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3
23화
공수교대 (1)
대리점들이 증인 선서를 마치자 재판장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지금까지 득의양양했던 부사장은 이들의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평소엔 눈도 못 맞추던 이들이, 지금은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사님. 증인 신청을 한 대리점은 10명이었습니다. 나머지 점주들은 증인 신청을 하지 않았으니, 10명만 증인석에 서야 합니다.”
“증인. 이 사람들 모두 한경모비스 점주들 맞습니까?”
“예. 혹시 몰라 사업자 등록증까지 가져왔습니다. 모두 대리점, 가맹점 사장들입니다.”
“변호인 측 이의 제기 기각합니다. 모두 증언대 서세요.”
변호사의 마지막 발악도 먹혀들지 않았다.
검사는 박 팀장과 귓속말을 나누었고, 곧 박 팀장이 먼저 일어났다.
“증인, 먼저 묻겠습니다. 현재 한경모비스 측은 목표 매출이 자율적이었다 말합니다. 사실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저희는 그 의사결정에 단 한 번도 참여한 적 없습니다.”
“그럼 목표 매출은 보통 어떻게 이뤄졌습니까?”
“본사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식이었죠. 작년 매출에서 항상 30% 이상이 더 부과됐습니다. 10억의 매출을 올렸으면 내년엔 13억 하는 식으로요.”
박 팀장이 시선을 돌려 변호인 측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의 제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 본사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목표 매출 때문에 어떤 피해를 입었습니까?”
“본사가 과하게 목표 매출을 정하면 항상 강매에 시달렸습니다. 10억짜리 매출 대리점이 다음 년엔 13억어치 물건을 사야 하는 겁니다.”
“만약 그 물건을 다 못 팔았다면요?”
“반품도 안 시켜 줬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내년에 팔거나,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세일 행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신호로 곳곳에서 울분이 터져 나왔다.
“세일 행사를 해도 본사에선 일절의 지원이 없었습니다! 네들이 할당량 못 채웠으니 네들이 책임지라는 태도였어요.”
“밀어넣기만 당한 게 아닙니다! 잘 팔리는 제품 받으려면, 안 팔리는 거까지 끼워 팔기 당했습니다.”
“본사에서 신상품 출시하면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이것도 각 대리점마다 할당량 정해서 무조건 팔게 했어요.”
증언이 차고 넘쳐 오히려 검사가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다.
박 팀장은 다시 변호사를 바라봤지만 이번에도 이의 제기는 나오지 않았다.
“피고인. 이런데도 목표 매출이 자율적이었다는 겁니까? 반박할 말씀 있으면 하십쇼.”
박 팀장이 그리 묻자 부사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말씀드렸듯 저희 본사가 의욕이 과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이게 단순히 의욕이 과했다고요? 억지로 매출을 늘려 물건을 강매했잖습니까.”
“……그건 소수 대리점들 의견일 뿐이죠. 한경모비스는 목표 매출을 달성한 대리점들에게 가맹비 면제, 인센티브 등 다양한 지원 정책을 해 왔습니다.”
“판사님. 저건 거짓말입니다! 저희 상계점은 6년 전에 우수대리점으로 선정되었는데, 본사 지원금은 고작 몇십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저희 영동점도 우수대리점이었습니다! 근데 목표 매출을 채우면, 다음 년엔 목표 매출이 더 늘어났어요.”
부사장이 시답잖은 변명을 해 대자 대리점들이 일제히 발끈했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판사가 의사봉을 들기 전까지 진흙탕 싸움이 계속됐다.
“모두 정숙! 판단은 객관적인 증거에 입각해 내리겠습니다. 양측 증거 제시하세요.”
“판사님. 저희 먼저 하겠습니다. 이게 저희 공정위가 파악한 대리점들 재고 현황입니다.”
박 팀장이 제시한 재고 현황은 정말 가관이었다.
보통 창고에서 3년 이상 썩히면 ‘악성재고’로 분류되는데, 대리점 중엔 이 악성재고가 없는 곳이 없었다.
“이건 본사에서 반품 처리를 안 해 주니 악성재고로 쌓인 겁니다. 대리점 입장에선 돈줄이 막힐 수밖에 없죠. 그럼 결국 할 수 있는 게 할인 행사밖에 없습니다.”
“…….”
“단순히 의욕 때문에 목표 매출을 과하게 설정한 거면 왜 반품은 안 시켜 줬습니까?”
“……판사님. 대리점 영업하다 보면 본사에 반감을 가지는 대리점 또한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경모비스의 대리점은 1,200여 개인데, 증인은 고작 20명 남짓입니다. 대표성이 있다고
볼 순 없습니다.”
박 팀장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이 증거들에 대한 반박은 못 하고 겨우 대표성 가지고 시비입니까? 그럼 지금부턴 왜 다른 대리점들이 쉬이 참석할 수 없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팀장은 그리 말하며 증인들에게 말했다.
“증인, 저희가 진행한 저번 조사에서 본사에게 협박을 당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공정위 수사에 협조하면 가맹을 끊겠다, 불이익을 주겠다 하는 등의 협박이었습니다.”
“그걸 누가 지시했나요?”
“전화는 본사 부장이 돌렸지만, 그 배후는 한지호 부사장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가 일어났다.
“증인. 법정에서 허위 사실을 말하면 위증입니다. 본사가 가맹 거래를 끊겠다 말했다고요?”
