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22
222화
최후통첩 (2)
보건복지부의 긴급 소집에 모인 병원장들은 모두 심술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깟 제약 업체들한테 접대 좀 받은 거 가지고 이렇게 망신을 줍니까? 병원을 무슨 장사치로 만들어 놨어.”
“맞아요. 이게 다 우리가 행동으로 안 보여 주니까 만만하게 아는 거지!”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각 병원에서 오프인 사람들 모아서 릴레이 시위합시다.”
“병원 기부금이 불법 리베이트? 그럼 이참에 의료수가 올려 주든가. 국민들한테도 우리가 얼마나 희생하고 사는지 똑똑히 각인시켜 줘야 돼요.”
한성대병원 사건이 대학 병원 스캔들로 번지지 않았나. 제약 업체와 대학 병원들의 밀월 관계가 적나라하게 보도를 탔다.
이 모두 공정위가 쥐새끼처럼 수사 자료를 언론에 흘린 탓이다. 제약 업체 리베이트는 이제 더 이상 한성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멍청한 놈들. 언론에 망신 준다고 다가 아닌데.’
쉴 틈 없이 원성이 쏟아지자 박 원장은 안도할 수 있었다.
멍청한 공정위 놈들. 딴에는 업계에 비리가 만연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겠지? 근데 이건 명백한 자살골이다. 덕분에 무심했던 타 대학 병원장들도 반 공정위 대열에 합류해 줬으니
말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 조사는 한계가 짙었다.
만약 공정위가 한성대병원을 처벌하면, 박 원장이 직접 타 대학 재단 기부금 내역을 제출할 참이었다. 그들이 들이미는 엄격한 잣대를 다른 곳에도 적용하면 남아날 병원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우린 그냥 액수만 좀 더 컸을 뿐이야.’
근데 멍청한 공정위 놈들이 그 수고를 덜어 주었다. 언론에 망신 주는 데에만 혈안이 돼서 다른 대학 병원들의 치부를 함께 터트려 버렸다.
꽤 유능한 젊은 과장이라 들었는데, 역시나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거 원……. 저희 때문에 다른 대학 병원까지 피해가 가 송구스럽습니다.”
박 원장은 분위기가 무르익자 잔뜩 점잔을 빼며 말했다.
“송구스럽긴요. 공정위 꼴을 보아하니 언젠간 우리도 쳤을 것 같습니다.”
“네. 담당자가 상당히 독단적이더군요.”
“현재 한성대병원 상황은 어떻습니까?”
“저를 포함한 5명의 인사가 기소됐습니다.”
“기소? 이 새끼들 기어코 형사처벌까지 하겠다는 거야?”
이들은 바로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한성대병원이 당하는 고초가 곧 자신들의 일이 될 테니 말이다.
“누가 보면 불법 약제품 써서 환자를 죽인 줄 알겠네!”
“이놈들은 실형 안 떨어지면 2심까지 갈 놈들이야.”
“아니, 진짜 그것들 막나가는 거 아녜요? 그럼 우리들도 다 형사처벌 하겠다는 거야?”
“에이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공정위는 저희에게 다른 모든 곳에도 이와 같은 잣대를 들이밀겠다고 했어요.”
“그게 진짜예요?”
“네. 그 작자는 한국 의료 시스템이 부서지든 말든 상관 안 할 놈이에요. 머릿속엔 오로지 조사 실적밖에 없었습니다.”
공정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진실’ 따위가 아니었다.
박 원장은 군불을 지피며 화를 돋웠다.
“아니, 사태가 이 지경인데 보건복지부는 대체 뭘 하는 거야.”
“맞아! 우리 입장 대변은커녕 중재도 못 하고 있잖아.”
“이러면 보건복지부가 왜 존재해?”
병원장들의 분노가 보건복지부로 옮겨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의혹 보도가 쏟아진 후부터 보건복지부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는 앞으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중재 안 하면 그냥 우리가 들고일어나지요!”
