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운수 좋은 날
“안녕하세요, 한 과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야, 이 팀장. 아니, 이제 이 과장이지?”
오랜만에 만난 한유미 과장은 예전 얼굴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진급하고 처음 뵙네요. 경황이 없어 이제 인사드립니다.”
“시보떡이라도 돌리지 그랬어. 내가 꽃바구니라도 보냈을 텐데.”
“과장님껜 겨우 떡으로 퉁치면 안 되죠. 올해의 공정인상 없었으면 이렇게 빠른 진급도 없었을 텐데.”
“어머, 그럼 나 술 한잔 기대해도 되는 거야?”
“좋은 날에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술자리로 모시고 갈 의향도 있었다.
현재까지 파악된 중고차 업체의 허위 매물은 다 안전정보과에서 넘어 온 자료다. 그중에서 괜찮다 싶은 자료 출처는 죄다 한유미 보고서.
어쩌면 이 사건의 진짜 적임자는 불법 광고의 권위자인 그녀일지도 모른다.
“근데 자긴 안 본 새 많이 유해진 것 같다?”
“제가요?”
“응. 원래 자기는 남 앞에서 콧소리 안 내잖아. 제법 아양도 부릴 줄 알고.”
“……그랬나요.”
“좋은 의미야. 혈기왕성한 이 팀장도 좋았지만, 철든 이 과장도 좋네. 호호.”
“사실 과장이랑 팀장은 역할이 많이 다르더군요. 아무래도 협조 요청할 일이 많아서 처세가 는 것 같습니다.”
한 과장은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돌직구를 날렸다.
“그래? 그럼 우리 바로 본론부터 얘기하자. 내가 뭐 도와주면 돼?”
“꼭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닌데…….”
“어머, 진짜? 다행이다. 마침 우리도 지금 인력난이었거든. 이 과장이 차출 요청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세 팀 정도 필요합니다! 차출 좀 해 주세요.”
오랜만에 봐서 잠깐 잊고 있었다. 원체 밀고 당기는 걸 싫어하는 직설적인 성격이라는 걸.
“세 팀이나? 아이고, 이건…….”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저희가 이번에 중고차 시장 실태 조사를 해야 되는데 허위 매물 미끼 상품이 제일 많이 신고됐습니다. 안전정보과 사람이 제일 많이 필요해요.”
“맘 같아선 열 팀이라도 파견해 주고 싶지. 근데 어쩌겠어. 뒷광고, PPL이 30%가량 폭증해서 우리도 죽을 맛이야. 오히려 우리야말로 종합국이 필요할 지경이라고.”
어째서 그 친절하던 얼굴이 일 얘기만 나오면 싸늘하게 바뀌는 건지.
“한 팀으로 하자. 대신 내가 진짜 아끼는 에이스거든? 3인분 아니, 족히 5인분은 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 팀으론 무리…….”
“막히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내 조언은 10인분짜리야.”
어지간해선 잘 안 빼는 그녀인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인력이 없나 보다.
“왜? 인력이 많이 필요하단 걸 보니 사건이 잘 안 풀리나 봐?”
“……예. 사실 이래저래 난항이에요.”
“뭐가?”
“중고차 판매 등록 업체가 300곳이 넘더군요. 허위 매물, 강매 같은 피해 사례가 넘쳐나는데 다들 자기들 업체에선 안 한다고 우겨 대니…….”
“신고 사례를 다 소수의 무명 업체 탓으로 돌리는구나?”
“그렇습니다. 판매자연합 대표 4명을 만났는데 곧 죽어도 인정 못 하겠답니다.”
한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중고차 업계 1, 2, 3, 4등이면 절대로 강매, 허위 매물이 없지 않을 텐데?”
“모든 걸 다 고객 탓으로 돌리더군요. 그 사람들이 차 컨디션 높여서 샀다가 막상 감당 안 되니 다 업체 탓 하는 거라고.”
생각보다 중고차 시장은 복잡했다.
