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리콜 명령
“실패작요?”
“실패작이란 말도 과분합니다. 도전을 해 봤다는 전제가 있어야 실패라는 말도 쓸 수 있으니.”
“그럼 X9은 도전도 안 해 봤다는 겁니까?”
“이미 다 아시는 내용 아닙니까. 기존에 출시한 저희 대형 SUV 모델을 체급만 낮춰 출시한 게 X9입니다.”
한마디로 설계 재탕.
“헤비급을 다이어트만 시켜 라이트급으로 만들었으니 부작용이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죠. 소대위가 지적한 문제 모두 개발 단계부터 보고된 문젭니다.”
X9은 개발 단계부터 잡음이 많았다.
사람이 10킬로 감량하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차가 100킬로 빼는 건 얼마나 어렵겠는가. 심지어 차량은 줄어든 체급만큼 각 부품도 재구성해야 한다. 몸에 비유하면 위장 다이어트,
간 다이어트, 오장육부다이어트를 다 따로 하는 것이다.
이런 복잡한 설계가 당연히 하루아침에 나올 리 만무하다.
아현의 엔지니어들은 이런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X9에 반대했지만 부회장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무조건 만들어. 어차피 소형 SUV는 다 2030수요란 말이야. 기능, 편의 다 필요 없으니 디자인과 가격에 집중해. 아, 뒷좌석만 좀 줄이면 되겠구먼.
-세상에 완벽한 차가 어떻게 한 번에 만들어지나? 부족한 부분은 매년 업그레이드 출시하면 돼.
선출시 후보완.
홍상기의 경영 철학은 아직도 경부고속도로 준공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존심을 꺾지 못하고 떠나간 엔지니어들도 수두룩하다.
박 전무는 X9 탄생 비화를 실토하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미 출시 전부터 상당한 문제가 보고된 차량이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만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까?”
“많았죠. 인명 사고가 빤히 예고된 차량을 누가 만들고 싶겠습니까. 내 밑에서 떠난 엔지니어만 해도 수두룩합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차량이 출시된 겁니까?”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이건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기업은 군대보다 위계가 더 엄격한 집단으로 위에서 까라면 그게 법이다. 사태의 원흉은 결국 홍상기 부회장이겠지.
하지만 준철에겐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 할 문제였다.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저희는 꼭 확인을 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왜 이런 차를 출시했습니까?”
“……부회장님의 지시였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사실 사전에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형사처벌의 중요 기준점이 되는 문제라서요.”
이에 그가 화들짝 놀랐다.
“혀, 형사처벌요?”
“예. 저희는 현 사태를 겨우 리콜 명령으로 끝낼 생각 없습니다.”
박 전무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리콜 명령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어? 관련자 형사처벌까지?!’
“무엇보다 제 두 번째 질문이 중요한데.”
“잠시만요. 그럼 그 형사처벌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최종 결정권자…… 및 실무를 봤던 개발자들 모두 포함입니다.”
“아니, 그럼…….”
“걱정 마십쇼. 전무님께선 오늘 이 자리에 직접 나오셨으니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무서움과 안도가 동시에 드는 말이다.
만약 오늘 이 자리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함께 기소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인명 피해가 보고된 건 아닌데……. 좀 과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 봤자 살인이냐 살인미수냐 하는 차이죠.”
그가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준철이 바로 서류를 내밀었다.
“사실 저흰 이것도 미수가 아니라 거의 살인이라 봅니다. X9 불량을 조사하다 아현차의 고질적 문제까지 알게 됐거든요.”
“…….”
“내구성 떨어지는 부품, 에어백 미작동 등 안전과 직결된 문제가 상당수 발견되었습니다. 그 차량이 무려 17만 대에요.”
“…….”
“과연 이 기간 동안 정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요.”
박 전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형사처벌이 그리 과한 게 아니다. 안전 문제는 해마다 지적되는 문제였고, 아현은 그럴 때마다 무상 수리로 땜빵하기 바빴다. 젊은 과장 말대로 정말 인명 피해가 단 한
건도 없었을까.
그가 자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할 때, 준철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출시 이전의 얘기를 들었으니, 이젠 출시 이후의 일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
“고객들이 대책 위원회까지 꾸릴 정도면 아현도 X9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판단합니다.”
“…….”
“혹시 아현차 내부에서 이런 일에 대한 은폐 시도가 있었습니까?”
***
박 전무의 증언까지 확보한 준철은 가장 먼저 금감원에 공시를 요청했다.
사실 차량 리콜은 대개 당국이 ‘권고’하면 기업이 이에 승복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이번엔 리콜‘명령’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 규모가 무려 17만 대.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리콜이다.
증권시장의 혼란이 불가피했으니 기업보다 주주들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린 것이다.
-다음 소식입니다. 중고차 시장 진출로 아현차가 연일 신고가를 갱신한 가운데, 공정위가 제동을 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6개월 전 출시된 X9 모델이 논란이었는데요. 공정위와 한국자동차안전연구원의 공동 조사 결과 엔진 과열, 통기 불량 등 다수의 문제가 적발되었습니다.
그간 원인 미상으로 결론 났던 불량들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현차의 다른 차종에도 상당한 불량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합동 조사단은 총 불량 차량을 17만 대로 추산했고 아현 측에 즉각 시정 명령을 내릴 계획이라
밝혔습니다.
