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 Trade Comission RAW novel - Chapter 241
241화
천재지변
금요일 아침의 여의도.
직장인들이 공중제비를 도는 주중 마지막 날이었지만, 종합국 황 팀장 사무실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다크서클에 파묻힌 반원들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 준다. 지난 한 달이 얼마나 고단했었는지.
하지만 고생했던 것과는 별개로 이젠 결과를 인정해야 할 때다.
“팀장님, 비록 증거는 못 찾았지만……. 이거 리베이트 납품 맞습니다.”
성진유업의 납품 의혹이었다.
놈들은 리베이트로 수도권 산후조리원에 분유 납품권을 따냈다. 그 수가 무려 50여 곳, 납품 규모 320억대! 이는 수도권에서 태어난 신생아 7명 중 1명이 리베이트 분유를 먹었단
뜻이기도 했다.
3팀은 지난 내리 한 달을 추적하며 이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하며 조사는 제자리걸음 중.
지금 가장 화가 나는 건 이번 조사가 왜 실패했는지 알 것 같다는 것이다.
“성진유업. 10년 전에도 분유 리베이트 하다 적발된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때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어요.”
“이 자식들 아무래도 범죄 수법을 더 진화시킨 것 같습니다.”
성진유업은 이미 동종 전과가 있는 기업이었다.
10년 전에도 무려 200억대 분유 납품이 적발돼 임원들이 줄소환당했다. 하지만 그 조사는 고작 과징금 2억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번엔 그땐 쓴 수법이 아니라 또 창의적인 리베이트 방식을 개발해 낸 것 같다. 범죄 수법이 더 진화했으며 이젠 빈틈조차 찾을 수 없다.
하긴 200억짜리 리베이트를 과징금 2억으로 마무리했으니 어떤 바보가 이걸 반성하겠나.
한국 3대 우유업체 중 하나인 성진유업에 2억은 훈방이나 다름없는 처벌이었다.
“후우…….”
책임자인 황 팀장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원점에서 재검토해 보자. 성진유업, 이거 리베이트가 아닐 수도 있나?”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경기권 산후조리원 20곳이 5년 동안 성진 분유만 썼어요. 이것도 서로 시차가 다르면 모를까. 무슨 이북에서 지령 내려온 간첩처럼 한날한시에 분유를 다
바꿔 버렸습니다.”
“서울권 30여 곳도 똑같습니다. 정확히 3년 전에 분유 바꾸고 단 한 차례도 바꾸지 않았죠.”
황 팀장은 조심스러웠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순 있다. 그래도 성진유업이 나름 업계 인지도는 높은 편 아닌가.
“그건 성진유업의 경쟁력이 반영된 게 아닌가. 뭐 품질이나 가격 같은…….”
“절대 아닙니다. 성진유업이 야쿠르트, 커피·음료 등에선 부동의 1위지만 분유 업계에선 시장점유율이 겨우 8위밖에 안 돼요.”
“분유는 애초에 성진유업의 주력 사업도 아니었습니다. 시장 진출도 겨우 15년밖에 안 되죠.”
김 반장은 이 지지부진한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팀장님, 그냥 이 판매 지도 하나만 봐도 답이 딱 나옵니다. 경기권 20곳, 서울권 30곳. 이게 지금 수도권 전 지역에 퍼져 있는 게 아니라, 특정 지역에 쏠려 있지
않습니까.”
“…….”
“리베이트로 따낸 납품이 아니라면 이런 판매 지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성진유업의 판매 지도는 아프리카 국경선을 방불케 했다. 누가 수도권 지도를 펼쳐 놓고 공략 지점을 지시해 준 듯 특정 지역에만 강세를 보였다.
“근데 왜 증거가 안 나오는 거야 대체!”
답답함 마음에 짜증이 튀어나오는 황 팀장이다.
종합국 3팀이 지난 한 달을 허송세월로 보낸 게 아니었다. 성진유업의 영업 자료를 싹 다 압수하고 의심 내역을 샅샅이 뒤졌다.
1년 치 자료에서 범행이 확인되지 않아 2년 치를 요구했고, 그렇게 5년 치 자료까지 훑어봤지만 증거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고정하세요, 팀장님. 성진유업 놈들 원래 이런 방면에서 선수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10년 전 그 솜방망이 처벌이 문제였다. 한 20억을 부과했으면 정신을 바짝 차렸을 텐데 고작 2억짜리 과징금으로 끝나 버렸으니.
공정위의 솜방망이 처벌이 범죄 수법을 진화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젠장.”
하지만 지금은 지나간 과거만 탓하며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최근 성진유업의 사세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리베이트 납품이 고작 20여 곳으로 확인됐는데, 자신들 수법이 절대 안 들킨단 확신이 드니 마구잡이로 사세를 늘린 것 같다.
그 결과 저출산으로 산부인과 폐업이 속출하는 이 시국에도 수도권 50여 곳을 함락시켜 버렸다. 더 두고 보다간 곧 150이 될 것이다.
“이번 리베이트는 의심되는 돈이 얼마야?”
“지난번보다 더 큽니다. 최소 320억 정도요.”
“이 자식들 내버려 두면 더 사세를 키우겠지?”
“……네. 분유 업계에선 산후조리원이 전쟁터라 하더군요. 가만두면 더 커질 겁니다.”
신생아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먹어 보는 외부 음식이 바로 분유다. 이 신생아들의 단순한 입맛을 잘 길들여 놓으면 산모들의 구매가 계속 이어진다.