허위 매물을 파는 딜러도 있지만, 카푸어족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 신고 사례를 들이밀면 그들은 다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차를 선택한 것이라 주장했다.
사실 카푸어나 허위 딜러나 비율은 엇비슷해서 준철도 누구의 편을 들 수 없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럼 강매였다는 증거를 잡으면 되지 뭘 고민하고 있어?”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단순하고 황당했다.
“예?”
“자기가 직접 잡아. 판매자 연합 업체 네 곳에서 강매, 허위 매물이 있었단 것만 입증하면 되잖아?”
“그걸 제가 직접요? ……그보단 그냥 피해자 확보해서 저희 증언대에 세우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 소비자 믿고 조사했다가 나중에 카푸어족인 거 밝혀지면?”
“…….”
“냉정하게 말해 이 바닥엔 카푸어족 많다. 단순 변심 때문에 업체가 강매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널렸어.”
준철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그걸 저희가 어떻게 잡습니까?”
“사무처에 특수활동비 요청하고 직접 거래까지 해. 그 과정 자체가 다 증거로 쓰일 테니 인력 크게 필요도 없겠네.”
“대신 돈이 많이 들잖습니까. 이거 한두 푼이 아닌데.”
한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 과장, 우리도 홈쇼핑 과장 광고, 허위 광고 잡을 때 해당 상품 다 주문하고 사. 그리고 성분 분석까지 다 하는데 그 정도 수고도 어떻게 안 들여?”
안전정보과는 공정위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 부처였다.
밍크 100%짜리 광고 상품에 모피 30%가 섞여 있단 걸 밝혀내야 하기도 했고, 고가의 화장품에서 품질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았단 걸 밝혀내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샘플 구매에만 쓰는 돈이 1년에 30억이다.
“아닌 말로 침수 차나 주행거리 조작해서 판매한 차, 이거 어떻게 입증할 거야? 차 한 대 다 뜯어 봐야 하는데 고객차로 할 거야?”
“그건…… 그렇죠.”
“깔끔하게 활동비 지원받고 제대로 해. 아니, 배 한 척도 다 까 본 사람이 왜 차 한 대에 벌벌 떨어?”
준철은 붉어진 얼굴을 감췄다. 내가 너무 날로 먹으려 했나?
사실 피해 사례를 확보해 판매자연합 대표들에게 증거를 들이밀 참이었다. 한데 한 과장 말대로 그 피해자가 실은 카푸어였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나중 가서 진술을 번복해 버리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하지만 공정위가 직접 거래에 가담하면?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되고, 업체가 어떤 부분을 속여 팔았는지 차를 뜯어서 확인도 해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니 이게 제일 빠르네…….’
한 과장이 웃으면서 어깨를 툭 쳤다.
“어때, 이 정도면 10인분은 했지?”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한 팀만 차출해 주십쇼.”
“그래, 실태 조사 잘 끝내면 한잔 사. 나 아주 비싼 거 얻어먹어야겠다. 호호.”
***
경기도 한산에 위치한 중고차 시장.
200여 개 업체가 공동 장터를 운용하고 있는 이곳은 보유차량만 4만 대가 넘는 대한민국 중고차 1번지였다.
엔젤카 김남춘은 무려 이런 곳에서 3년째 판매왕을 달성한 전설 같은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 번 낚인 고객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 그…… 800만 원짜리 밴츠가 있다고 해서 연락드렸는데요.”
“어서 오십쇼. 고객님. 제가 연락 받은 김남춘 차장입니다.”
“근데 진짜로 800만 원짜리 밴츠가 있나요? 이거 혹시 침수 차 아닌가요?”
“아이고- 고객님, 요즘 그렇게 장사하면 딜러들 다 감옥 가요. 하하. 인터넷에서 보신 그대로 무사고에 침수 이력 없습니다. 차주께서 급하게 내놓고 가서 저희가 싸게 매입했죠.”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었다.
허위 매물에 낚인 고객은 한눈에 봐도 어리숙한 호구 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달변을 늘어놓으며 고객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음- 좋네요. 그럼 차 보여 주세요.”