“그럽시다. 그냥 우리 다 끌려가고 의료수가 올려 버립시다. 끝장을 봐야 놈들이 정신을 차리겠어요.”
언젠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의료 리베이트를 적당히 묵인하는 게, 의료수가를 올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곧 깨달을 것이다.
그렇게 악담을 늘어놓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강현석 2차관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원장님들. 2차관 강현석입니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는데 아무도 이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심술이 잔뜩 난 병원장들의 얼굴은 얼마나 적개심이 가득한지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사내 때문에 병원장들의 태도는 180도 뒤바뀌었다.
“오 장관님……? 여긴 어인 일로.”
보건복지부의 수장이자 2선의원이기도 했던 오명석 장관이 함께 들어왔기 때문이다.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자린가?”
“그, 그건 아닙니다만.”
“아무리 내가 청와대 낙하산 장관이라도 이런 자리엔 참석해야지. 당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네.”
강 차관을 죽일 듯 노려봤던 이들은 장관 앞에선 온순한 양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관과 장관은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임명직인 장관은 대통령의 분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권의 대변인이라는 뜻도 되었다.
단순히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건복지부는 병원 전체를 징계할 권한도 가지고 있다.
“나 몰래 무슨 밀담들을 그리 나눴어?”
“미, 밀담이라뇨. 그냥 한국 의료계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있던 차입니다.”
“좋군. 우리도 지금 그걸 걱정하던 참이었거든. 뭐 그럼 바로 본론부터 얘기해 볼까?”
그가 호탕하게 말했다.
저 말을 정말 믿어도 될까?
하지만 지금은 뭘 재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공정위의 처사가 너무 과하다 생각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성병원 박 원장이 말했다.
“지금 공정위가 재단 기부금 내역 전부와 사용처까지 깠더군요. 그리고 저희 간부 다섯 명은 기소까지 했습니다.”
“뉴스로 들었네. 많이 곤란하다지?”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맛입니다. 장관님, 지금 공정위가 전 병원을 다 깠습니다. 이건 진짜 한국 의료계 전복시키겠단 의도 아닙니까.”
오 장관은 눈을 흘겼다.
“그래서 공정위가 타협책을 내놨다 들었네만. 강 차관 그 얘기 전해나?”
“아, 예. 해당 일이 업계에선 관행처럼 일어났다는 걸 공정위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요. 해서 공정위가 자진 신고 기한을 두기로 했습니다.”
병원장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진 신고?
“지금까지 제약 업체에 리베이트를 받은 내역, 병원 기부금을 용도 외에 쓴 내역 등을 공정위에 자진 고백 하십쇼. 형사처벌 면죄는 물론 과징금도 최소한으로 감면해 주겠다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병원장들은 펄쩍 뛰었다.
“대관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진 신고해서 우리한테 고백시키려는 술수 아닙니까!”
“형사처벌 면죄에 과징금 최소? 그 말을 누가 믿습니까? 공정위는 그걸 빌미로 저희 병원들을 더욱 옥죄어 올 겁니다.”
차관이 약속하고 장관까지 지켜보는데 그럴 리야 있겠는가. 어지간해선 공정위가 모두 다 넘어가 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눈치 9단, 권모술수 10단인 사람들이다. 공정위가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 꼼수 쓴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약속은 염려 마세요. 공정위가 그러하겠다고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건 그렇다 쳐도 그럼 앞으로는요? 제약 회사한테 기부금을 받지 말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병원의 고질적인 적자는 어떻게 메우는 겁니까.”
“정 그러시면 저희도 의료수가 인상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쾅-!
의료수가 인상은 건보료 인상과 직결될 수 있는 가장 큰 민감한 문제.
오 장관이 살짝 책상을 치자 회의실은 다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 차관, 만약 이를 지키지 않으면 공정위가 어떻게 한다고?”
함께 놀랐던 강 차관이 마저 말을 이었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한성대 병원과 마찬가지로 간부들을 기소하고 과징금도 최대한으로 부과하겠다고 합니다.”