“당연히 직접 말하진 않았죠. 근데 가맹 끊겠다는 말을 꼭 직접적으로 해야 알아듣습니까? 대충 돌려 말해도 다 협박인지는 알아요.”
그리 말하자 박 팀장이 다시 말했다.
“근데 최근 재판 앞두고선 본사의 직접적인 협박도 있었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건 증거도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재판에 출석하지 마라, 공정위에 했던 진술 철회하란 내용이었습니다. 근데 그건 협박보단 회유에 가까웠습니다.”
“회유요?”
“예. 이번 수사만 잘 넘기면 앞으론 강매하지 않겠다, 가맹 지원비 주겠다고 회유하더군요. 근데 결국 마지막엔 자기들 안 도우면 반드시 보복하겠단 뉘앙스를 풍기더군요.”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들어 볼 수 있습니까?”
“판사님! 저건 증거 신청 안 된 자료들입니다. 아직 진실이라고 판단할 수 없어요.”
재판 시작 전엔 증거도 미리 제출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
유리한 재판을 위해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하지만 판사는 고개를 저으며 이를 일축했다.
“들어는 보겠습니다. 하지만 증인. 변호 측 주장대로 만약 이 증거가 왜곡된 것이라 하면, 그 책임이 무거울 겁니다.”
“일말의 왜곡도, 조작도 없습니다. 통화 녹음본은 총 20여 개로 여기 있는 사장들이 전부 직접 녹음한 통화 내역입니다.”
결국 증거 제출이 인정되었고, 법정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 사장.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우리도 성의를 보일게.
-홍 사장. 한 번만 도와줘. 공정위가 유도신문을 해서 대리점들이 넘어간 거다. 그렇게만 말해 줘.
-아니, 내 말은 그냥 재판에만 출석하지 말아 달란 거야. 그것만 도와주면 우리 지금까지 대리점들한테 입힌 피해 자체적으로 다 보상하겠다고.
-후우…… 좋아. 정 뜻이 그렇다면. 하지만 한 가지만 분명히 알아둬. 공정위는 이번 일만 끝나면 당신들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대리점들이 평생 얼굴 보고 살 사람이 누구야? 우리
잘못 인정할 테니, 서로 마지막 선만 넘지 말자.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협박 전화를 돌린 주인공은 김원석 사장의 목소리였다.
회유가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할 협박이다. 공정위 없으면 앞으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말한 게 아닌가?
장시간에 걸쳐 그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변호사의 굳은 얼굴은 이미 재판 결과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
“죄송합니다. 저희가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별말씀을요. 본사 협박에 넘어가지 않아 주셔서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준철은 바로 대리점 사장들에게 향했다.
5년 동안 끌어 오던 사건이 끝났으니 이들도 뒤숭숭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더러는 추후 있을 본사의 보복에 대해 걱정을 떨쳐 낼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걱정하는 얼굴들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표정이 있다. 바로 후련함이다.
“팀장님. 근데 저쪽에선 저희 대표성을 문제 삼는데, 이게 문제 될 수 있습니까?”
“솔직히 대리점이 1,200개가 넘는데, 저희 20명 정도만 참석한 게 영 걸리네요.”
대리점 사장들이 우려를 표하자 준철이 웃었다.
“꼬투리 잡는 겁니다. 물론 너무 적었으면 정말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사장님들이 더 많은 분들 모아 주셨잖아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고 싶은 말은 완전히 다 하셨습니까?”
“못 한 말이 더 많지만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최 사장은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솔직히 저희도 정말 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협박 전화 때문에요?”
“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그쪽한테 독이 됐습니다.”
“독?”
“법원에 출석하면 보복하겠다 하는데 별생각이 다 들더군요. 도망치고 싶었죠. 근데 이렇게 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놈들이 나중엔 우리한테 어떻게 굴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정을 들어 보니, 대리점 사장들끼리도 의견이 갈렸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 협박 전화로 이들이 오히려 똘똘 뭉쳤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경 그룹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꼴이니.
“근데 저 팀장님.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요.”
준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 사장이 조심히 말해왔다.
“지금은 의기투합해서 뭉쳤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결속력이 약합니다.”
“네.”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일찍…….”
“걱정 마십쇼. 오늘 재판 보니 2차 공판까지 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변호사 표정 보니, 이미 끝난 게임이에요.”
“그럼 저쪽에서 백기 들까요?”
“네. 무슨 일이 있어도 판결 떨어지기 전에 합의하려 할 겁니다. 만약 판결 나와 버리면 저기 감당 못 해요.”
재판을 끝까지 강행하면 과징금에 더한 처벌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기간 내내 본사와 대리점이 얼굴 붉힐 순 없다.
어쨌든 이들에겐 생업이 걸린 일 아닌가?
빨리 끝내겠단 준철의 말에 그도 마지막 남은 우려를 덜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네.”
“근데 저 팀장님. 본사와 협상할 때 저희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현재 대리점들의 악성재고가 심각합니다. 얼추 추산한 것만 해도 40억 가까이 됩니다. 피해 보상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본사에 이 재고들 반품 처리라도…….”
준철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쪽에서 갑질 인정하면 자연히 다 처리될 겁니다. 혹시 모르니 저도 말해 놓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다.
안 팔린 물건 반품 처리하는 이 당연한 걸, 법정 싸움까지 해야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