“네. 정 못 미더우시면 시승도 한번 해 보십쇼. 문제 있는 차면 핸들 잡자마자 바로 감이 오실 겁니다.”
고객들은 그의 친절한 응대에 쉽게 넘어가곤 했다.
그는 흔한 중고차 딜러와 달랐다. 몸에 문신도 없었고, 근육 돼지도 아니었으며, 특유의 껄렁껄렁함도 없었다.
반듯한 양복 차림에 정돈된 머리, 그리고 금테 안경. 멀쑥한 차림은 그를 실력 좋은 영업사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관상의 얘기.
“아이고, 고객님 이거 어떡하죠? 3044번 매물은 한 시간 전에 계약이 됐다고 하네요.”
“아…… 진짜요?”
“네. 뭐 워낙에 좋은 매물이다 보니 금방 빠집니다.”
“하긴…… 800만 원짜리 무사고 벤츠가 흔한 건 아니니까.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의 진짜 영업 실력은 지금부터 발휘되었다.
“대신에 비슷한 사양의 중고차가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비슷한 사양요?
“네. 무사고 12만 킬로 제네스가 3천만 원에 나와 있습니다. 5만 킬로 아울링도 같은 가격이네요.”
“……3천 만 원요? 아까 그 밴츠랑 가격 차이가 너무 나는데.”
“그럼 그냥 가볍게 구경만 하세요. 어렵게 걸음해 주셨는데 제가 죄송해서 그럽니다.”
그렇게 두 번째 미끼까지 물면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 그럼 저 제네스로 계약하실까요?”
“……예?”
“왜요? 차가 맘에 안 드세요?”
“아, 아니요. 차는 마음에 드는데 아무래도 예산에서 너무 벗어나다 보니……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에 다시가 어디 있어요. 워낙 인기 매물이라 금방 다 팔릴 텐데. 오늘 저 두 시간 동안 고객님 모셨습니다.”
“그건 차장님이 보여 주신다고…….”
“그래서 제가 친절하게 응대해 드렸잖아요. 제가 고객님 맡으면서 놓쳤던 손님이 몇 명인 줄 아세요? 기왕 오신 거 계약하시죠.”
그래도 손님이 주저하자 그가 전화를 들었다.
“어, 김 실장. 여기 손님 좀 응대해 드려.”
뒤이어 등장한 김 실장은 우락부락한 몸매에 팔뚝에서 호랑이가 뛰어 놀고 있는 사내였다.
깍두기들까지 등장하자 사무실은 완벽한 강매 분위기였다.
“죄, 죄송하지만 살 수가 없어요. 제 현금 여력이 천만 원 정도라…….”
“천만 원이면 많으시네. 그거 선수금 박고 나머지는 다 캐피털 뚫어 드리겠습니다.”
“캐, 캐피털요?”
“뭐 차 사는 데 빚 안 내는 사람 있나요? 아까 고객님 신용 등급 1등급이라 하셨죠. 1금융권보다 조금 비싸긴 한데 연이율이 12%밖에 안 합니다.”
호구 1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담이 작아서 캐피털까진 못 쓰겠습니다.”
“담이 작다라……. 김 실장, 우리 손님 담 좀 키워 드려라.”
수박만 한 팔뚝을 가진 깍두기들이 다가왔다.
“아, 아닙니다! 저 담 큽니다.”
“우리 고객님이 이제야 말이 통하시네. 김 실장, 캐피털이랑 보험까지 싹 다 처리해서 오늘 안으로 꼭 차 인수해 드려.”
“옙! 사장님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
그렇게 기분 좋게 한 건이 끝났을 때 호구 2호가 등장했다.
“혹시 김남춘 차장님 계십니까? 인터넷에서 800만 원 짜리 밴츠를 보고 왔는데요.”
김남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은 운수가 터진 날이다.
호구 2호는 30대 초반의 양복까지 빼입은 남자로 1호보다 더 등쳐 먹기 쉬운 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