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자진 리콜
“안녕하세요, 공정위 이준철 과장이라고 합니다.”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토록 숨 막히는 분위기가 반길 줄이야. 처음 만난 소대위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적개심이 가득했다.
“다름 아니라 X9 결함과 관련한 문제를 논의하고 싶은데…….”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그 얘기 참 일찍도 듣습니다. 저희 소대위가 문제 제기를 몇 건이나 했는지 아시는지요?”
“저희는 사람 하나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공정위가 나서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하잖아요?”
“에잇! 이딴 얘긴 할 필요도 없어. 당신, 맞죠?”
“……예?”
면담 5분 만에 벌써 파행 분위기.
그중 어떤 사내는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신문 기사를 들이밀었다.
“아, 당신 맞잖아. 누굴 속이려고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아현차가 중고차 시장 진출할 때 공정위의 역할이 아주 컸다 들었습니다. 이 뉴스에 나온 종합국 이준철 과장, 본인 아닙니까?”
“…….”
“대답 못 하는 거 보니 맞네, 맞아!”
“이거 뭐 더 들어 볼 필요도 없겠구만. 오늘은 아현차 대리인으로 나오셨습니까?”
어쩐지 살기가 남다르더라. 이미 담당자 신상 조사가 다 끝난 모양이다.
공정위가 소비자의 편익을 내세워 아현차의 시장 진출을 도왔는데, 정작 진짜 소비자들의 민원에 대해선 묵살했으니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준철은 그냥 공정위 전체를 대표해 욕받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들 그만들 해. 우리 지금 어리광 부리자고 이 자리 나온 거 아니잖아.”
“하지만…….”
“아까운 시간 계속 과거 얘기하는 데 쓸 거야? 앞으로 대책 논의하는 데도 빠듯하지 않아?”
다행히 김성원 대표가 나서며 분위기는 좀 수그러들었다.
“결례해 죄송합니다. 사실 저희가 지금 감정이 많이 격앙된 상태입니다. 최근에 아현차를 만났는데 아주 안하무인격으로 나오더군요.”
“만나 보셨다고요?”
김성원은 한숨을 쉬더니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얘기해 줬다.
듣고 나니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현 쪽은 무상 수리로 때우겠다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아현 측은 계속 차량 자체엔 문제없다, 제조 과정에서 몇 대의 불량이 나왔을 뿐이다 하며 넘어가려는데 이게 말이나 될 소립니까.”
김성원의 목소리도 곧 격앙되었다.
“명백한 설계의 실패예요. 대형 SUV 모델을 소형으로 체급만 낮췄으니 이런 부작용들이 속출하는 겁니다.”
“아현차에 방금 얘기도 말씀해 보셨나요?”
“왜 안 하겠습니까. 근데 그쪽은 자기들이 더 전문가라면 우릴 무슨 돌팔이 취급했습니다.”
“더 웃긴 건 아주 법대로 가자고 난리예요. 결함 입증은 어차피 저희 쪽에서 해야 하니 우리가 불리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사례가 미국에서 접수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나라는 고객이 에어백 옵션을 안 넣고도, 차량 사고 때 에어백 안 터졌다고 천 만 달러짜리 소송을 거는 나라다.
한국 사람 입장에선 고객 잘못 아닌가 반문할 수 있지만, 미 법원은 에어백을 편의 기능이 아닌 안전 필수품으로 보고 소비자의 편을 들어준 판례까지 남겨 두었다.
과실 입증 책임도 기업에 있다. 이런 논쟁에 휘말리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제조사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고객과 기업 간엔 정보 비대칭이 이뤄질 수밖에 없으니, 전문적인
기업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대한민국은 기업가들의 나라.
비전문가인 고객이 과실을 입증하려면 감당하기 힘든 돈과 노력이 든다.
문제는 있으나 입증할 자신이 없으니 소대위 사람들은 속만 태웠고, 아현차는 이러한 허점을 이용해 가당치도 않은 조건을 내걸었다.
“과장님! 우리 진짜 살고 싶습니다. X9 시동 꺼짐 얘기 나올 때마다 가슴이 얼마나 철컥철컥 내려앉는지 아세요?”
“우리가 무슨 아현차한테 덤프트럭이랑 충돌해도 멀쩡한 차 만들라는 거 아닙니다. 제발 안전 기능에만 충실한 차, 딱 그거예요.”
이들은 고속도로에 들어설 때마다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시동 꺼짐은 인간에 비유하면 심장마비나 다름없다. 고속도로에서 벌어진다면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성토가 계속되자 준철도 괜히 죄책감이 커졌다. 그런 아현차를 더 나쁜 놈들 잡겠다고 중고차 진출 허락해 버렸으니……. 어쩐지 이 문제에 일조한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다.
“그럼 여러분들이 원하는 보상안은 뭡니까?”
“환불요. 저흰 더 이상 이 차 못 탑니다.”
“공정위가 도와주세요!”
준철은 쓰디쓴 얼굴로 미간을 짚었다.
자동차 환불은 초강도 리콜 조치로 아현차 입장에서 이를 들어줄 리 만무하다. 사실상 이건 X9의 단종을 의미하며, X9 다른 차주들의 차량까지 환불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적자가 눈에 보듯 뻔한 결정을 내려 주진 않겠지.
아현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무상 수리나 보증 기한 연장으로 끝내고 싶을 거다.
“그럼 이렇게 한번 해 보시죠.”
준철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아현차 관계자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자진 리콜을 권유해 보죠.”
“자진 리콜요? 아현차가 콧방귀나 뀌겠습니까?”
“맞아요. 우린 지금 하루하루가 급합니다. 어차피 그놈들 듣지도 않을 텐데 권고 말고 바로 명령으로 내려 주세요.”
