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마지막 중재
“과장님, 동반성장위원회 간사님들 지금 다 자리에 오셨다 합니다.”
“벌써?”
“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일찍들 참석하신 것 같습니다. 자리 준비해 놓을까요?”
“음……. 그래, 나 좀 바쁘니까 주 팀장이 자리 좀 맡아 줘. 그리고 송 팀장 좀 올라 오래 그래.”
민 과장은 긴장한 얼굴로 집무실을 서성였다.
오늘은 중기적합업종 심사가 열리는 당일이다.
본래 일정으론 한 달 뒤에나 열릴 계획이었지만, 판매자연합이 시일을 재촉하여 오늘 날짜로 부랴부랴 잡힌 것이다.
‘대체 꿍꿍이가 뭐야…….’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판매자연합은 늘 중재 날짜만 잡으면 도망 다니느라 바쁘지 않았나. 협상은커녕 협상 테이블에도 나오지 않던 놈들이다.
그런 그들이 덜컥 약속을 잡으니 속내가 의심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부르셨습니까, 과장님.”
“어, 송 팀장. 혹시 공정위한테 연락 온 거 없어?”
“지난번 그쪽 담당자가 고객으로 위장해 강매 증거를 잡았다고…….”
“그 얘긴 나도 들었고 또 다른 건?”
“구입한 차량, 결함 조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직 소식은 없었습니다.”
한숨이 커지는 민 과장이다.
“아직 결과가 안 나온 모양이군.”
“예.”
“그보다 오늘 자율 조정에 공정위 참석한다고 했지?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냐.”
“중대한 자료를 제출할 예정이라 시간보다 늦는다고 합니다.”
민 과장은 속이 타들어 갔다. 대체 그 중대한 자료가 뭐라고!
오늘은 ‘중기적합업종’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협상이 벌써 다섯 차례나 결렬되며 중기청 간부들 모두 지쳐 있었다. 여섯 번째 논의에선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리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공정위도 이를 의식하여 허위 매물, 강매 정황 등 증거 자료를 보여 줬지만 아직 크나큰 한 방이 없는 상태.
판매자연합은 허위 매물은 부동산에도 많다고 응수하며 투쟁을 암시했다.
“과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판매자연합이 직접 중재 신청하는 건 처음이잖습니까. 저쪽도 뭐 바라는 게 있으니 자리에 나왔겠죠.”
“진짜 그랬다면 우리한테 그 요구 조건을 말해 줬겠지.”
“예?”
“무리한 요구 늘어놓으면서 자리 파투 낼 게 뻔해.”
진짜로 대화할 의지가 있었다면 절대 이렇게 나올 수 없다. 자신들의 요구 사항은 뭔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등을 솔직하게 말하고 절충안을 찾았을 것이다.
자율 조정회의는 물밑에서 합의된 내용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일 뿐이다.
“그럼 판매자연합은 아예 협상할 생각이 없는 겁니까?”
“나도 그 속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는 속내를 팀장이라곤 어찌 알겠나.
“송 팀장, 먼저 내려가라. 공정위에서 넘겨준 강매 증거들 빼먹지 말고 챙겨 가.”
“예. 알겠습니다.”
민 과장은 복잡한 머리를 털어 내며 핸드폰을 들었다.
[이 과장님, 중기청 민 과장입니다. 오늘 자율 조정 회의 2시까지인데…….]***
자율 조정회의는 동반위 간사 5명의 착석과 함께 시작되었다.
양측이 서로 사활을 거는 만큼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당부의 말씀드립니다. 이미 다섯 번의 회의를 겪어 본 만큼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잘 아시리라 판단합니다. 오늘은 부디 서로가 양보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위원장의 기대는 초장부터 무너져 버렸다.
“그 다섯 번의 결렬이 왜 일어났을까요?”
포문을 연 건 아현차 대변인이었다.
“저희는 지금까지 판매자연합 측에 간청을 해 왔습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서로 합의점을 찾아보자고.”
“…….”
“마냥 대화만 요구한 게 아닙니다. 3년 뒤 시장 진출, 자사 차만 판매, 판매 대수 3만 건 제한 등 상생 방안까지 마련했습니다.”
“…….”
“하지만! 판매자연합은 대기업 타도만 외치며 무조건 반대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 무슨 진정성 있는 대화가 이뤄질 수 있겠습니까?”
위원장은 아현차 대변인을 제지했다.
“답답한 마음은 알지만 서로 심기를 거스르는 말은 삼가세요.”
“그렇다면 판매자연합에서 상생 방안을 좀 말씀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는 물밑에서 서로 협상하고 그 내용을 확인하는 자리 아닙니까?”
“…….”
“사전 교류도 없이 덜컥 회의부터 열자, 이건 대화하는 시늉만 내겠다는 거죠.”
동반위 간사들은 중기 편을 더 들어줘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이 말만큼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회의 날짜만 잡았지 양측이 아무런 교류도 없지 않았나. 아현차는 날짜가 잡히자마자 고위급 임원들을 보내 소통하려 했지만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위원장님 저희는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소비자의 편익! 중고차 시장은 해마다 폭발적인 성장을 해 왔지만, 소비자 신뢰도는 여전히 2013년에 머물러 있습니다. 중고차 시장이
중기적합업종으로 지정된 해죠.”
“…….”
“이것은 시장에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저희 아현차는 중고차 시장의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힘쓰겠습니다. 시장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건 자율 경쟁뿐입니다.”
