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
24화
공수교대 (2)
“한경 그룹 김원석 사장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뵀습니다.”
준철의 예상대로, 얼마 뒤 김 사장이 공정위를 찾아왔다.
1차 재판 내용은 뉴스에 적나라하게 보도됐고, 한경 그룹의 협박 전화까지 공개되며 여론은 악화일로였다.
초췌한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쪽 변호팀도 이미 재판을 포기했다는 걸.
“재판과 관련한 얘기요?”
박윤수 팀장이 까칠하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법원에서 볼 것이지 뭐하러 찾아왔습니까? 우리 수사할 땐 만나 주지도 않더니.”
“결례를 용서하십쇼. 오늘 저희는 정말 진정성 있는 제안을 드리려 찾아뵀습니다.”
상황이 얼마나 불리한지는 잘 아는 모양이다.
박 팀장은 슬며시 준철을 봤고, 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바쁘실 테니 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그간 대리점에 갑질해 온 저희 모든 만행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를 꺼내었다.
“일전에 말씀하신 관련자 처벌 내용입니다. 현재 구속된 부사장 외 임원 5명을 해임하고, 당시 실무진이었던 부장들을 정직에 처하겠습니다.”
“이미 재판 다 시작됐는데, 이제 와 문책하겠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대리점에 목표 매출을 통보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강제 매매도 하지 않을 것이고요. 각 대리점들의 피해 규모를 추산하고 이를 배상하겠습니다.”
관련자 처벌, 강제 매매 금지, 피해 보상.
공정위가 원하는 처벌 내용이 다 나왔다. 한마디로 백기투항한 셈.
하지만 박 팀장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또요?”
“예?”
“그게 끝입니까? 잘못을 인정한 대가로 저희한테 바라는 것도 당연히 있을 거 아니요?”
“……대신에 임원들 형사처벌만은 하지 말아 주십쇼.”
“그건 안 되겠는데요. 재판에 출석하지 말아라, 가맹 끊겠다 별의별 협박을 해 대지 않았습니까? 공개된 증거가 이 정도면 노민기 회장도 입건 처리할 수 있어요.”
“재판에 출석하지 말라 협박한 건 부사장이 아니라 접니다. 그럼 저를 구속해 주십쇼.”
그가 그리 말하자 박 팀장의 말문이 막혔다.
항상 여기 끌려오는 놈들은 똑같았다.
나는 아니다, 위에서 시켰다, 아랫놈이 나 몰래 했다. 그렇게 남 탓하기 바쁜데 이 사내는 참 이례적이다. 자기 잘못인 걸 인정해 버리다니.
“물론 저 또한 이 해고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말문이 막힌 박 팀장을 대신해 준철이 물었다.
“그 협박 전화는 본인 의지로 돌린 겁니까, 아님 사장님보다 더 위에서 시킨 겁니까?”
“위라면 누구……?”
“노민기 회장이요.”
“회장님은 절대 아닙니다. 모두 다 제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다.
불명의 대화로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는데.
준철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상하네요. 사장님은 반성해서 자수하는 게 아니라, 꼭 회장님을 보호하기 위해 자수하는 걸로 보여요.”
“아,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나오는 말과 달리 이미 그의 얼굴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럼 이 제안, 어느 선까지 합의된 거예요?”
“…….”
“어차피 이 사건 노민기 회장한테 씌울 생각 없습니다. 임원 해고하고 피해 보상하는 내용, 이거 회장도 동의한 내용입니까?”
“예.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한 내용입니다.”
준철은 추궁을 그쯤 하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누구의 잘못인지 밝혀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대리점들의 업무 정상화다.
긴 시간 서류를 읽던 준철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한데 몇 가지 좀 부족한 게 있는 것 같네요.”
“말씀하십쇼.”
“첫째. 지금 대리점들이 가지고 있는 재고 모두 반품해 주세요.”
“……재고요?”
“지금 한경 그룹에서 강매한 거 인정하셨잖아요. 그럼 강제로 팔았던 거 다시 회수해야죠?”
“…….”
“대리점들이 얼추 추산한 금액만 40억대였습니다. 피해 보상과 별개로 이것도 반품시켜 주세요.”
40억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선례를 남기면 아마 지금껏 가만히 있던 대리점들까지 모두 반품을 요구할 것이다.
그 액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김 사장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협박 전화가 공개되고 불매운동까지 펼쳐지는 시점에 그깟 반품쯤이야.
“알겠습니다. 모두 회수하고 돌려놓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대리점들 단체 구성 인정해 주세요.”
하지만 두 번째 안을 듣자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단체 구성요?”
“예. 뭐 자세히 말 안 해도 아시죠? 대리점들이 본사와 가격 협상할 때 단체 행동 할 수 있다는 거. 한마디로 대리점 노조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팀장님. 다른 건 몰라도 단체 구성안은…”
“이거 안 하시면 나중에 또 뒤에서 협박하실 거잖아요.”
“아닙니다. 정말 안 그럴 겁니다.”
“협박 전화로 본인이 직접 하신 말인데, 이제 와 안 하시겠다?”
“…….”
“긴말할 거 없습니다. 저희가 이 사건 편안하게 손 떼게 대리점들 단체 구성 인정하세요. 만약 응하지 않으면, 아직도 뒤에서 보복할 마음이 있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대리점 단체를 인정하면 보복은 물론, 단가 후려치기도 못 하고, 가맹권 가지고 협박도 못 한다.
