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자진 리콜 (2)
기업 면담은 아현차 본사에서 진행되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자리다. 소명 요구는 굳이 얼굴 볼 필요 없이 서류 대 서류로 얘기하면 되는 것을.
자리까지 마련한 걸 보면 분명 불필요한 얘기까지 오갈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기사로 터트렸어야 하나.’
보통 자동차 리콜과 관련한 뉴스는 핫이슈로 기자들도 잘 따라붙는다. 게다가 대상 차량은 이미 세간에서 말썽 차로 유명한 X9. 아마 터트리면 바로 실검을 장악할 것이다.
그래도 잔칫집 분위기인 아현차 분위기를 고려해 배려를 해 줬건만, 이제 보니 그게 맞는 선택인가 싶다.
‘……혹시 모르지. 얼굴 직접 보자고 할 정도면 괜찮은 대안이 있을지도.’
그러한 기대는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좌절되었다. 아현차 임원들 얼굴에서 긴장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6개월 전 출시된 차가 단종될 위기에 처했는데, 이토록 분위기가 밝을 수 없다.
“어서 오십쇼. 홍상기 부회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이준철 과장이에요.”
“안 그래도 한번 따로 인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저희의 중고차 진출은 소비자의 편익이 극대화되는 혁신적인 사건이 될 겁니다. 모든 공무원들이 다 쉬쉬했는데 과장님께선
솔선수범하셨죠. 회사를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네. 축하드립니다.”
“개인적으로 과장님처럼 유능한 분이 겨우 공무원이란 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저희 아현차에 입사하셨다면 최연소 사내 임원도 달았음 직한데.”
부회장은 자꾸 지나간 얘기를 꺼내며 친한 척을 해 왔다. 부담스런 칭찬이 계속되자 자리가 슬슬 불편해지는 준철이었다. 기름진 칭찬이 자신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감언이설로 들렸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한마디 툭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진 리콜은 무엇보다 기업의 협조가 중요한 행정절차. 피차 감정이 상해서 좋을 게 없다.
“사실 저희 아현차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뭐 하나 좀 소비자를 위해 하려 하면 뒤에서 강성 노조가 버티고 있고, 글로벌 브랜드들과 경쟁하자니 기술력은 떨어지고.”
“…….”
“그러던 차에 이런 기회가 왔어요. 모두 과장님 덕분입니다. 그리고 또…….”
“저기 부회장님, 지나간 얘기는 다음에 마저 하고요. 오늘은 저희가 좀 중차대한 문제를 가져왔는데요.”
처음으로 말을 끊자 그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최근 아현차에서 출시한 X9에서 많은 불량 접수가 이뤄지고 있어요.”
“…….”
“안전벨트, 에어백 오작동. 잦은 시동 꺼짐과 누유. 이 모두 운전자 안전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대체 이런 하자가 왜 발생하는 거죠?”
답은 정해져 있는 문제다. 차를 잘못 만들었으니까.
“저희도 내부 조사를 했는데요. 아무래도 제조 과정에서의 결함이…….”
“확실합니까. 제조 과정 결함이?”
진부한 변명이다. 또 제조 과정 탓이라니.
“저희 자체 조사에선 결과가 달랐습니다. 이건 차량이 설계 단계부터 잘못됐단 지적이 나왔습니다.”
“……네?”
“부회장님, 제가 물은 질문엔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차를 잘못 만들었으니 이런 불량이 계속 접수되겠죠. 그러니 오늘 상의할 문제는 이 잘못 만든 차를 어떻게 보상할지에 대한
대책입니다.”
이로써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완전히 싸늘하게 돌변했다.
“긴 말 안 드리겠습니다. 자진 리콜 하세요.”
회의실 곳곳에서 신음이 나왔다.
부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이보세요, 과장님. 자진 리콜이 기업에게 무슨 의민지 모르십니까?”
“잘 압니다. 더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죠.”
“그건 이상적인 얘기고요!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할 기업의 적자는요. X9 모델은 우리 개발진이 장장 10년에 걸쳐 연구한 아현의 야심작이었습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사고
무섭다고 중단할 수 없어요.”
장장 10년은 얼어 죽을.
세간에선 이미 대형 모델을 체급만 낮췄다는 평이 자자한데.
“게다가 지금까지 파악된 불량은 모두 원인 미상의 결함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설계 실패라는 증거가 없어요.”
“원인 미상의 결함이 면죄부가 아닙니다만.”
“그건 과장님 생각이고요. 법적으론 책임이 없는 겁니다.”
준철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입증 책임이 소비자에게 있단 걸 알고 이용하려 든다.
이건 딱히 놈들을 원망할 수도 없다. 법이 그 모양이니 놈들은 그 법망 뒤에 최대한 숨는 것뿐이다.
“부회장님, 원래 사람 몸도 원인 미상의 통증이 가장 무서운 법입니다. 몸에 발견하기 힘든 암 덩어리가 있단 증거거든요.”
“…….”
“취약한 법망 틈으로 빠져나갈 생각 말고 현실을 직시하십쇼. X9은 지금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는 찹니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지기 전에 기업에서 협조해 줄 수 없습니까?”
법적으로 불리한 게 사실이었기에 준철도 최대한 간청하듯 말했다.
하지만 전혀 쓸모없었다.
“물론 저희도 협조할 수 있는 건 해야죠. 해서 지금 고객들과 보상안에 대해 논의 중입니다.”
“보상안?”