민 과장은 슬쩍 판매자연합을 살폈다.
오늘따라 참 이상하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 말을 끊거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텐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판매자연합이 조용했다.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걸 보면 혹시 타협의 여지가……?
“누가 들으면 아현차가 자선단체인 줄 알겠군요. 우리 고객들은 흉기차 안 산다고 학을 떼던데.”
“뭐라고요?”
“그리고 아까 무슨 고객을 호구로 아네 마네 말씀하셨는데, 그건 아현차가 원조 아닙니까. 내수차랑 수출차가 다르다죠?”
“드,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위선 그만 떨고 진솔하게 얘기합시다. 이건 고객들의 신뢰 문제가 아니에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밥그릇 싸움일 뿐이지.”
그럼 그렇지. 아주 칼을 벼르고 왔구나.
박 사장의 열변은 계속되었다.
“위원장님, 소비자의 편익 얘기가 나왔으니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아현이 진출하면 당장엔 소비자의 편익이 조금 올라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디 대기업의 본성은 시장 독점했을 때 나오는 법이죠.”
“…….”
“무너진 신뢰? 저희를 욕하는 국민 여론? 과연 아현이 중고차 시장을 독점하고 횡포를 부릴 때도 똑같은 반응이 나올까요?”
민 과장은 살짝 감탄했다. 감정적으로만 나왔던 지난 다섯 번의 회의와 달리 오늘은 꽤 탄탄한 논리를 들고 왔다.
“더 지독했으면 지독했지 절대로 저희보다 낫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멋대로 예단하지 마세요!”
“아현이야말로 업계 자정작용이 없을 거라 예단하지 마세요. 저희 중고차 업계는 지금까지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노력할 겁니다. 충분히 개선할 수 있습니다.”
아현차 측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요? 근데 박 사장님. 공정위가 실태 조사한바, 본인의 업체인 엔젤카에서 허위 매물과 강매 등의 정황이 잡혔습니다.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딜러가 불법 대출까지 알선하다니.”
“네. 그래서 그 직원은 저희가 정리했습니다.”
“……뭐라고요?”
“사실 그 사람은 원래부터 말썽이 많았던 직원이었거든요. 보고가 올라온 즉시 바로 해고 처리 하였습니다.”
박 대표는 부랴부랴 끼워 넣은 징계 기록을 제출했다.
“또한 이번을 기회로 판매 사원 정기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미흡하지만 저희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쳐 나갈 작정입니다.”
“위원장님! 이건 언 발에 오줌 누깁니다. 대표가 형사처벌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혐의인데, 직원 해고하고 끝은 말이 안 되죠.”
“그러면 저희가 제안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박 사장이 의외의 말을 꺼내자 회의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제안이나 협상 같은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던 사람들이다. 분위기상 오늘도 파투가 날 성싶었는데 갑자기 제안이라니!
동반위 간사 5명은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말씀하세요.”
“거국적으로 저희도 한발 양보하겠습니다.”
박 사장은 준비한 제안을 늘어놨다.
잠시 기대에 찼던 얼굴들이 바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아현차의 시장 진출을 5년 뒤로 하자고요?”
“네.”
“자사 차 판매……. 아니, 5년 이상 된 중고 자사 차만 판매하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판매 대수를 1만 건으로 제한한다면 저희도 이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당연하게도 아현차가 들고일어났다.
“지금 이 논의가 얼마나 지체되어 왔는데 시장 진출을 5년 뒤에나 하라니요! 5년 이상 된 차만 판매? 우린 지금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거지, 고물상에 진출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더군다나 판매 대수 1만 건?”
“뭐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이죠.”
“숟가락에 쌀 한 톨 올려 주고선 무슨 첫술을 논해요?”
경악스러운 조건이다.
중고 매물 대다수는 출고된 지 2~3년 된 차로, 그나마 마진을 가장 많이 남길 수 있는 구간이다.
차량은 감가상각이 심해서 5년만 되도 반값 이하로 곤두박질친다. 가격이 싸면 당연히 마진도 적게 남길 수밖에 없는 구조. 게다가 판매 조건도 1만 대로 제한했다.
한마디로 마진도 적게 남는 중고차를 그것도 1만 대만 팔라고 하는 것이다.
“겨우 이 정도 양보한다고 시장 개선이 이뤄지겠습니…….”
하지만 아현차 측은 강하게 반발할 수 없었다.
동반위 간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이들은 판매자연합이 절충안을 먼저 제안해 줬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었다.
-부사장님, 너무 강하게 반발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저 사람들은 중기 쪽 편일 수밖에 없어요.
-소비자 편익 운운해 봤자 소용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에 아현차 측 관계자들이 쑥덕거렸다.
민 과장은 이 처참한 광경 앞에 망연자실했다. 이는 대형마트를 일요일에 딱 한 시간만 영업할 수 있게 해 주겠단 얘기와 다름없다. 고작 이 정도로 시장 개선이 이뤄질 리 만무하다.
“아현차 측, 이 정도면 판매자연합 측에서도 양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덜컥.
그렇게 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기울어 갈 때, 간담회장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에 시장 실태 조사를 맡은 공정위 이준철 과장입니다.”
위원장은 탐탁지 않게 준철을 훑었다.
“딱히 오실 필요는 없는데…… 중고차 실태 보고서는 이미 다 넘겨받아서.”
“아직 넘기지 못한 중요 자료가 있습니다.”
“중요 자료요?”
“예. 차량 결함 자료인데, 업계 실태는 저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심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