본사-대리점 이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을 강행하는 건 더 최악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팀이 백방으로 나섰지만 부정적인 전망 일색 아니었나?
“대신 저희도 하나 양보할게요. 법정에서 구형한 과징금 내역 철회하겠습니다.”
긴 시간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리점 단체 구성도 인정하겠습니다.”
“이건 꽤 예민한 문젠데, 회장님 의사 안 물어봐도 되나요?”
“설득은 제가 해야죠.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지고 회장님 설득하겠습니다.”
결연히 말하는 김 사장에게서 애증의 감정이 차올랐다.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회장 대신 벌을 받고, 그 회장을 설득까지 해야 하다니.
“좋습니다. 그럼 저희도 형사처벌 고심해 보죠.”
“관대한 처분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조속히 이 문제 해결해 경영 정상화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인사하고 나가자 박 팀장이 슬쩍 우려를 표했다.
“한경 그룹에서 대리점들 단체 구성 인정할까요?”
“안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임원들 해고시킨 거 보면 저기도 지금 불 끄느라 정신없어 보여요.”
“그건 그래 보이는데…… 정말 협박한 사람들 봐줄 겁니까? 증거 다 공개돼서 형사처벌은 무조건 시킬 수 있어요.”
“그거 하나 시키려면 저쪽도 재판 끝까지 밀어붙일걸요.”
장기전 가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지금은 대리점만 생각해야 한다.
“대리점도 관련자 처벌해 달란 요구는 별로 없었습니다. 한경 그룹 관행 바꾸고 하루빨리 업무 정상화하고 싶지.”
“어휴- 어떻게 잡은 증건데…….”
“부사장 쪽 임원들 줄사퇴시킨 것만으로도 크게 이긴 거예요. 그리고 저쪽에서 만에 하나 3심까지 끌면 저희도 증인들 이탈할 수 있으니 불리합니다.”
한 사건을 5년 동안 끌었으니, 당연히 분한 마음이 더 클 것이다.
박 팀장이 그래도 마뜩지 않아 하자 준철이 생긋 웃었다.
“대리점 하나만 생각하자고요. 여기서 합의하는 게 모두가 이기는 겁니다.”
***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경 그룹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회견을 가졌다.
“발표하기에 앞서 저희 한경 그룹 임원들은 최근 추락한 주가에 큰 책임을 통감합니다. 저희들의 무리한 경영 방식으로 대리점과 주주 여러분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김 사장은 허리까지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단상에 섰다.
“먼저 기소 내용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희 한경모비스는 각 대리점에게 과한 목표 매출을 정했고, 이에 맞춰 물품을 강매해 왔습니다. 이는 공정거래법 거래상 지위 남용에 해당하는
명백한 갑질입니다.”
기업이 스스로 갑질을 인정하자 기자석이 크게 웅성거렸다.
“하여 저희는 현재 대리점들이 가지고 있는 악성재고를 파악하고, 모두 반품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대리점들이 입었던 피해를 조사하여 그에 맞는 손해를 배상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손해배상이란 말을 힘주어 말하며 다음 장으로 원고를 넘겼다.
“당연히 이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할 것입니다. 현재 저희는 구속된 관련자들을 모두 문책하여 해고 처리하였습니다. 회사 내부에 윤리위를 두어 갑질 문제가 재발할 수 없도록 직원
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사건과 관련, 보복 우려가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여 저희는 여러 필요성에 따라, 대리점들의 단체 구성을 승인하기로 했습니다.”
그리 말하자 수많은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한국에서 노조 설립은 당연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껏 대리점들의 단체 구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곳은 없었다.
‘세기의 대결’이란 이름답게 정말 판례를 만든 사례다.
김 사장의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한 말씀만 해 주십쇼! 그럼 대리점 단체는 어떤 권한을 가지는 겁니까?”
“법으로 보장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가격 협상권, 이의 제기권 등 부당한 행위에 대해 대리점이 단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단체를 구성해도 보복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요?”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일을 가지고 대리점에 불이익을 주는 행위는 절대 없을 겁니다. 또한 대리점들이 단체 구성을 하면 저희의 보복에 공동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단체 구성을 인정했다는 건 보복을 하지 않겠단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럼 2차 공판은 안 여는 겁니까?”
“예. 공정위와 모든 내용을 합의했고, 대리점들의 양해도 구했습니다. 상호 협의 간에 재판은 합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구속된 관련 임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들도 처벌받습니까?”
막힘없이 대답하던 김 사장도 그 질문엔 잠시 침묵했다.
“그 내용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 사장이 서둘러 퇴장하자 기자들이 더욱 아우성쳤다.
“아니, 그래서 처벌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2차 공판 앞두고 합의한 거면 처벌 안 하겠다는 거 같은데?”
“대리점 단체는 왜 인정하겠다는 거지? 공정위가 하나 내주고 하나 받아 낸 거 아니야?”
본사가 대리점들의 단체 구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들어야 할 얘기도 많다.
그렇게 애만 태우고 있을 때, 기자 한 명이 중앙홀 문을 벌컥 열고 다급하게 말했다.
“선배. 지금 공정위가 소 취하하려고 법원으로 갔답니다. 메이저 신문사들은 이미 다 그쪽으로 붙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