이렇듯 중요한 시장인데 성진유업이 어디 가만있겠나. 누군가 제재하지 않으면 놈들은 더욱더 사세를 키울 것이다.
긴 생각 끝에 황 팀장이 결단을 내렸다.
“됐다. 어차피 이건 우리 선에서 해결 안 되겠어.”
그는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과장님께 보고해 보지.”
***
준철은 새삼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 걸 뭐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지.
“날씨가 참 맑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준철은 만나는 사람마다 밝게 인사하며 안부를 물었다.
사람이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 확실히 인상부터 달라진다. 오늘만 지나고 나면 주말 포함, 장장 5일간의 휴가가 아닌가!
반원들에게 납치당하듯 끌려갔던 낚시터를 제외하곤 이렇게 길게 쉬어 본 적도 없었다. 그때도 하필 어협의 담합을 적발하느라 휴가가 아닌 출장을 다녀온 기분이었지.
이번엔 일에서 완전히 해방된 휴가를 만끽할 참이다.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랬나요? 하하.”
“어디 뭐 여행이라도 가시나 봐요.”
“아니요. 집에만 있을 겁니다. 바깥에 돌아다니면 꼭 사고에 휘말려서.”
“5일 동안요?”
“그래, 5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을 거야.”
준철의 너스레에 팀장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일하고 난 이후 과장님의 사적인 얘기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다. 하긴 부임하자마자 변변한 회식도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되지 않았나. 일이 질릴 만도 됐다.
“오늘은 간단히 업무 지시만 드릴 테니, 큰 문제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5일 동안 휴대폰을 꺼 놓을 계획이었다.
준철은 밀린 서류 더미를 검토했다.
“오 팀장님, 그 담합 사건은 관련 부처랑 잘 협의해 주세요.”
“네.”
“김 팀장님, 이건 그냥 기소 치는 게 좋겠습니다. 검찰에 넘겨서 얼른 끝내 버리세요.”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서 팀장. 자기는 어차피 지금 맡고 있는 사건 없지?
“네.”
“잘됐다. 민원실 가면 국민 신문고에서 넘어온 민원 자료 있을 거야. 거기서 디벨롭시킬 만한 사건 검토 좀 하고 있어. 나 복귀하면 바로 일 들어가게.”
“아, 예. 알겠습니다.”
밀린 업무가 참 많다. 본래 과장이란 자리가 위에서 지시나 내리는 자리인데, 현장에서 직접 뛰다 보니 결재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이로써 오늘 업무는 끝.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진 저 복귀하고 나서 계속 회의하죠.”
“네. 휴가 잘 다녀오세요. 과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회의가 끝나자 팀장들이 한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과장님 저……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하지만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돌아가는 와중에 황 팀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는 오늘 회의 내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어 뭔 일 있나 싶던 차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거 참…… 휴가 앞두셨는데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뭔데요.”
“리베이트 납품을 하나 잡았는데 이게 좀체 진도가 안 나가서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상의 좀 드리고 싶습니다.”
황 팀장은 서류 한 부를 건넸고, 준철의 얼굴은 짜게 식어 갔다.
***
“그러니까…… 분유 납품 비리라는 겁니까. 상대는 성진유업이고요?”
“그렇습니다.”
“이거 제가 아는 그 성진유업 맞죠?”
“네. 거기 맞습니다.”
성진유업은 준철에게도 매우 익숙한 기업이었다.
아니, 국민 모두에게 매우 유명했다.
그건 바로 성진이 한국의 3대 유제품 기업으로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음료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갑질 녹취록으로 큰 파문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영업 사원의 폭언과 협박은 그간 성진유업이 어떻게 영업을 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한국 3대 유제품 기업 타이틀은 편의점주들의 피눈물로 이룩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식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그랬던 놈들이 또다시 지저분한 영업 방식으로 도마에 올랐다. 갑질로는 모자랐는지 이번엔 리베이트다.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준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현재 어디까지 발견된 건데요?”
“산후조리원 50여 곳을 확인한 결과, 모두 리베이트로 추정됩니다.”
“그래도 성진유업의 명성이 있지 않습니까. 품질이나 가격 경쟁력은 꽤 괜찮은 것으로 아는데…….”
“그랬더라면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황 팀장은 수도권 특정 지역에 편중된 판매 지도를 펼쳤다.
“문제 된 조리원들 납품 기록을 보면 모두 비슷한 연도에 분유 납품 업체를 바꾼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
“그렇다고 성진유업의 시장점유율이 높은가? 아니요. 성진이 음료 제품 업계에선 강자일진 몰라도 분유 업계에선 시장점유율 겨우 8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
“심지어 가격이 싼 것도 아니고, 소비자들 평판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조리원 입장에서 이 제품을 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준철이 한숨을 쉬었다.
“근데 왜 증거가 안 나오는 겁니까.”
“아무래도 범죄 수법을 더 진화시킨 것 같습니다.”
“진화요?”
“네. 사실 성진유업이 10년 전에도 비슷한 비리로 적발당한 적이 있거든요. 그땐 200억대 분유 납품 비리였는데 과징금은 고작 2억에 그쳤습니다.”
지난 1차 적발이 성진의 자신감을 키워 주었다.
이 부분만 조심하면 당국의 적발을 따돌릴 수 있구나, 혹 또다시 걸린다 해도 범죄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압도적으로 높구나.
성진유업은 악덕 기업답게 또 이런 쪽으론 피드백이 빨랐다.
범죄 수법을 더 보완해 이젠 증거를 찾을 수도 없는 리베이트를 개발해 내었다.