“네. 문제 된 차량을 전부 무상 수리하고 보증 기한을 3년 더 연장해 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고객들도 이 방안에 호의적이라고…….”
“암 환자한테 반창고 하나 붙여 주고 보상? 어느 누가 이걸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까?”
뻔뻔한 놈들. 소대위는 이 제안 때문에 더 뒤집어졌는데, 그걸 무슨 협상이 잘 진행되는 척하나.
시간만 잘 끌면 고객들이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아니,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자진 리콜에 응할 마음 없습니까?”
부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단호히 대답했다.
“예. 공정위의 무리한 요구엔 응할 생각 없습니다. 저희가 소비자들과 ‘직접’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준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운 길을 꼭 어렵게 가시는군요. 하지만 오늘 이 대답,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
“입증 책임이 소비자한테 있다고 해서 저희가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저흰 카트리에 주행 테스트를 다시 시킬 거거든요. X9이 진짜로 원인 미상의 결함인지, 암 덩어리인지 곧 판명날
겁니다.”
홍상기 부회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과장님께서 공정위 소속이라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카트리가 그렇게 널널한 곳이 아닙니다. 어차피 이 문제는 고객과 우리가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예요. 힘 빼지 마십쇼.”
그는 자신만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동차 업계에서 리콜논란이 뭐 한두 번 있었나. 사소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고객과 다 합의로 끝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한번 두고 봅시다.”
준철은 그리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아현차 본사를 빠져나온 준철은 전화기를 들었다.
“네. 김 대표님 저 이준철 과장인데요. 플랜 B로 갑시다.”
***
명주에 위치한 카트리(KATRI, 자동차안전연구원).
업계 저승사자란 악명과 달리 이곳은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차량 인허가 심사가 매일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 바쁜 날보다 한적한 날이 더 많은 게 사실이었다.
어제 걸려 온 공정위 의뢰만 아니었다면 오늘도 그랬을 것이다.
“김 과장, 이건 뭐야?”
연구원장 최희준은 짜증스런 얼굴로 공문을 뒤적거렸다.
“아, 예. X9 주행 테스트요. 아현에서 최근에 출시한 차인데, 소비자들 불만이 너무 많이 접수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정위가 주행 테스트를 다시 의뢰했습니다. 업계 얘길 들어 보니 지금 리콜 하네 마네 할 정도로 심각한 것 같습니다.”
최 원장 얼굴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뭐 리콜 논란이 한두 번 있는 일인가. 대한민국에서 리콜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불려 다니는 곳이 바로 이 카트리다.
“뭔데 출시 6개월 된 차를 리콜시키려 그래?”
“피해 사례 보니 안전벨트, 에어백 오작동 및 시동 꺼짐 현상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그거야 아현차에 늘 있는 일이잖아.”
“그건 그렇죠.”
“혹시 뭐 사망 사고라도 났어?”
“그건 아직 없었습니다.”
최 원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망 사고도 없었는데 무슨 우선 테스트를 해 달래. 우리가 뭐 노는 집단인 줄 알아.”
기분이 나쁜 최 원장이다.
공정위는 해당 차량을 반드시 우선 테스트 해 달라며 특별 부탁을 해 왔다. 하도 호들갑을 떨어서 사망 사고라도 접수된 줄 알았는데 웬걸. 결함 내용도 그냥 아현차의 고질적인
문제였고, 특별한 사고도 접수되지 않았다.
“그래도 공정위가 부탁한 일인데 우선 테스트는 해야지 싶습니다.”
“사실 이 논란은 저희한테도 피해를 끼칠 수 있는 문제라……. 협조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정위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다.
국내에서 출시되는 차는 이미 검증을 거치고 출시된다.
달리 말해 아현의 X9은 이미 주행 테스트를 모두 거쳐 갔다는 것이다. 그런 차에 불량만 500건이 신고됐으니……. 만약 진짜 문제 있다 판명되면 카트리 또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공정위는 카트리에게 정말이지 위협적인 존재였다.
먹이사슬로 따지자면 자동차 업계 위에 카트리가 있고, 그 위에 소비자분쟁원이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마음만 먹으면 인허가 심사자인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미칠 수 있었다.
“그래도 우선 테스트는 미뤄.”
“예?”
“조사 최대한 늦추란 말이야. 어차피 리콜 논란은 다 기업이랑 소비자랑 중간에 타협하게 되어 있어. 그냥 서로 감정 격해져서 우리한테 의뢰한 것뿐이니까 하는 시늉만 해.”
“아, 예. 알겠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였다.
X9에 진짜로 결함이 발견되면 왜 이런 차량에 인허가를 내줬냐는 논란이 나올 테고. 문제없다고 하면 왜 기업 편드냐고 논란이 나올 것이다.
근데 굳이 논란의 중심으로 뛰어들 필요 있나?
입 다물고 이 사태가 진정되길 바라는 게 최고의 대처다. 어쩌면 공정위도 소비자들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조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후에 접어들었을 때, 최 원장의 바람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뭐, 뭐야 이건!”
한산했던 테스트 도로에 웬 차량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차량들은 순식간에 카트리 주변을 점거하며 테스트 도로를 고속도로 정체 길처럼 만들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최 원장님. 공정거래위원회 이준철 과장입니다.”
최 원장은 분노의 눈길로 30대 청년을 훑어봤다.
주행 테스트라 해서 한 서너 대 가져올 줄 알았는데……. 여길 무슨 F1경기장으로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