“형사처벌 하겠다는 거지?”
“네. 지금 상황을 보면 아시겠지만 한성대 관계자들은 실형을 못 피할 겁니다. 집유가 떨어지면 2, 3심을 강행하겠다는 공정위의 의지를 확인했습니다.”
장·차관의 대화에 박 원장은 사색이 됐다. 이건 대화란 형식을 빌려 자신의 처벌 수위를 미리 알려 준 것이기에.
다른 병원장들도 마찬가지의 얼굴이었다. 지금은 한성병원의 얘기지만 이는 곧 자신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보아하니 곱게 넘어가긴 그른 것 같군.’
‘그럼 적당히 자백해?’
‘자진 신고 기한 정해 둔 걸 보면, 이쪽도 전체 조사할 엄두는 안 난다는 것 같은데.’
‘적당히 자백하고 넘어가는 게 상책이겠어.’
눈치 빠른 몇 몇 병원장들이 생각이었다.
“그럼 정말 자백하면 끝인가?”
“진정성을 보겠다고 합니다. 이 자진 신고 기한을 악용해 축소 자백할 수도 있으니까요.”
“봐서 너무 자백을 안 했다 싶으면 본보기를 치겠다는 건가.”
“네. 아시다시피 조사 인력은 한정적인데, 해당 관행은 너무 많이 이뤄졌습니다. 만약 공정위의 본보기에 걸린다면…… 정말 끝을 볼 겁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두 사람의 대화가 이런 바람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자백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 안 그럼 표적 수사를 당하게 될 것이다.
“병원장들, 여기에 대해서 더 할 말 있나?”
시끌벅적했던 회의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군.”
“…….”
“그럼 자리에서 일어들 나. 공정위에서 요구하는 내용 생각보다 꽤 많아. 얼른 가서 먼지 나는 자료 털어서 공정위 조사에 협조해. 자네들이 협조하면 공정위 과징금은 100억을 넘지
않을 거야. 이건 내가 약속하지.”
병원장들이 줄행랑치듯 나갈 때 발이 묶인 사내도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장관님.”
이 사태의 원흉인 박 원장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자네는 참 재밌는 사람이야. 이거 모두 자네 책임인 거 알지?”
“……책임요?”
“한성대병원이 응급실 파업 가지고 협박 안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왜 사태를 이렇게 만들어? 업계 사람들 다 하니까 우리도 적당히 넘어가라고 시위한 거야?”
오 장관의 설명이 정확했다.
박 원장이 되지도 않는 싸움을 고집한 건 바로 만연한 관행이었단 방패막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 처벌하면 다른 놈들도 걸고 넘어지려 했다. 천하의 공정위라도 전 병원을 다
처벌 못 할 것이니, 솜방망이 처벌에서 그칠 것이라 예상했다.
한데 웬걸.
조사 자료를 언론에 다 공개하며 의료계의 민낯을 고발해 버렸다. 덕분에 지금 3차병원들이 아수라장이다.
“그리고 우리한테 중재를 요청해? 뭐 적당히 버티면 우리가 자네들 똥이라도 닦아 줄 줄 알았나?”
“오, 오해십니다.”
“그게 오해면 내 분명하게 밝히겠네. 자네들은 우리 보건복지부의 방패를 기대하지 마. 뿐만 아니라 동료 병원 의사들에게 탄원서도 바라지 마.”
박 원장이 무어라 지껄이기도 전에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공정위에서 최후의 통첩이 왔다. 조사에 협조하면 기소 된 자네 다섯 명 간부에 대해선 형사처벌 없을 거라더군. 물론 과징금은 500억대가 되겠지만.”
“오, 오백억대요?”
“왜? 5백억보단 다섯 사람이 실형 사는 게 낫나?”
“아, 아닙니다.”
“그게 공정위의 최후통첩이었어. 만약 거부하면 뒷일은 나도 장담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