만약 현실화되면 유사 이래 최대 리콜 사태가 될 전망입니다.
-한편 공정위는 이 모두 핵심 내부자 증언을 확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뉴스가 터지자 중고차 진출로 큰 상승을 했던 아현차 주가가 단숨에 폭락해 버렸다.
주요 경제지와 애널리스트들은 적자가 수천억대에 달할 것이라며 목표 주가를 대거 낮췄다.
“이 무슨 일이야!”
홍상기 부회장은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신문을 갈기갈기 찢었다. 폭락을 거듭한 아현차 주가는 단 일주일 만에 중고차 진출 호재 이전 가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정작 화
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이 모두 핵심 내부자의 증언을 확보했다?”
이 중에 배신자가 나왔다는 소리.
사실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임원들이 모두 집합당한 자리에서 박 전무의 빈자리는 누가 그 내부자인지를 말해 줬다.
“박 전무 어떻게 됐어?”
“사흘 전 연차를 내고 출근하고 있지 않다고……. 연락도 두절됐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새끼.”
치가 다 떨린다.
하지만 지금은 배신자를 욕해 댈 시간이 없었다. X9 결함 조사로 시작한 불똥이 차량 17만 대로 튀지 않았나.
수출용 컨테이너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한 기분이다.
이제부턴 여기서 몇만 대를 무상 수리로 끝내고, 환불로 끝낼지 줄다리기해야 한다.
“지금 문제 된 차량이 17만 대라 했지? 그중 얼마나 환불해야 돼?”
“4만 대가량을 환불 조치하라 했습니다. 나머지는 무상 수리를 해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돈이 얼만데?”
돈 얘기에 회의실은 어느 때보다 얼어붙었다.
“그…… 꼭 환불 조치가 나온다 해서 고객들이 다 환불을 요구하는 건 아닙니다. 바우처 지급, 보증 기한 연장으로 보상하면 꼭 환불이 아니어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예상 금액 얼마야?”
“저희 계산대로라면 2천억 대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 3천억 각오해야겠군. 우리 임원들은 사태 축소하고, 내 앞에서 알랑방귀 뀌기 바쁜 사람들이잖아?”
듣고 싶은 대답이 나올 때까지 쪼는 게 누군데…….
“됐다. 이 문제 더 재론해서 뭐 해. 1만 대 아니, 많이 양보해서 2만 대로 끝내.”
“……예?”
“환불은 딱 2만 대로 끝내라고. 나머지는 어떻게든 무상 수리로 끝낸다.”
이번 회의도 어김없이 일방적인 명령이다. 부회장은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공정위와 줄다리기를 계속할 모양이다.
그렇게 회의를 끝내려 할 때, 바깥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회의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박 전무였기 때문이다.
“아니 저, 저 여기가 어디라고!”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굴하지 않고 그는 부회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회장은 눈빛이 이글거렸다.
“늦어서 죄송? 박 전무, 진짜 죄송할 건 따로 있지 않나?”
“굳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모두 다 죄송합니다.”
“딱히 죄송한 얼굴이 아닌데?”
“하지만 부회장님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쇼. 위기는 기회라 했습니다. 이번을 기회 삼아 아현이 도약해야 합니다. 당국의 리콜 요청을 무조건 수용하고, 선처를 부탁하시죠. 그게
저희가 살길입니다.”
쾅-!
“배신자 새끼가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거려?”
“…….”
“당장 나가! 넌 더 이상 아현차 임원 아니야!”
그때 문밖에서 익숙하고 아주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충신을 이렇게 내치니까 아현차가 박살이 나지.”
“뭐, 뭐야, 넌?”
“이준철 과장입니다.”
준철은 팀 과장 다섯 명을 동원해 회의실로 난입했다.
박 전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임원들의 얼굴이 확 바뀌었다. 저승사자가 면전에 찾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홍상기 씨, 회사 경영 제대로 하고 싶으면 주변에 있는 이 간신들부터 치우세요.”
“뭐?”
“X9 전말은 다 들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다 반대했는데 본인이 고집 부려서 억지로 개발된 차라고.”
“…….”
“충신들의 직언을 왜 안 듣고 다 쫓아내기 바빴습니까. 주변에 이렇게 예스맨들만 있으니 제대로 된 결정이 나올 리 없죠.”
준철은 한껏 빈정거렸다.
부회장 놈 자존심을 확 죽여 놔야 한다.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왔습니까?”
“집주인이 자기 집 불난 거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뭐?”
“카트리 공문, 우리 공문, 그리고 주가 공시.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 세 루트로 다 들으셨을 텐데, 어째서 한마디 대답이 없습니까?”
왜 없겠나.
“설마,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승복 안 하려는 겁니까. 우리랑 줄다리기해서 리콜 대수 줄여 보려고요?”
연락이 왔어도 진작 왔어야 한다. 싹싹 빌고 진정성 있는 대책을 가져와도 모자랄 판국이다. 일언반구 말이 없다는 건 끝까지 싸워 보겠단 뜻이겠지.
준철은 씩 웃으며 한 서류를 내밀었다.
“우리 오붓하게 얘기 좀 합시다.”
회의실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기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