 중에 제약 업체한테 기부금 안 받는 곳이 없으니, 이건 업계에 핵폭탄이 될 터였다. 어쩌면 한국 의약업계가 올스톱될지도 모른다.
“과장님, 그렇다면 타 대학 병원도 모두 같은 처벌을 내리실 겁니까?”
“그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순 없겠죠.”
한시름 돌렸다. 무작정 끝장을 보는 타입은 아니다.
“생각해 두신 방법이 있습니까?”
“자진 신고 기한을 두려 합니다. 이 신고 기한 안에 죄를 자백하는 대학 병원과 재단은 일정 부분 죄를 면죄해 주려고요.”
“면죄라면 어느 정도……?”
“형사처벌 없을 겁니다. 과징금도 저희가 부과할 수 있는 최소한으로 내릴 거고요.”
자진 신고 기한.
이건 사건이 너무 방대하거나 조사 인력이 없을 때 사정 기관이 단골로 쓰는 제도다.
그래서 업계 사람들은 이 제도의 허와 실을 잘 안다. 실탄 쏠 거면 공포탄 쏘겠나? 자진 신고 기한만 잘 버티면 유야무야 넘어갈 것이다. 조사할 능력이 있으면 이렇게 자백을
유도하지도 않았겠지.
“물론 이 모든 조건은 정말 죄를 다 자백했을 때 일입니다.”
“아니면…….”
“만약 이 기한을 악용해 아무 자백도 하지 않을 시, 저희가 본보기로 칠 겁니다.”
병원들은 당연히 자진 신고 기한에 죄를 자백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기한만 버티면 영원히 감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악용할 여지가 넘치는데 보완 장치를 안 둬서야 쓰겠나?
한성대 주요 간부들을 입건시킨 건 이러한 이유였다.
형사처벌 받을 수 있단 여지를 줘야 사람들이 말을 듣는다.
“병원들이 자진 신고 기한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설득해 달란 말이군요.”
“네. 아무래도 이건 보건복지부가 설득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겁니다.”
보건복지부는 대부분 의료직 종사자들로, 의료업계는 같은 편이라 생각한다.
준철의 구상을 완벽히 이해한 강 차관이 서류를 들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이 일은 책임지고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