준철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급하니 자진 리콜로 유도하겠다는 겁니다.”
“예?”
“사실 이 문제는 행정명령으로 가면 복잡해질 수밖에 없어요. 아현차가 당연히 승복할 리 없고 시일은 계속 지체되겠죠. 가장 좋은 건 그래도 기업 설득해서 자진 리콜로 합의하는
겁니다.”
말이 끝나자 김성원이 우려를 표했다.
“그렇다고 아현차가 자진 리콜에 응할 리도 없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끝장 싸움으로 가야죠.”
준철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해서 말인데 혹시 문제 된 차량을 한 다섯 대 아니 한 열 대 정도만 모아 줄 수 있나요?”
“차량 열 대요?”
“예. 카트리(KATRI, 한국자동차안전연구원)에 주행테스트 다시 의뢰할 겁니다.”
카트리는 자동차 업계의 청와대다. 자동차 업계는 검찰보다 이곳을 더 두려워한다. 법적 싸움에 휘말리면 소송전이라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카트리가 그냥 X9 인허가 취소해 버리면 그 순간 단종 차량이 되어 버린다.
기껏 할 수 있는 게 차량을 보완해 재심사를 요청하는 것뿐.
“물론 이 계획은 어디까지나 플랜B입니다. 되도록 리콜 권고로 끝낼 생각이에요.”
과연 아현차 측이 자진 리콜에 응할까? 장담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러길 바라는 것 말곤 도리가 없다.
“불량 차량만 모아 놓고 검사하면 분명 불량 패턴이 나올 겁니다. 그래서 되도록 많은 표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실 수 있나요?”
준철의 설명을 들은 김성원이 말했다.
“그런 용도라면 저희가 100대도 모아 드릴 수 있습니다.”
***
이튿날.
공정위의 소명 요구가 아현차를 흔들어 놨다.
최근 출시된 X9에 대한 결함 해명서. 이건 사실 대답할 변명도 없었다.
공정위의 소명 요구는 리콜 명령의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렇게 시작된 조사가 고공 행진하는 아현차의 주가를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된 거야. 알아봤어?”
홍상기 부회장은 부랴부랴 달려온 임원들에게 성질을 부렸다.
“예. 아무래도 공정위가 그놈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 소대위인가 뭔가 하는 놈들 말인가?”
“그렇습니다. 최근 X9과 관련한 논란들에 대해 들은 자리였다고 합니다.”
부회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한 사내를 향했다.
“김 사장, 그때 그놈들 만났다 하지 않았어?”
“아……. 예.”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 지경이야.”
“분명 좋게 일렀는데…….”
“좋게 말했으면 됐겠냐고. 이건 자네가 설득 실패한 거 아니야.”
엄밀히 말해 이건 설득의 실패가 아니라 제안의 실패였다.
무상 수리 조건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하지만 부회장의 머릿속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주가는 어때?”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만약 공시가 나가면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젠장할 공정위 놈들 좋게 봐 줬더니.”
홍상기는 이 사태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 사건을 경험하며 공정위를 자신의 편이라 생각하지 않았나.
본래 아홉 번 괴롭히다 한 번 잘해 주면 괜히 친해진 것 같고, 동료인 것 같은 법이다.
“어떡할까요…….”
부회장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한 사내가 입을 뗐다.
“부회장님, 어차피 막다른 골목입니다. 저희가 피하면 되레 당국의 의심만 사게 될 겁니다.”
“정면 돌파하란 말인가.”
“네. 어차피 그쪽은 자진 리콜 권유하려고 만나자는 겁니다.”
권고는 말 그대로 권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다른 임원도 거들었다.
“사실 법리적으로 따져도 저희한테 불리할 게 없어요. 어차피 입증 책임은 제기한 쪽에 있죠.”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게 공정위일 텐데, 이 싸움 길게 가져갈 것 같지 않습니다.”
공무원이 어디 일이 좋아서 하는 놈들인가. 하도 고객들 불만이 많으니 그냥 하는 시늉만 하려고 이런 거창한 자리를 마련한 게 틀림없다.
모든 임원이 동조하며 정답이 결정 났지만 부회장 눈엔 한 사내가 걸렸다.
“우리 박 전무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군. 왜 한마디 말이 없지?”
“…….”
X9 문제라면 자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박 전무다. 회의 내내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았다는 건 강한 항의를 의미했다.
“뭐든 말해 봐. 걸리는 게 있어?”
부회장의 재촉에 임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융통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이 이번엔 또 얼마나 속 터지는 말을 해 댈까?
“아니오. 없습니다.”
“뭐?”
“부사장님 말씀대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공정위 만나서 담판을 봐도 된다는 거야?”
“네. X9은 이미 만 대 이상 팔렸습니다. 적자가 불가피하죠. 물량 대기도 많은데 리콜에 응하는 건 이 모든 수익을 포기한다는 뜻과 다름없습니다.
“흠, 구구절절 맞는 소린데 박 전무가 그 소릴 하니 이상하구먼.”
박 전무의 얼굴은 뭔가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부회장은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얘기 나올 때마다 혼자서 반대하던 놈 아닌가. 초 치는 소리 안 나오는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이다.
“부회장님. 박 전무가 어지간하면 이런 소리 잘 안 하는 친군데 확실한가 봅니다.”
“맞습니다. 이건 융통성 없는 친구가 봐도 질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 하하.”
긴장감이 팽배했던 회의실에 웃음꽃이 폈다.
“좋아. 그럼 우리가 직접 공정위 만나 보지. 자진 리콜 빠져나갈 대책 있는지 다들 고심 좀 해 봐.”
“네. 하하.”
분위기에 휩쓸려 박 전무도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 웃음이 아닌 체념에서 나온 자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